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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Jan 22. 2019

도시, 살다 15화 - 부산 달맞이길 & 문탠로드

가장 살고 싶은 곳

너 부자구나?!


미국 전역의 망한 교회와 폐교에 관한 책을 사이먼스 교수님과 집필하는 동안에도, 교수님과 둘 만의 연구를 위한 회의가 사이사이에 진행되었다. 사이먼스 교수님은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면 직접적으로 연구의 목적을 말씀하시기보다 그냥 농담처럼 이런저런 변죽을 울리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시는 스타일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돌고 돌아 빙 둘러 대화해야 교수님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루는 이렇게 물으셨다. "유진, 한국에서 어디에 살았니?"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난 이렇게 팩트만 전달했다. "전 아파트(apartment)에 살았어요. 한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주거 형태죠."


그러자 사이먼스 교수님은 무척이나 궁금하시다는 듯 "월세(rent)는 얼마나 냈어?"라고 질문을 이어가셨다.


유학 가기 전 결혼한 나는 경기도 안성에 아직 길도 닦이지 않은 채 지어진 정말 조그마한 평수의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아 신혼살림을 차렸었다.


따라서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파트, 제 꺼였어요." 월세를 내지 않았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대출이 끼어 있었지만, 내 명의의 아파트는 맞았으니.


이에 사이먼스 교수님은 엄청 놀라시며, "놀리지 마, 설마."라며 똑바로 이야기하라는 투로 눈을 흘기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제거 맞아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수님은 연구실 밖 조교들까지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너 부자구나?!"


내가 가장 살고 싶은 곳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울 강남이나 성남 분당 정도에 대형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부자 소리 들을 텐데. 하지만 내 의문은 곧 풀렸다. 미국에서 아파트(apartment)는 다세대 임대주택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나의 주장은 미국의 아파트에 대한 정의를 고려할 때, 말 자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파트는 임대밖에 못하는 주거 형태니까.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듣기에 따라선 아파트 단지를 소유하여 임대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임대업자가 아닌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다세대 주택은 우리가 흔히 콘도라고 부르는 콘도미니엄(condominium)이라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이먼스 교수님이 내 대답의 의도를 모르신 것은 아니다. 가르침 반, 놀림 반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너 부자구나?!"였다.


망한 교회와 폐교를 제외하고 교수님과 함께 진행한 우리의 첫 연구 주제는 '어떤 요인이 미국 사람들의 주거지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설문조사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주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우리의 회의, 아니 대화는 계속되었다.


"유진, 네가 주택(콘도미니엄)을 사기 위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크게 고려한 요인이 뭐니?"


난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겼다기보다는 유학 전 내 생황을 어떻게 영어로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크게 보면 수도권으로 묶이지만,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고 있는 도농복합 도시 안성의 저개발 지역에 몇 동 겨우 건설된 아파트. 당시 난 말이 좋아 유학 준비생이지 그냥 백수였고, 아내만 일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안성 여자였고 안성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신혼집은 안성에 구해야 했다. 백수의 의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씀드렸다. "싸서요."


매우 시크했을, 어떻게 보면 버릇이 없었을 내 대답을 들으신 사이먼스 교수님은 이해한다고 하시면서 가정법을 동원해 다시 물으셨다. "유진, 만약 너에게 충분한 돈이 있다면, 네가 가장 살고 싶은 곳은 어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진짜 생각에 잠긴 것이다. 어디가 좋을까. 쇼핑몰 앞에 있는 아파트면 좋을까, 커다란 영화관 옆에 있는 아파트면 좋을까, 차라리 산속에 예쁜 하얀 집을 지어 놓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는 것이 좋을까, 미국 식 타운하우스가 좋지 않을까, 등등.  


쉽게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사이먼스 교수님께서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셨다. "난 산책할 수 있는 동네에 사는 것이 꿈이었어. 나 뉴요커였잖아."


달맞이길과의 만남

 

어떤 동네 어떤 집에 살고 싶은 지는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당연히 나 역시 서울의 삶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서울 촌놈'이었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에겐 우리 동네 '흑석동'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별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는 시끌벅적한 동네의 화려함에 끌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유치원을 막 졸업하려는 아이의 아빠가 되어 보니, 안전한 동네에 마음이 간다. 킥보드 타고 여기저기 달리길 좋아하는 아이가 안전하게 이 시기를 넘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난 어느 정도 서울의 삶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안성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 얼마나 편안한 동네면 이름조차 편안할 '안'자를 써서 안성이겠는가. 안전한 성읍, 안성.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도 당시의 사이먼스 교수님 나이가 되면 아마도 난 산책하기 좋은 경치가 끝내주는 강가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 아들 유주는 내 곁에 없을 테니.


부산의 달맞이길과 문탠로드는 정말 우연히 만났다. "알게 되었다"는 표현보다 "우연히 만났다"는 표현이 훨씬 알맞다. 이름조차 생경한 가성비가 좋을 것 같은 느낌의 호텔을 예약한 적이 있었는데, 이 호텔이 바로 달맞이길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후 서너 차례 부산 방문을 더 해야만 했는데 그때마다 난 달맞이길의 이 호텔을 이용했다. 호텔 여행의 필수인 조식이 없는 호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맞이길과 문탠로드 산책은 꿈에서 나올 만큼 매혹적인 것이었다.  


다음 그림은 달맞이길의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의 모습이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된다. 힘닿는 곳까지.


달맞이길의 초입이다. 초입에 주차장이 있다.


달맞이길과 문탠로드


달맞이길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 있다. 걸어 올라가면 도로 오른쪽으로 나무로 된 인도와 난간이 있고, 왼쪽으로는 호텔, 식당, 갤러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달맞이길을 따라 위치한 상점은 경리단길이나 망리단길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소규모 상점은 아니다. 제법 규모가 크며 적지 않게 프랜차이즈도 보인다. 이 점은 매우 아쉽지만 이 길을 걷는 목적이 꼭 소비에 있는 것은 아니므로 예쁘게 지어진 건물을 자연과 함께 감상하며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속도를 내지 말고 천천히 좌우 앞뒤를 감상하며 걸어보자.


달맞이길의 도로 오른쪽 산책로에서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엔트리 레벨의 DSLR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달맞이길을 걷는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이런 뷰(view)일 것이다.


달맞이길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맞이길 난간 너머로 또 다른 '사람 사는 곳'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르게 펼쳐진 바다 앞에서 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앞의 바다는 황금 어장일 텐데, 해운대 해수욕장 앞으로 내려가면 적지 않은 장사거리가 있을 텐데, 달맞이길 위의 개발에 기댄 상점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밭을 일구기로 한 우직한 결정이 경이롭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달맞이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드디어 문탠로드로 내려가는 입구를 만날 수 있다. 뷰 좋은 도시를 걷다가 갑자기 등산하는 느낌으로 바뀐다. 달맞이길은 문탠로드(Moontan Road)가 2008년에 더해지면서 함께 유명해졌다고 한다. 문탠로드의 명성이 달맞이길을 리드한 것이다. 문탠은 선탠(Suntan)에서 착안한 말로, 달빛을 받으며 걷는 길이란 뜻.


문탠로드 입구에 세워져 있는 소개 글을 읽어보자니 밤에도 한번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그 기회는 갖지 못했다. 어쩌면 이 로드의 진가는 밤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문탠로드는 총 2.2km 길이의 둘레길이다.


문탠로드를 걷는 길은 평화롭다. 바람이 간지럽히고 새소리가 들리며, 바다 냄새는 나무 냄새 그리고 흙냄새와 섞여 조화롭다. 아무 생각 없이 바람, 새, 바다, 나무 그리고 흙의 조화를 느끼며 걸을 수 있다.


문탠로드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문탠로드에는 해안절경 전망지가 있어서 해운대 해수욕장의 해안선과 광안대교의 야경,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잠시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관광객의 휴대폰 찰칵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두었다.


절경지에 있는 휴대폰 거지채가 인상적이다. 이 거치대에 휴대폰을 기대 놓고 사진을 찍으면 가장 잘 나온다고 한다. 실제 내가 이 곳을 머무르는 동안 네 커플이 이 거치대에 휴대폰을 기대 놓고 사진을 찍었다. 실제로는 셀카봉을 기대 놓고 찍는다.


휴대폰 거치대는 정말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이 곳을 젊은이들이 찾는 장소로 바꾼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해안을 따라 걸어 보았다.


모든 뷰가 아름답다.


문탠로드 중간에 청사포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청사포 구경도 좋겠다 싶어 잠깐 길을 셌다. 문탠로드를 벗어서 청사포를 가는 길에는 오래된 철로, 지금은 쓰지 않는 듯한 철로가 놓여 있었다. 이는 동해남부선의 폐선이다. 폐선 옆에 새로운 구조물이 건설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관광목적으로 사용될 것 같다. 사진에서 이 길을 따라 위쪽으로 쭉 걸어가면 청사포로 갈 수 있다.


새로운 레일로드에 어떤 기차가 다니게 될까.


달맞이길 걷기를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 드디어 만난 청사포. 청사포는 푸른 모래 포구를 뜻이다. 청사포는 빨간 옷과 흰 옷을 입은 쌍둥이 등대가 지키고 있다. 이 두 등대와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청사포 표지석 뒤로 쌍둥이 등대가 서 있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흰 등대 쪽에 관광객이 훨씬 많기에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었다. 뒤에 펼쳐진 하늘과 먼 바다 위의 구름이 "마치 그림 같아!"라는 상투적 표현을 매우 자연스럽게 만들기까지 한다.


아름다운 뷰(view)는 그 자체로 매우 큰 기쁨을 준다.


이 곳은 어촌 마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낌 있는 상가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한국의 어촌 마을 하면 떠오르는 횟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곳은 흔하디 흔한 어촌 마을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전포동 카페거리가 그러했듯이 더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로 북적거릴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한옥라운지 '청사포역'. 정말 한옥을 개조했다.


이곳은 브런치 카페 'INDUS'이다. 마침 길을 걷고 또 걷느라 밥을 걸러서 이 카페에 앉아 주문을 했다. 분명 어촌인데 퀄리티는 강남이다.


어촌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가죽공방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걸어온 만큼 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뷰로 마음과 몸을 잠시 새롭게 하고 달맞이길 초입, 내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터덜 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눈 길을 사로잡은 작은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은 달맞이길과 청사포 어촌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마을 집집마다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떠나는 관광객의 마음을 달래려는 듯, 마지막까지 상쾌함을 선물하려는 듯, 여정의 맨 뒷 페이지에 담아 오기에 너무 좋은 그런 마을이었다.


그래서 사진을 안 남길 수 없었다.


우주인의 헬멧을 도로 반사경에 맞춘 작품이다. 마을 분들은 우주인으로 부르지 않고 바다에서 물질하는 남자인 머구리라고 부른단다.


예쁜 니모도 있다.


집의 창문이 마치 강아지가 쓴 선글라스 같다.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후기


걸을 수 있는 공간은 축복이다. 사이먼스 교수님과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의 형태와 위치를 연구하면서 늘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걸을 수 있는 곳이 옆에 있는지였다. 공원이 있는지, 등산로가 있는지, 강변이나 해변이 있는지.


번화하면 할수록 미국인에게 주거지로는 비토 된다.


반면 콜-드-색(사이먼스 교수님 발음에 의하면 컬-드-색)과 같은 곳이 선호된다. 콜-드-색(cul-de-sac)은 우리말로 '막다른 길' 정도 될 것이다.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 아니라 차량의 진입과 출입이 하나의 도로에서만 이루어지는 길을 말한다. 들어온 길로 나가야 한다. 콜-드-색은 교통의 흐름을 위한 곳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을 위한 곳이다. 길을 잘못 찾아온 차가 아니라면 콜-드-색에 진입하는 차는 모두 이 막다른 길에 사는 사람들 소유일 수밖에 없다. 왕래가 적으니 조용하고, 차량의 흐름이 뜸하니 안전하다.


아이들이 도로에서 놀아도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차량으로 인한 소음과 환경오염이 적으니 노인들의 건강에도 제격이다. 번화한 곳은 정 반대이다.


삶의 가치관이 변하면 바람, 새, 바다, 나무 그리고 흙이 콘크리트 건물보다 좋아질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번화함으로 둘째가라면 정말 서러울 부산의 해운대를 찾을 때마다 난 달맞이길과 문탠로드를 찾는다. 번잡함 속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므로.


결국엔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자연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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