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진 Mar 22. 2019

도시, 살다 17화 - 전주 팔복예술공장

추억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다.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초등학교 입학 직전 잠시 동안의 둔촌동 생활을 마치고 다시 흑석동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흑석 성당 앞 단독 주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흔한 주거형태가 아니었다. 특히 흑석동은 명수대 아파트라는 아주 아주 오래된 아파트 하나 외에는 당시 별다른 아파트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살던 집은 주거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었다. 상가 2층에 위치한 아담한 규모의 교회를 개척하신 아빠는 50평도 채 되지 않았던 공간에 늘어나는 성도를 감당 못하셨고, 이를 위해 새로운 교회 공간이 필요하셨다. 그런데 새롭게 등록하는 신자는 인근에 위치한 대학 때문인지 대부분 대학생이었고, 그런 이유로 새 교회를 성도들의 헌금으로 짓기에는 당장 불가능했다. 이에 아빠는 은행의 협조(?)를 받아 주택을 구입하셨고 - 은행 대출은 내가 대학에 진학할 때 즈음에나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다. - 그 집을 교회의 소소한 모임이 진행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구입 목적이 그렇다 보니 내 방은 사실 내 방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집이 헐릴 때까지 주말에는 대학생 형과 누나들을 위해 방을 내주어야 했다. 마치 우리 집은 동네 커뮤니티 센터와 같았다. 인근 대학교의 형, 누나들부터 동네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참 자주도 우리 집을 드나드셨다. 그때마다 엄마와 할머니는 음식을 대접하기 바쁘셨고, 내 방은 영락없이 성경 공부 방이나 담소를 위한 사랑방으로 전락해 버렸다. 당연히 난 갈 곳이 없었고.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게 아주 진하게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했는데, 당연히 내 방이 그렇게 개방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래도 목사 아들은 늘 착해야 했으므로 참으려 노력했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리 집에는 아주 작은 규모의 마당이 있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문 바로 앞에 라일락 나무가 심겨 있었다. 누가 특별히 가꾸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철마다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그 꽃 향의 느낌은 내 기억이 아닌 마음에 남아 있다. 라일락 향은 우리 집 대문 밖으로까지 퍼져 동네 주민들이 발걸음을 멈춰 서서 꽃 향기를 맡고 갈 정도로 황홀했다.


난 그 나무가 너무 좋았고, 초등학교 시절 등하교 길에 인사해 주던 라일락 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동무였다.


아빠의 빅픽쳐와 라일락 나무



새로운 집에서 생활한 지 수년이 흘러 난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2학년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빠가 우리 가족을 불러 모으셨다. 가족이래 봤자 엄마와 나 할머니가 전부였지만. 아빠가 개척하신 교회에 성도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이제 교회를 새로 지어야 할 것 같다고 하시면서 우리 집을 헐고 이 집 위에다가 5층짜리 교회 건물을 올리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나에게 떠오른 생각은 지금 내 기억엔 없다. 그 정도로 그냥 담담했던 것 같고, 어쩌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명을 대충 감으로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이 집을 무리해서 구입하신 것 자체가 아빠의 빅픽쳐였으니, 이 집을 사시려고 할 때부터 이 집 위에 교회를 짓고자 하셨던 것 같다.


집이 허물어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우리 가족은 흑석동 다른 지역에 월세를 구해 이사했다. 교회가 다 지어지면 우리 가족은 교회의 5층에 거주할 터였지만 당장 건축될 동안에 가족이 살 곳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이 잠시 이사한 새로운 곳에서 내가 다니던 중학교로 등교하려면, 라일락 나무가 심겨 있던 그 집 - 이제 곧 교회가 될 - 을 지나야 했다.


등교하던 어느 날. 집이 헐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무덤덤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건물이 헐리면서 동시에 라일락 나무가 뽑히자 난 펑펑 울었다. 그 감정은 아마도 '미안함'이었던 것 같다. 내 동무였던 라일락의 살 길을 내가 마련해 주지 못한 미안함. 우리 집을 상징하던 라일락 나무가 뽑히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사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 느낌. 슬픈 느낌. 우리 집의 상징이 없어지자 상실감이 밀려온 탓이다.


지금 아빠와 엄마는 그때 그 교회에서는 은퇴하시고 새로운 일을 하신다. 나는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고 독립하여 가정을 꾸렸다. 삶의 바쁨에 치여 자주 뵙지 못하는 것은 대한민국 40대의 평범한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이 남양주 어느 이름 모를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신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집 마당에 라일락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라일락을 심어 놓으면 당신의 아들이 자주 들를 것이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전주 팔복예술공장


추억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렇게 아프다. 특히 스스로 원해서 잊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잃게 될 때는 더욱더. 사람에게 추억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다. 내 라일락 나무가 그런 것처럼. 비록 지금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일 지라도 누군가에게 그 공간이 추억이라면, 우리는 헐어 버리는 것보다 보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도시재생은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 추억 속 공간이 보존되면, 기억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감사함과 기쁨이 넘친다.


전주 팔복동에 위치한 팔복예술공장은 카세트 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팔복동은 전주시 근대 산업의 활황을 이끌 던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팔복동에는 공단이 들어섰고 물자를 나르기 위해 철길이 놓였다. 가족 부양의 부담감을 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가족 부양의 부담감을 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팔복동의 카세트 테이프 공장. 팔복예술공장의 A동의 전경이다.

 

이 공장은 쏘렉스 공장이다. 쏘렉스 공장은 1979년에 설립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 카세트 테이프를 생산하여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수출했다고 한다. 워크맨으로 불리던 소니(SONY)나 파나소닉(Panasonic) 등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매우 인기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공장의 가동 기간은 15년을 채 넘지 않을 만큼 짧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음악의 저장 방식이 카세트 테이프에서 CD로 발전하여 더 이상 공장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장이 문을 닫은 후 25년 간 활용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2016년부터 유휴 공간 재활용에 대한 논의가 전주시와 예술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공장은 외관이 최대한 보존된 상태에서 내부 리모델링 과정을 거친 후 2017년 말 입주 작가 모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화플랫폼으로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팔복예술공장은 두 개의 동(A동과 B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B동은 개관 준비를 위한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따라서 난 A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A동은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람객들에게 옥상 역시 개방되어 있다.  


A동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편에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써니'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어서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았다. 안성에서 전주로 쉬지 않고 달려온 난 우선 써니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써니는 상당히 넓었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는 '그림책방'으로 네이밍 된 책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위치하고 있었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풍족했다.


A동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편에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써니'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30분 정도 쉼의 시간을 가진 후, 먼저 건물의 외관을 둘러보았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자 출입문 위에 '팔복예술공장' 표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팔복예술공장'의 공간 계획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쪽 벽면에 층별 안내가 써져 있었다. 1층은 주로 작업실임을 알 수 있었고, 2층은 전시실과 교육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3층으로 표시된 곳은 사실 옥상이다.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팔복예술공장'의 공간 배치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쪽 벽면에 써져 있었다.


중앙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A라는 글씨가 크게 부착되어 있는 건물이 매우 빈티지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곳이 바로 A동이라는 표시로 보이는데 이 건물이 카페 '써니'이다. 써니의 외벽은 팔복예술공장의 광고판으로도 사용 중으로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카페 '써니'이다.


A동에서 아직 개관이 되지 않은 B동을 잇는 것은 컨테이너들이었다. 빨강과 검정이 대비를 이루어 상당히 흥미로웠다. 다음의 사진에서 우측이서 중앙까지 이어진 검정 컨테이너(컨테이너 2)에는 '팔복 스케치북'이 위치하고 있다. 팔복 스케치북은 벽과 바닥에 글라스펜, 백물펜, 수성펜 등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다. 그 뒤쪽(사진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또 다른 검정 컨테이너(컨테이너 1)에는 '만화책방'이 위치하고 있다. 추억의 만화를 보며 잠시 옛 추억에 빠져들 수 있다.


A동에서 아직 개관이 되지 않은 B동을 잇는 것은 컨테이너 박스들이었다.


이들 컨테이너가 이어져있는 곳이 바로 아래 사진의 B동이다. B동의 리모델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올 상반기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의 팬스 너머로  A동을 잇는 빨강 컨테이너가 살짝 보인다.


B동의 리모델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올 상반기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오르면 전시 공간이 있다. 전시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철저히 금지되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사진은 남기지 못했지만, 2층에 들어서자마자 레지던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2층을 천천히 돌면서 레지던시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아무 부담 없이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하고 보니,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작품에 대한 사진은 남기지 못했지만 2층에 들어서자마자 레지던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2층의 관람을 뒤로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보자. 탁 틔여 있는 옥상에서 파란 하늘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ARTBOX"가 그려져 있는 검정 컨테이너였다. 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면 붕 떠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마 같이 간 사람이 있으면 인생 사진이 나올 법한 포인트이니 잊지 말자.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옥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ARTBOX"가 써져 있는 검정 컨테이너였다. 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면 붕 떠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다음 사진은 옥상의 공간을 꾸미고 있는 작품(?)이다. 쓰임새를 알 수는 없었는데 R1, R2, R3 등의 표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레지던시 작가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옥상에서는 인근 지역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전형적인 공단의 모습이다. 폐선 부지가 된 철길도 있고.


R1, R2, R3 등의 표식이 있는 작품(?)이 옥상을 꾸미고 있었다.


옥상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계단이 1층까지 이어져있는데 내려가는 벽면마다 낙서인지 예술인지 헷갈려서 오히려 더욱 예술로 보이는 그림과 글귀들이 그려져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가는 벽면마다 낙서인지 예술인지 헷갈려서 더욱 예술로 보이는 그림과 글귀들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2층에는 문이 없는 화장실이 인상적이었다. 당시에는 사용했겠지만 물론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아니다. 순간 제주시의 아라리오 뮤지엄을 다시 찾은 느낌도 들었다. 화장실 변기마다 카세트 테이프가 버려진 상태로 있었다. 뭐라 딱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이런 공간을 만든 이유가 마음으로 읽혔다. 카세트 테이프 산업이 막을 내리자 이 화장실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2층에는 문이 없는 화장실이 있었다. 물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아니다.


그리고 화장실 벽 한 면을 메우고 있는 빨간 글씨.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 데 간데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론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짙은 고독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 벽면을 장식하여 작품으로 재탄생 시킨 예술가는 팔복예술공장의 공간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 같다.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이 곳으로 몰려온 사람들. 그들은 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 고향에 두고온 가족 생각에 차마 돌아갈 수 없었겠지. 여기서 어떻게든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보고자 했을 것이다.


이 벽면을 장식한 작품을 만든 이는 팔복예술공장의 공간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예술가일 것이다.


후기


이 공간은 도시, 살다 - 제11화에서 소개한 바 있는 대구예술발전소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두 곳 모두 공장이었으며 지금은 문화플랫폼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공간이다. 레지던시 작가들이 공간에 매력을 더하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다만, 대구예술발전소의 위치에 비해 팔복예술공장은 공장들 밀집 지역 한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이런 보존이 더욱 의미 있을지 모른다.


여전히 공장의 삶을 살고 있는 건물이 많은데 이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 그 한복판에 위치한 카세트 테이프 공장의 변신은 가까운 미래 이 지역의 화려한 비상을 미리 보여주는 단면일 수 있다. 대한민국 대표 한옥 마을이 위치한 전주시는 우리 모두의 인식 속에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주시의 미래 비전도 '문화'와 '예술'이라는 키워드와 함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세트 테이프 공장이 문화플랫폼으로 재탄생한 '팔복예술공장'은 전주시의 대표적인 어메니티, 랜드마크로 곧 날아오를 터이다.


여전히 공장으로 삶을 살고 있는 건물이 많은데 이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


교회로 변했다가 이제는 아파트로 덮여버린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이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던 이유는 라일락 나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그 향을 좋아했고, 그 향때문에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 나무가 뽑힐 때 난 중 2병을 앓고 있던 철부지였을 뿐이지만, 삶의 일부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에 힘들었다. 누군가는 분명 이 공간, 팔복예술공장을 보며 삶의 소중한 추억이 지켜졌음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을지 모른다. 절망뿐인 것 같은 쇠퇴하는 도시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채워가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이전 07화 도시, 살다 16화 - 제주 명월국민학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