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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Mar 24. 2019

도시, 살다 18화 - 전주 자만 벽화갤러리

서로를 아끼면 마을이 살아난다.

Jewish in - White out


사이먼스 교수님은 늘 키파(유대 남자들이 머리에 핀으로 고정해 얹고 다니는 전통 모자)를 착용하고 출근하셨고, 유대 절기를 철저히 지키시는, 약간 이방인(?)인 내가 볼 때에는 근본주의 유대 신앙의 소유자였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친척 관계임은 분명해도 난 유대 절기에 대해 그다지 지식이 많지는 않다. 유월절과 오순절, 초막절 등 중요한 절기가 세 차례 있다는 것 정도를 들어서 알고 있었고, 여기에 네 개의 절기가 더해져 총 일곱 절기가 종교적으로 의미 있다는 것을 교수님께 들었던 것 같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주요 절기가 되면 교수님은 컴퓨터를 켜는 것, 이메일을 열어 확인하는 것 등 교수라면 출근한 후 당연히 해야 할 것들 조차 자유롭게 못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운전도 안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주요 절기에는 컴퓨터를 켜서 이메일을 읽어 드려야 했고, 가끔 운전도 해드렸다. 요즘 대한민국의 정서로는 '갑질'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내게는 매우 재미있는 '체험활동'이었다. 당연히 종종 강의도 대신해드렸다.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이런 유대인의 삶이 갑갑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 나름의 사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인지 사이먼스 교수님은 여러 불편함을 긍정적으로 감내하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절기를 아주 기쁘게 맞이하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유대인은 복잡한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대인들은 존경의 대상이자 롤 모델이면서도, 유대인들의 강한 구심력은 전통적인 백인 사회와 유대 사회 사이에 막힌 담을 만들어 놓았다. 자기 민족의 실리만 추구한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Black in - White out'만큼 'Jewish in - White out'도 미국 도시의 도시화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비유가 되었다. 다시 말해, 흑인이 도시에 모여들기 시작하면 백인이 나가듯이, 유대인이 마을에 모여들면 백인이 그 마을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막힌 담보다도 더한 혐오에 가깝다. 


유대인이 세금을 아끼는 방법


유대인의 강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적 구심력은 디아스포라(국가를 떠나 민족이 흩어짐)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에서건 작은 이스라엘의 건설이 가능하게 했다. 


교수님과 쓰기 시작한 책, "Retired, Rehabbed, Reborn: Rehabbing and reusing historic and public buildings"의 집필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교수님께서 밥이나 먹으러 오라며 나와 와이프를 초대하셨다. 유학생활이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을 때여서 정신적인 여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미국인 집 - 엄밀히 말하면 유대인의 집 - 에 초대받은 경험이 없는 와이프를 위해 바쁜 티 내지 않고 가겠노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 집은 클리블랜드 업타운에 위치한, 대표적인 부자 동네인 비치우드(Beachwood)란 작은 도시에 있었다. 비치우드에는 클리블랜드의 가장 큰 유대 마을이 있었다. 사실 나는 절기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교수님 라이드 하느라 적지 않게 교수님 집에 방문한 경험이 있어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미국의 전형적인 부자 동네를 방문해 보지 못한 와이프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교수님 집에 도착해 보니, 처음 보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계셨다. 교수님께서 두 할머니를 소개해주셨는데,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이름만 말씀해 주셔서 - 물론 두 분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 한다. -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이먼스 교수님 부부와 할머니 두 분, 그리고 우리 부부 등 총 여섯 명이 식탁에 앉았다. 유대 가정식을 기대했었지만, 메뉴는 터키였다.


사실 곧 있으면 미국의 추수감사 주간이 시작되었다. 교수님께서는 유대인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않지만, 또 터키를 먹지 않지만, 한국인인 우리 부부를 위해 미국 가정에서 하는 것처럼 준비하셨다고 하셨다. 매우 시크하고, 때론 무섭게 느껴져서, 미국인들조차 꺼리는 교수님인데,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유대 가정식이 아니면 어떠랴. 식탁에 따뜻함이 가득했다.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 두 분은 찻 잔을 들고 자기 집처럼 거실 소파에 몸을 묻으시고 담소를 즐기셨다. 사이먼스 교수님은 우리 가족에게 디저트를 권하시면서 잠시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교수님의 서재에 따라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교수님은 두 분의 할머니가 같이 식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유진, 두 할머니는 모두 과부란다. 이 마을에서 청년 때부터 정착해서 살다가 결혼까지 하신 분들인데, 비슷한 시기에 모두 남편을 잃으셨지."


혹여 소리가 서재 밖으로 나갈까 작은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우리 마을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기관에 보내지 않아. 여유가 있는 가정이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함께 지낸단다. 마치 가족처럼. 아니 같이 지낼 때 우리는 그냥 가족이지.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감동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불편하지 않을까?"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여쭈어봤더니, 교수님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셨단다. 너도 크리스천이니 많이 들었지?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덧붙이셨다. 


"유진, 지역 사회가 과부와 고아를 돌보면, 세금을 아낄 수 있어. 정부의 일이 줄거든. 지역이 함께 부양하니까. 우리는 서로를 아껴야 해. 그게 결국에는 국가를 사랑하는 일이고." 


감추어진 비밀, 전주 자만 벽화갤러리


전주 현지인도 잘 모르는 동네가 있다고 해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자만 벽화갤러리. 전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한옥마을의 공영 주차장 부근에 오목대가 있다. 오목대는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던 곳으로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르고 개선하던 길에 들러서 유명해진 곳이라 한다. 


오목대는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던 곳으로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르고 개선하던 길에 들러서 유명해진 곳이라 한다.

 

오목대로 올가가면 길을 건너는 육교가 하나 있는데, 그 육교를 건너면 바로 자만 벽화 갤러리에 들어설 수 있다. 육교에 서서 벽화마을의 전경을 찍어보고자 했는데, 뜻대로 잘 나오지는 않았다. 일단 잎이 모두 떨어지긴 했어도 나무로 상당 부분 가려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 위치한 많은 달동네가 그러하듯이 이곳도 6.25 전쟁 당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자만 벽화갤러리 즉 자만 벽화마을은 전쟁 이후 이 곳에 완전히 정착한 사람들과 아들, 딸 그리고 마을 공동체를 벽화로 살리기 위해 정착하기 시작한 예술인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육교에 서서 벽화마을의 전경을 찍어보고자 했는데, 뜻대로 잘 나오지는 않았다.


육교를 건너자마자 만난 카페. 카페 이름이 '놀다 가는 곳'이다. 허름한 달동네의 판잣집이 빈티지 카페로 새 삶을 살고 있다. 


허름한 달동네의 판잣집이 빈티지 카페로 새 삶을 살고 있다.


달동네 언덕, 벽화마을의 입구라 할 수 있다. 생각보다 경사가 꽤 큰 것은 느낌은 이제 내가 40 중반에 들어 선 탓 만은 아닐 거다. 달을 맞이하는 동네이니만큼 신발은 편한 것으로 신고 걸으면 참 좋은 길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가운데 난 길이 주 관람로라 할 수 있는데, 주 관람로 조차 매우 좁다. 이런 벽화마을을 걸을 때는 '매너'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소란스럽게 부산 떠는 내 바로 앞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진에서 보이는 가운데 난 길이 주 관람로라 할 수 있는데, 관람도 조차 매우 좁다.


이 벽화마을은 밝고, 유쾌하다.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은 색감을 통일하여 마을 전체의 동질성을 강조한 느낌이고, 태백의 상장동 벽화마을은 '광부'라는 하나의 주제로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면 전주 자만 벽화마을은 벽 하나하나를 마치 도화지처럼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 놓아서 관람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동질성을 잃었지만 생동감을 얻었다. 마을 전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  


까치와 씨티 헌터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할 거야?" 영심이의 동생은 벽화 속에서 조차 얄밉다. 그래서 우리 아들은 언제 공부할 것인가. 엄마의 잔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시간째 레고랑 씨름 중이다. 난 레고도 공부라며 스스로 위안 중이고.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할 거야?" 영심이의 동생은 벽화 속에서 조차 얄밉다.


마음 굳게 먹고 걸으면 30분 내외로 대강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들를만한 장소가 있다. 일단 좀 쉬어야겠기에 찾은 카페 '꼬지따뽕'. '달동네 감성카페'라는 부제가 넉넉히 어울리는 멋진 공간이다. 만약 내가 전주시민이라면, 여기는 틀림없이 나만의 힐링 카페가 되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전주시민이라면, '꼬지따뽕'은 틀림없이 나만의 힐링 카페가 되었을 것 같다.


꼬지따뽕의 실내. 외계인 친구가 반기고 있다. 밤에 보면 좀 무서울 것 같다. 입술이 빨갛다. 여기에 카운터와 음료가 준비되는 공간이 있는데, 사실 이 카페에서는 음료를 여기서 마시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가면 정말 더 훌륭한 힐링 스팟이 준비되어 있다. 


꼬지따뽕의 실내. 외계인 친구가 반기고 있다.


꼬지따뽕은 굳이 따지자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사진을 찍은 장소가 1층이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는 핑크색 건물이 2층일 터인데, 따뜻한 방이 준비되어 있다. 작은 규모의 세미나가 가능할 것이다. 외계인 친구가 반겨주던 공간이 바로 사진에서 녹색 파라솔이 펴져있는 곳이다. 3층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층은 실외다. 다양한 종류의 의자와 벤치가 있어서 누워서 자다가, 차 마시다가, 바람맞다가, 하늘 보다가, 또 자다가, 차 마시다가...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냥 쉴 수 있는 공간. 


핑크 건물 오른쪽으로 노란색 건물이 보이는데 예술인의 작업실로 보인다. 또 다른 벽화를 구상 중이리라. 꼬지따뽕에는 게스트 하우스도 있다. 상당히 깨끗하고 저렴해 보였다. 한옥마을까지 구경할 수 있으므로 특색 있는 숙소를 원한다면 도전해볼 만하다. 사실 꼬지따뽕 외에도 이 벽화마을 안에는 적지 않은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꼬지따뽕은 굳이 따지자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실외로 1층에 해당한다. 지하라고 해야 하나? 암튼. 


나오는 길에 사장님에게 꼬지따뽕의 의미를 물었다. "꼬지따는 후졌다의 사투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꼬졌다란 의미. 따뽕은 따봉에서 따왔습니다. 그러니까 '후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란 의미입니다."


최고를 지향하지 않아서 멋진 곳이다. 최고는 아니어도 꼬졌어도, 누군가에게만 최고의 공간이면 족하지 않는가. 


카페를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면, 다양한 캐릭터 벽화가 나를 반긴다. 동화 속 세계, 영화 속 세계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벽화를 몇 점 더 감상하자. 유쾌함이 마음과 입가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레옹이다. 세대가 지났어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영화이다. 마틸다는 정말 남자로서 레옹을 사랑했을까? 진짜 궁금하다. 
도라에몽도 있다. 
존 레넌 아니신가. 요코가 등장하는 센스가 돋보인다. 
후기


자만 벽화마을에는 단순히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 벽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사진에 담긴 작품은 우리 세대 청년의 절망 속 희망을 그려낸 작품으로 ROSA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로사가 직접 쓴 작품 설명을 옮겨 본다. 


"우리 청춘들이 마주하게 될 더 이상 절망적일 수도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 그렇기에 자유로울 수도 있는 오늘, 여름날 태양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오월에 햇살처럼 따스하고 찬란한 내일을 위해 청춘이므로 청춘이니까 해보자는 메시지를 물감에 녹여내다." 


더 이상 절망적일 수도 없는,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청춘들이 이 마을에 '예술' 하나 붙들고 찾아왔을 것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자유롭단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 자유함에 열정이 더해지니 내일은 찬란할 것임에 틀림 없다. 


달동네라는 대한민국 사회의 매우 독특한 장소. 서민의 고단한 삶과 아픔, 애환이 있는 그런 장소에서 주민과 청춘 예술인은 서로를 보듬어 이렇게 마을을 완성해 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래서 위대하다.  


다음 사진에 담긴 작품은 우리 세대 청년의 절망 속 희망을 그려낸 작품으로 보인다. ROSA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자만 벽화마을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벽화가 예뻐서만은 아니다. 여기는 흔하디 흔한, 대한민국에 100개쯤 되는 그런 벽화마을이 아니다. 주민의 삶과 청춘의 삶이 서로 아껴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면 마을이 살아나고 도시가 살아난다. 


유대인에 대한 미국 백인 사회의 혐오는 사실 질투이다. 없을지도 모를 신이 명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부와 고아를 우리가 붙잡아 지탱한다는 유대 정신에 대한 질투이다. 자기들은 남을 짓눌러 올라서기 바쁜데 유대인들은 항상 남을 챙기면서도 경쟁에서 항상 이기니. 그 구심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여 결국은 증오가 되어 버린 아이러니. 


도시는 탐욕 덩어리이다. 넘치는 것은 경쟁이고 서로에 대한 견제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가 내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그런 우리의 일상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 도시는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마을과 도시를 살리는 길은 결국 공동체의 회복 외에는 답이 별로 없다. 자만 벽화마을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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