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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자 꿀 Sep 10. 2019

해외취업: 이직 연봉협상에 쿨은 없어

개발자가 스웨덴으로 이직한 썰 20

회사를 옮긴 지 1년이 넘어가는 지금 이직 연봉협상에 대해 쓰는 것은 지나친 추억팔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예전 메일과 일기를 뒤져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훨씬 더 늦기 전에 경험을 정돈된 글로 아카이빙하기 위해서다. 또 비슷한 상황을 앞두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인생에 몇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이벤트를 겪고 있는 익명의 그에게, 내 인생에 첫 번째 이직 연봉 협상은 이렇게 아마추어 같았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작은 응원 같은 것이다.


이 글은 개인의 경험과 생각이다. 어떤 범위에도 한정해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일하고 있다.


작년 봄, 온사이트 인터뷰가 끝난 다음날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개인적으로 예약한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리크루터에게 이메일이 왔다. 온사이트 인터뷰 결과가 좋아서 오퍼를 결정했다면서, 아직 스톡홀름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당장 내일 회사에 한 번 더 오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남아있는 시차 적응과 스트레스에 몸도 마음도 내맡긴 상태였다가 피가 순식간에 확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찍 결과를 받을 줄은 몰랐다. 온사이트 인터뷰를 보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을 되짚어보며 한국에 돌아가서 한두 주 있다가 연락이 오겠거니 했는데 다음날! 다! 음! 날! 합격이라니요.

나에게는 인터뷰를 보는 경험 자체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온사이트 인터뷰 이후로 미루고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스톡홀름에 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스웨덴이라는 한국 사람에게 다소 생소한 상황에 안착했을 때 적어도 스웨덴에 대해 조사라도 해봄직한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더 있을 숙소만 되는대로 예약하고 계획도 안 세웠고 스톡홀름 사진도 찾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응원이나 걱정도 버거워 인터뷰를 보러 간다고 미리 알린 사람이 다섯 명도 안될 것이다. 일단 전부 인터뷰 통과와는 관련 없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금 예습을 하고 갔다면,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다음날 회사에 다시 갔고 한 시간 동안 엄청난 정보를 듣고 왔다.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이직이 처음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 하는지 몰랐을뿐더러 인터뷰만 간신히 통과한 영어 실력으로 연금이니 스톡옵션에 대해 예습 없이 설명을 듣는 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 돈에 대한 것은 모두 정해져 있고 우리가 제시하는 연봉은 이만큼이다. 어떤 팀으로 갈지는 아직 모른다.


예상 연봉


흥미로운 점은 회사가 아직 희망 연봉을 물어보지도 않았을뿐더러(그야 인터뷰 보고 이틀 만에 다시 만났으니까) 계약서에 서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 연봉이나 현재 몸값이 얼마나 되는지 묻지 않았다는 거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인터뷰를 똑같이 잘 보면 똑같은 연봉을 제시받는 공평함이 바닥에 깔린 시스템인 것 같다. 물론 연봉을 올리고 싶을 때 이전 연봉을 근거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출발선을 크게 바꾸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출발선을 바꾸려면 인터뷰를 더 잘 보거나, 더 높은 직무 레벨로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유럽 특유의 분배를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때문에 지원자의 희망 연봉이나 현재 연봉을 기준으로 up/down 하는 눈치 싸움이 없다. 그래서 똑같이 인터뷰를 잘 봐놓고 박봉 직장에서 이직했다는 이유로 다시 남들보다 적은 연봉을 받는, 블라인드 앱에서 종종 봤던 '경력 이직했는데 신입 초봉보다 연봉이 낮은' 아이러니로부터 개인은 최소한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연봉을 높게 받고 싶다면 이 시스템 안에서는 개인이 베팅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은 문제가 있다. 출발선을 회사가 노조와 협상해서 정하기 때문에 몇 명을 더 설득해서 다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보상을 받기 힘든 구조다.


쉬워지지 말기


예상 연봉을 처음 들었을 때 Glassdoor보다 높은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내 생각보다 높다'라고 말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자리에서는 집에 돌아가 생각해보겠다는 정도로만 말했어야 했다. 현실이 Glassdoor보다 긍정적이라지만, 상황을 저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를 내보일 여지를 만드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연봉이 거의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손톱만큼이라도 올리려는 협상을 하려면 그전부터 쉽게 예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협상 전문가가 아니고 경험도 없는 내가 보기에도 보통 사람들의 생각 회로가 이런 것 같다. 뒤늦게 말을 바꾼다고 될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지만 언덕 하나라도 쉽게 넘으려면 말이다.

내 태도에 대한 후회는 시장에서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호락호락하고 강하게 어필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으로 일반화되었지만 상당히 지배적인 의견에 힘을 싣는 행동을 할 때마다 크게 놀라고 고민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당연히 나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하지만 변화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내가 가진 소수성 때문에 모르는 사이 강한 이미지를 남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내가 여자 개발자로 살아가는 내내 마음 한편에 간직해야 하는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6월 에스킬스투나에서


희망 연봉


Glassdoor 보다 높다고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연봉이 스웨덴에서 의미하는 바를 아직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끼리도 느끼는 체감 물가가 천차만별인데 뜬금없이 크로나로 월급을 받게 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알겠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세후 연봉, 평균 월세, 물가를 공부했고 당시 받던 연봉과 보상과 비교했을 때 조금 마이너스라는 계산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생각보다 높다고 벌써 말해버렸으니까! 게다가 상담 통로를 동원해서 '한국 개발자의 연봉을 맞춰줄 수 있는 유럽 회사는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다수의 답변을 받았다.

별로 희망적이지 않았어도 메일을 썼다. 처음에는 당시 회사에서 매년 얼마나 연봉이 상승했는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일을 잘하니까 거기서도 예상 연봉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봉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알고 있다! 전혀 논리적이지도 멋있지도 않은 것을... 제안은 이미 충분히 높은 연봉이라는 답변과 함께 거절당했다.


이때 한국에서 받던 연봉은 말하지 않았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내 연봉이 그들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컸던 것 같다. 적절한 결정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계산에는 당연히 필요해도 가시적인 근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한국 연봉을 말하면 서로 다른 나라의 모르는 시장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쪽에서 우리는 잘 모르겠다던가 확인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하기 쉬울 것 같았다.

좀 더 가시적인 근거로 찾은게 생활 물가였다. 나는 한국에서 이만큼 생활수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고 이직때문에 사는 곳을 옮기는데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싶지는 않다고 말할 작정으로. 서울에서 연봉으로 유지하는 생활수준을 다른 도시로 환산해서 계산해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심지어 구매까지 했다. 결과를 받아보고 마이너스가 나온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똑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몇 퍼센트 더 올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했다.

쿨하지 않다. 전혀 쿨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통 몇 번이나 협상을 거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나는 멋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매월 돈을 더 받는 것이 달려있는데 찌질한 메일 한 번 쓰는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게다가 연봉 협상은 인생에 몇 번 오지 않는 기회이니 리크루터에게 미안하지만 그를 내 연습 상대로 최대한 써먹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리크루터가 있다면 미리 죄송하다)


여기서 간과한 사실은 리크루터가 얼.마.전 한국을 꽤 오래 여행했다는 사실이다. 인터뷰 때문에 화상으로 이야기할 때 들은 기억이 있는데 연봉을 올리는데 혈안이 되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자기 경험과 다양한 이유를 근거로 매우 정중하게 내 메일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한 줄 한 줄 설명해줬다. 그리고 이메일보다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빠르겠다고 시간을 잡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시도를 방어하는 유려한 답장을 읽으면서 참담했지만, 그가 자신의 이익을 집요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소수의 여성들이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방법은 틀릴지언정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아 마냥 슬프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당당해져도 될 것 같았다.


결과 발표


그리고 전화의 결과는? 내가 제시했던 인상률의 1/3 만큼 최종적으로 올렸다. 호랑이 펀치를 날렸다고 생각했는데 냥냥 펀치로 밝혀진 전혀 쿨하지도 멋있지도 않은 과정이었지만 내 이익을 조금 올렸으니 괜찮은 결과가 아닌가 한다.



글을 쓰면서 그때 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논리가 너무 어설퍼서 놀랐다. 지금 다시 하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이럴 때마다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어려움이 가슴에 콕 박힌다. 논리력이 독립적인 사고방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언어와 단단하게 묶여있는 것 같다. 들으면서 논리를 파악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심지어 글쓰기에서도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아서 저질러놓고 뒤늦게 실수를 찾는 일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신경쓰고 배워야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도 메일에서 소수의 여성들이 이익을 대변한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 주먹을 절로 꼭 쥐었던 기분이 정확하게 기억난다. 전문가의 입으로 현실을 전해듣는 일은 슬펐지만 반대로 개인적인 성취이기도 하고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일을 할 때 큰 목소리에 밀려 주춤하거나 자기 비하를 시작할 때 문득 떠올라서 정신을 차리게 한다. 위에서 말한 쉽게 yes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결을 같이해서 내 안에 이미 충분한 힘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간다. 원하는 것을 말하고 원하는 만큼 끈질기게 버티는 것. 어떻게 말하고 버티는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배워갈 수 있지만 모든 것은 나를 위해 물러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이다.



28th August 2019


#스웨덴 #개발자 #해외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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