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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Jun 02. 2019

도시, 살다 19화 - 아산 지중해 마을

이 마을의 3층이 궁금하다.

빨간 사슴 고기와 아미쉬(the Amish)


클리블랜드 서부에는 크로커 파크(Croker Park)라는 제법 큰 쇼핑몰이 있다. 남부에 위치한 사우스 파크(South Park)와 동부에 위치한 비치우드 플래이스 몰(Beachwood Place Mall)은 유명 백화점들이 하나의 실내 공간에 결합된 정말 큰 대형 백화점 같은 느낌이라면, 크로커 파크는 작지만 느낌 있는 2층짜리 건물로 구성된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1층에는 다양한 샵들이 위치하고, 2층은 주거 공간으로 구성된 건물이 모여있는데,, 이 곳에 방문하면 쇼핑몰에 와있는 느낌보다는 마을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 혹은 그냥 피크닉 나온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몇 주에 한 번씩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크로커 파크에서는 토요일 오전에 가끔 플리 마켓이 열렸다. 그런데 플리 마켓을 여는 사람들의 복장이 특이했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아미쉬(the Amish)'가 마켓을 여는 주인공들이었다. 동화책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것 같은 복장을 한 채, 그들은 말을 타고, 혹은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먼 길을 여행해서 크로커 파크로 온 것이란다. 오하이오주 아미쉬 마을에서 이 곳까지 오는 데에만 만 하루가 넘게 걸린다고 하니 그들의 상황이 더욱 궁금해졌다. 자동차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 그들의 삶은 현대적 관점에서 판단해보면 기이하다.


아미쉬의 플리 마켓에서 생애 처음으로 빨간 사슴(red deer) 고기를 먹어 보았다. 먹어본 고기라고는 소, 돼지, 닭고기밖에 없었던 나는 당연히 주저함이 컸다. 그래도 아미쉬가 직접 구워주는 사슴 고기를 언제 먹어보겠냐 싶어 시식에 도전해 보았는데, 맛은 마치 소고기 안심 같았다. 기름기가 없으면서 부드러운. 그냥 소고기 안심이라며 건너 주었더라도 구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씹어보니 살짝 이질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향이 올라오긴 했지만.  


비극


아미쉬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산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다. 아미쉬의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교육 기관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이른 나이에 경제적으로 자립한다. 이들의 마을에는 매우 작은 크기의 학교가 있다. 미국 공교육이 인정하는 정규 학교가 아닌 그들만의 학교. 학생 수가 적어 반을 나눌 필요도 없으므로 작은 건물에 교실 하나 혹은 둘 정도면 족한 그런 학교다.


유학을 시작한 바로 이듬해 펜실베이나주에 위치한 아미쉬 마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미쉬 학교의 작은 교실에서 총성이 연이어 울렸고, 다섯 여학생들의 삶은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총기 난사 사건의 결과는 늘 끔찍하다. 2006년 아미쉬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 역시 미국 전역이 깊은 슬픔에 빠져들 만큼 매우 충격적이었다.   


연약한 학생들을 살해하는 범인에 대한 분노는 모든 학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뜨겁게 불타오르지만, 미국에서 흔하디 흔한 총 한 자루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신앙 외에는 그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에서, 여학생만을 골라 살해한 범인에 대한 분노는 무섭도록 빠르게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교실 안에 있는 10명의 여학생 중 8명이 총격을 받았으며, 그중 다섯 명의 학생이 숨을 거두었다.


범인의 이름은 Charles Roberts, 비극이 벌어진 학교의 이름은 The West Nickel Mines School이었다.


회복


여섯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어린 생명을 다섯이나 저물게 한 범인에 대한 분노는 미국 전역에서 불타올랐지만, 아미쉬 커뮤니티는 조금 다르게 반응했다.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를 중심으로 '분노'보다 '용서'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이웃에서 이웃으로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용서를 선택한 것이다. 아미쉬 커뮤니티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힘으로 회복해 갔다.


크로커 파크 쇼핑몰이 위치한 도시는 웨스트 레이크(city of west lake)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이다. 박사 과정 중 community development 수업의 과제를 하기 위해 이 도시의 주민 자치회의를 참관한 적이 있다. 웨스트 레이크 시 정부에서 주민 자치회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의 예산을 배정한 모양인데, 내가 참관한 회의는 이 예산의 사용 용도를 정하는 회의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로를 정비하자는 의견부터 놀이터 신축에 대한 의견까지. 몇 가지 의견이 더 나온 후, 어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손을 드시고 또렷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미쉬에게 전합시다."


짧지만 깊은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회의장에 모인 주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기 시작했고, 회의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아미쉬의 경제 활동을 응원했던 쇼핑몰 크로커 파크가 위치한 소도시 웨스트 레이크. 이 곳 주민들의 결정은 눈이 부시게 찬란했다.


웨스트 레이크 주민들이 보낸 성금으로 펜실베니아 아미쉬 마을에 새로운 학교가 지어졌다. 이 학교의 이름은 "The New Hope School."


‘새로운 희망 학교’에서 배우고 성장한 아미쉬의 다음 세대는 이 학교의 역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19화는 아미쉬와의 만남과 그들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소개하면서 시작했지만, 사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미쉬라기보다 웨스트 레이크 시민들이다. 시 정부가 시민들이 마음껏 쓰도록 배정한 예산을 누군가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쓰고 싶었을 수도, 누군가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놀이 공간 확보를 위해 쓰고 싶었을 수도 있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며, 간절함이 묻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픔을 겪은 신앙 공동체 아미쉬에게 기부했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공동체의 결정에 대한 존중함이 없다면, 서로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결정이다. 그래서 그들의 결정을 잊을 수 없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난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전율이 온 몸을 휘감는다. 도시가 살아난다는 것은 하드웨어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 아닐까.


아산 지중해 마을


아산 지중해 마을을 소개하기까지 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산시 탕정면에 위치한 지중해 마을의 공식 명칭은 블루크리스탈 빌리지이다. 천안과 아산 중심지의 사이에 위치한 탕정면은 비록 산업화 시대 개발에서 소외되어 경제발전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6.25 전쟁의 상흔도 비켜갈 만큼 평온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외부와의 큰 교류 없이 지역의 공동체가 유지되어온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탕정면에 삼성 계열사의 진출이 이어지면서 공동체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수백 가구 역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 했는데 그들 중 일부 지역 주민이 끝까지 남아 정부의 도움으로 일군 마을이 바로 아산 지중해 마을, 블루크리스탈 빌리지이다.  


일부 지역 주민이 끝까지 남아 정부의 도움으로 일군 마을이 바로 아산 지중해 마을, 블루크리스 빌리지이다.


지중해 마을은 크게 산토리니, 프로방스, 파르테논 등 세 가지의 컨셉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토리니는 우리나라의 모 에너지 음료 광고로 유명한 그리스 에게 해 최남단의 섬이며,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중해와 맛 닿아 있다. 마지막으로 파로테논은 파르테논 신전을 유명한 아테네 지방이다. 블루크리스탈 빌리지는 지중해 주요 도시의 건축 양식을 모티브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하얀 도화지 같은 느낌의 건물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느 방향에 서서 셔터를 누르는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작품 사진을 수도 없이 건질 수 있다.


하얀 도화지 같은 느낌의 건물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마을 전체를 한눈에 담으려 애쓰다가 눈을 아래로 지긋이 향하면 1층의 상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수의 느낌 충만한 작은 샵들이 발길을 돌려세우기 바쁘다. 물론 이 마을에도 황리단길이나 경리단길처럼 프랜차이즈 상점이 존재한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비난의 화살을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을 전체를 한눈에 담으려 애쓰다가 눈을 아래로 지긋이 내려 뜨면 1층의 상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매우 예쁜 꽃집을 만날 수 있다. 자연과 숨 쉬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길을 걷다 보면, 파란 하늘을 수영하는 것 같은 등이 보인다. 이 마을의 밤은 낮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등이 보인다. 이 마을의 밤은 낮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마을의 중앙에 이르면 잠시 마음을 확 틔워주는 작은 공원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 시선을 끄는 것은 이 공간 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파트이다. 매우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묘하게 이 마을과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저 아파트에서 삶을 꾸리고 있을 대기업의 직원들과 가족에게 블루크리스탈 빌리지는 잠시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평안의 장소일 것이다. 이 마을에서 경제생활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원주민 역시 대기업 직원들의 존재는 고객으로서 큰 힘일 것이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다 보면 하나의 공동체로 묶일 날이 올 수 있도 있다.


분명 저 아파트에서 삶을 꾸리고 있을 대기업의 직원들과 가족에게 블루크리스탈 빌리지는 잠시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평안의 장소일 것이다.


모든 건물이 하얀색은 아니다. 하얀 도화지 위로 점 하나 찍혀 있듯이, 마치 새로 이사한 집의 포인트 벽지 같은 느낌의 건물이 여기저기 있어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원색 계열의 촌스러운 붓칠이 정감을 줄뿐만 아니라, 오히려 멋을 자아낸다.


모든 건물이 하얀색은 아니다. 하얀 도화지 위로 점 하나 찍혀 있듯이, 마치 새로 이사한 집의 포인트 벽지 같은 느낌의 건물이 여기저기 있어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원색 계열의 촌스러운 붓칠이 정감을 줄뿐만 아니라, 이 오히려 멋을 자아낸다.


아산 지중해 마을의 시그니쳐, 바로 반려견 축제 개판(Dog Fan)의 현수막이 보인다. 올해로 3회인데, 반려견의 성지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마을 주민들 중심으로 잘 기획된 축제는 지역경제 활성화의 엔진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무분별한 축제의 개최는 오히려 진을 빠지게 하고, 식상하게 하며, 재정 낭비의 원인이 되지만 말이다.


지중해 마을처럼 원주민의 삶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고 있는 공간에서의 축제는 살아나는 도시의 화룡정점과 같을 수 있다. 비록 강아지라도 무서워하는지라 난 참여를 기약할 수는 없지만, 진정 반려견의 성지로 거듭나길 기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산 지중해 마을의 시그니쳐, 바로 반려견 축제 개판(Dog Fan)의 현수막이 보인다. 올해로 벌써 3회인데, 반려견의 성지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이 마을의 또 다른 시그니쳐는 바로 이 벤치가 아닐까 한다. 그냥 나만의 주관적 생각이다. 벤치에 태양광 블록을 설치해 밤에 빛이 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블루크리스탈 빌리지의 화려한 밤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셈인데, 전기를 끌어온 것이 아니라 의미를 더하고 있는 스마트 벤치이다. 밤을 못 본 것이 갈수록 아쉬워지고 있다. 이 마을은 따뜻함에 똑똑함을 더하고 있다.  


전기를 끌어온 것이 아니라 의미를 더하고 있는 스마트 벤치이다


후기


지중해 마을은 여러 개의 3층짜리 건물로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이다. 마치 레고(lego)처럼 뛰어난 예술가가 건물 하나하나를 맞추어 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것 같은.


비록 첫 방문이어서 몇 가지 불편한 점들이 마음 한켠에 남기도 했지만, 그것을 상쇄할만한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건물의 1층은 예외 없이 상점이며 2층과 3층은 주로 주거 공간이다. 다만, 이 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에 의하면 2층이 공방과 교육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는 건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일군 마을로도 충분히 값진데 R&D(research and development)까지 하고 있는 공간이라니.


이 마을을 떠나며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건물의 3층이다. 수백 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원주민의 아들과 딸로서 이주의 유혹을 이겨내고 마을을 기어이 일군 열정이 녹아있는 공간. 그 공간의 가치가 이어지고 또 이어져 하나의 공동체 정신으로 영원했으면 좋겠다.


도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공동체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남의 즐거움에 배 아파하지 않고 진정 기뻐하는 그런. 아주 간단하지만 성공 사례도 드물다. 특히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신도시에서 공동체 정신을 일구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아산 지중해 마을은 주민들이 흩어지지 않았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라 지켜내고 남은 자들의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의 3층이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이다. 그들이 간직하고 계승할 공동체 정신이 그곳에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떠나며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3층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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