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마을에 남기다
아빠의 기도
우리 세대가 모두 그렇지만 나 역시 부모님 특히, 아빠와 어린 시절의 삶을 많이 공유하지는 못한 것 같다. 거의 내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셨었고, 저녁상에서라도 마주하면 좋았을 텐데 너무 바쁜 아빠와 엄마 대신 할머니와 둘이 주로 밥을 먹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그게 그렇게 불만이거나 아쉬움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 몇 장 조차 남아있지 않은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삶이 조금은 안타깝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난 한 번도 아빠와 엄마로부터 '공부 좀 해라!!'라는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시절이라고 유난스러운 대한민국의 '엄마'들이 없지 않았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이 지금보다 치열했으면 치열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엄마와 아빠는 무슨 마음인지 단 한 번도, 적어도 내 기억 속에, 공부하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내가 알아서 잘 하는 아들은 아니었다. 매번 성적표를 들고 집에 올 때마다 성적표에 나온 내 등수의 앞자리를 커터 칼로 긁어내 없애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못난 성적표를 들이 밀어도 본체만체하셨다. 내가 다닌 중학교의 성적표에는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는 난이 있었다. 사인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다시 학교에 제출을 했어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아빠 사인을 흉내 내서 내가 직접 사인한 적이 있었다. 뭔 깡이었는지.
보통의 아빠, 엄마라면 자식이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으면 확인을 했을 텐데, 사인 훔치기는 무난히 성공했다.
사인 훔치기가 발생한 바로 다음 기말고사,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였던 것 같다. 전날 공부를 한다고 좀 하긴 했는데 잘 안되어, 걱정만 한 가득 안고 잠이 들다 말다 뒤척거리다가 새벽에 완전히 깼다. 한 4시 반쯤. 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목소리였다.
아빠가 기도를 하고 계셨다. 잠시 엿들었는데 여러 기도의 내용 중 짧은 한 마디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유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주세요."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훨씬 많이 보여줬던 우리 아빠의 기도를 처음 들었다. 너무 바쁘셔서 볼 수조차 없었던 아빠의 빡빡한 삶과 그 분의 기도가 나를 키웠다. 아들의 시험 날에도 아들의 건강을 기도한 아빠는 지금 나의 롤 모델이다.
아빠! 오늘도 무사히
삶에 치이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안 나올 때가 있다. 시간의 문제라기보다 여유의 문제이다. 그 사랑의 언어를 우리는 매우 갈급해하지만 정작 현실이 감정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늘 그래 왔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위험 속에 몸을 내던지고 일에 정신이 지배당해도 묵묵히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사랑한다'하지 않았어도, '사랑'아니면 무슨 단어로 가족을 위한 헌신을 표현할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해서 일터에 삶을 저당 잡힌 것이 우리 아버지들이다.
아주 어렸을 때 심심치 않게 나온 뉴스가 바로 매몰된 광부 이야기였다. 갱도가 무너져서 매몰되기도 하고, 일부러 폭파시키는 과정에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모두 인재였다.
어린 마음에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위험한 일을 왜 하려 하는 것일까.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탄광마다 갱도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빠! 오늘도 무사히"
안전한 삶 대신 가족을 택한 것. '사랑'아니면 다른 단어로 표현이 안된다.
벽화마을의 탄생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탄광 마을은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그 생을 다하게 되었다. 탄은 캐기보다 수입해야 하는 재화가 되어버린 탓이다. 당연히 이제 광업은 대한민국에서 사양 산업이 되었으며, 탄을 캐는 사람들과 그 가족이 삶을 가꾸어 나가던 광산 근처 마을은 존재는 하되 경제적 의미를 상실해 버린 공간이 되었다. 인구의 유출만 있고, 유입은 전혀 없는 그런 공간.
상장동 남부 마을도 탄광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함태광업소의 사택촌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호황기에는 광부만 4천 명 이상 모여 살았다고 하니 가족까지 합하면 주민만 만 명은 족히 되는 그런 매우 큰 마을이었을 것이다. 광산이 폐광된 후, 젊은 층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마을을 빠져나가고 이주할 여력이 없는 노인 인구만 남게 되어 마을의 공동화 현상은 매우 심각했다.
사실 우리나라 전역에 이런 마을은 무수히 많다. 한 때는 광부와 광부 가족으로서의 삶이 자랑스러웠을 그런 주민들이 모여있던 마을이었는데 정부의 정책 전환으로 미래를 잃어버린 마을. 공동체는 해체되고 을씨년스러운 건물만 남게 된 그런 마을. 아주 많다.
정부는 이런 마을 중 보존 가치가 큰 마을을 선정하여 벽화마을로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예전의 영광을 다시 찾을 길이 없어도 산업 발전에 기여한 광부와 그 가족의 삶을 조금이나마 가치 있게 평가한 것은 긍정적이다.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여러 탄광 마을 중 상장동 벽화마을에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이유는 이 마을만 유일하게 '광부의 삶'을 주제로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5분 거리에 석탄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덤이다.
상장동 벽화마을
사랑을 마을에 남기다
상장동 벽화마을을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고 안성에서부터 차를 몰았다. 상당히 긴 시간의 운전이었는데 빨리 이 마을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쉬지 않고 운전한 것 같다. 마을에 이르니 처음에는 어리 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장동 남부 마을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벽화'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못 온 줄 알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여기저기 마을 근처를 둘러보았는데도 의미 있는 벽화를 찾을 수 없었다. 후회가 밀려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 되겠다 싶어 주차하고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상장동 벽화마을을 따라 황지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비 온 뒤라 그런지 상당히 힘차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 하천을 따라 마을을 한번 둘러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정말 이 마을에 남겨진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황지천을 따라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집들을 먼저 둘러보았다. 사람이 사는 집이므로 셔터를 누르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주민들의 표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가옥에는 LPG통과 굴뚝이 모두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이 곳에서만은 적용되지 않는 듯했고, 우리 모두가 오래전에 살던 그런 집들이라 매우 반가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작은 광구 하나를 개발해 모두 모여서 탄을 캐던 곳을 '쫄딱구댕이'라고 했단다. 쫄딱구댕를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광부가 목숨을 잃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엄청난 탄맥이 숨겨져 있을 수 있으므로 쫄딱구댕이 하나를 잘 개발하면 당연히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거다. 새로운 광구를 개발할 때마다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서. 아니, 사랑하는 가족에게 무사히 돌아가고 싶어서.
세 광부의 벽화는 마치 초상화 같았다. 실제 주인공이 있는 그림일까. 세 광부의 모습에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이 특징으로 보건대 주인공이 실제로 있음에 틀림없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세 번째 광부의 모습이다. 마치 가족을 마주할 때처럼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소는 아닐지라도 이 삶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자신하는 그런 자존감 높은 표정인 것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있었다.
실제 광부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을 벽화로 남긴 것이다. 아마 두 사람의 실제 사진이 있었을 것이다. 광부 할아버지는 광부 아들과 손자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광부의 대표적 직업병인 진폐로 인해. 직업병이면서 불치병이었다고 한다. 갱도 안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보다 광부 일을 그만둔 후에도 진폐로 세상을 등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하니 가슴이 아프다.
광부
"광부의 얼굴은 패인 주름마다
탄가루가 스며있다.
노역의 고통이 스며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애잔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이 스며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광부의 그림 위에 적혀 있는 글귀였다.
상장동 벽화마을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벽화가 바로 일터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두 광부의 모습을 그린 이 벽화다. 먼지를 먹는지 밥을 먹는지 몰랐을. 하지만 아내의 사랑을 먹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벽화의 주인공인 두 분의 삶이 지금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지 알 길이 없지만, 축복의 삶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발파 작업 후 식초는 매우 유용했다고 한다. 더러워진 갱도 안을 말끔히 씻겨주었다고 하는데, 식초로 청소하는 모습도 벽화로 그려져 있다. 앞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먼지가 날려도 식초를 뿌려주면 먼지들이 얌전해졌다고 한다. 적당한 복용은 몸에도 이로운 식초이니만큼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이 마을 집집마다 대문 앞에 의자가 두 개씩 놓여 있다. 의자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오늘도 누군가가 앉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꼭 두 개씩이라는 것. 자식을 다 출가시킨 할머니들이 둘씩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자리되겠다. 정겨움이 몰려온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벽과 벽 사이의 매우 좁은 골목길을 마치 숲을 헤치듯 지나쳐야 한다. 집과 집 사이가 가까워 옆 집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보다 공동체로 더불어 사는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그런 마을이다.
후기
상장동 벽화마을에서 위쪽으로 걸어가면 문학마을이 있다. 숲 속에 실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는 책장도 있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주차를 할 수 없어 서둘러 두 컷만 찍고 다시 차에 올랐다.
문학마을에서 발견한 '너에게 묻는다(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뜨거운 삶, 사랑의 삶이 곳곳에 그려진 마을이 바로 상장동 벽화마을이었다.
상장동 벽화마을을 찾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이 곳을 찾는 사람 그 누구라도 마을에 깊게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상장동 벽화마을의 미래를 논하기는 어렵다.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이 마을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고 청년층이 모여들기 시작할지. 이 마을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우리의 삶을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하려 드는 세태 속에 여전히 남아 빛나야 할 가치가 있다면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그 희생의 마음이 아닐까. 그 마음으로 키워진 우리 모든 자식들의 감사함이 아닐까. 그런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최소한 이 마을은 우리의 삶과 나란히 한 길을 걸어갈 것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