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초등학교가 아닌 명월국민학교인 이유
집으로 가는 길
이미 기록한 대로 난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했다. 여기에 졸업하지 못했다고 쓰는 이유는 사실 아주 잠시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서울의 흑석동에 정착한 후 잠시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7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둔촌동으로 이사한 후 아침마다 유치원에 맡겨지 듯 떠밀려 출근 도장을 찍고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두세 달 정도. 워낙 짧게 다녔으므로 부모님은 기억을 못 하신다. 아들을 잠시 유치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는 것을.
유치원을 졸업하기 전 우리 집은 흑석동으로 돌아왔다. 아주 짧은 둔촌동 생활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흑석동의 다른 집으로 이사 가기 전 계약 기간이 잘 맞지 않아 잠시 머무른 것 아닌가 추측한다.
흑석동으로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난 명수대 국민학교(현 서울 흑석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명수대 국민학교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지금 다음 지도를 통하여 확인해보니 거리는 약 7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언덕도 좀 오르내려야 하고 특히 등교를 위해서는 육교를 이용해 큰 도로를 건너야 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내내 건넜던 이 육교는 지금 철거되고 없다. 지금은 9호선 흑석역이 생겨 지하를 통하여 길을 건널 수 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육교를 올라 왕복 6차로의 현충로를 건너야 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 하나. 초등학교 3-4학년 즈음 육교 위에는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가 병아리 열댓 마리 정도를 팔고 계셨다. 병아리 구매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병아리들이 구입하는 족족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 버려도 사고 또 사고했었던 기억이 있다.
육교를 건너면 지금은 '중앙대병원입구'로 불리는 길로 들어서야 했다. 당시에는 중앙대학교 대학병원이 흑석동에 지어지기 전이었다. 대신 그 자리에 중앙대학교 부속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난 중학교는 중대부중을 다니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는 중대부고를 다녀 매우 익숙한 길이었다. '중앙대병원입구'에는 흑석 빗물 펌프장이 있다. 이 펌프장을 끼고 400미터 정도 쭉 걸으면 흑석 성당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새롭게 이사 간 우리 집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집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초등학교 5-6학년 즈음 집으로 가는 길에 늘 들렀던 곳은 흑석 성당 앞에 줄 지어 있었던 포장마차였다. 100원어치 정도만 시켜도 간식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는데 무한정 마실 수 있었던 오뎅 국물의 맛은 아직도 있지 못한다. 나름 맛있게 만든다며 오뎅 국물에 떡볶이 양념과 오뎅을 찍어 먹던 간장을 섞어 오뎅 국물을 마셨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과연 사람이 먹어도 되는 것을 먹었나 싶지만, 추억이 된 그 맛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100원어치 떡볶이로 배를 좀 달래면 이젠 전자오락을 할 시간이었다. 포장마차 바로 앞에는 문방구가 하나 있었다. 문방구 앞에는 전자오락 게임기가 두 대 놓여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엔 이 문방구 앞의 전자오락 게임을 즐겼다. 게임의 종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전자오락의 레전드인 '겔로그'와 '너구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이 문방구 근처에 있었던 '오락실' 출입이 잦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에는 버블버블, 중학교 시절엔 원더보이 시리즈(특히 난 원더보이 2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땐 스트리트 파이트와 함께 했다. 실내 금연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였으므로 집에 도착한 난 학창 시절 내내 내 머리카락과 옷에 밴 담배 냄새를 없애느라 애를 썼다.
지금 흑석동에는 병아리 파는 아저씨도, 포장마차 아주머니도, 문방구 삼촌도, 오락실 주인아저씨도 없다. 추억의 애잔한 눈빛만이 새롭게 건설된 아파트 사이를 헤맬 뿐이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이유
학교 안에는 동상이 여럿 있었다. 이순신 상과 이승복 어린이 상, 단군 상 등 세 가지 동상은 형체는 기억에 없어도 확실히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최근 초등학교에는 이런 상이 없는 것 같은데 학교마다 전해지는 괴담 혹은 전설의 중요한 주인공으로서 이들 동상은 나름 존재 가치가 있었다.
지금 보면 크지 않은 운동장이지만 당시 어린 나에게 학교 운동장은 적지 않은 규모였다. 온갖 놀이가 가능했는데 운동장 놀이의 대명사인 '오징어찜', '얼음땡', '말뚝박이' 등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 '오징어찜'은 거의 전쟁과도 같았다. 무릎 까지고 다리 삐기 일쑤.
1990년대 중반 즈음, 아마 대학생이 된 후가 아닐까 싶다. 국민학교의 공식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접했다. 일제의 잔재를 없앴다는 명목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미들 스쿨을 중학교, 하이 스쿨을 고등학교라고 했으면 당연히 엘레멘트리 스쿨은 처음이란 의미의 한자를 사용하여 '초등학교'였어야 했는데,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으니.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일본 때문이라는 것을 이름 바꾼다고 할 때 처음 알았다. 바꾼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에서 바뀐 후 한 동안은 나뿐만 아니라 내 주의의 거의 모든 사람이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번갈아 가면서 썼다. 이후 어느 순간부터 습관적으로 '국민학교'라고 하면 주위 사람이 "초등학교지!"라고 바로 잡아주거나, 나 스스로 바로 잡았던 것 같다. 지금은 팔순을 넘기신 우리 아빠와 엄마도 '초등학교'라고 하신다.
그래도 왠지 내가 나온 학교는 명수대 국민학교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서울흑석초등학교는 내가 나온 학교 같지 않다. 서울흑석초등학교에서 나를 동문으로 생각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부르는 이름이 바뀌었어도 내 추억의 시선은 '국민학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비게이션에도 없었던 명월국민학교
이번 제주도 여행 계획은 온전히 아내가 다 세웠다. 아내는 내가 예전 것을 보존한 상태에서 새로운 환경과 수요에 적응하여 새롭게 탄생한 '그 어떤 것' 관한 글을 쓰는 것을 알기에 명월국민학교 방문 일정을 잡았다. 굳이 제주도에서 새로운 곳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난 시큰둥했었다. 이미 14곳의 방문기 집필이 끝난 지금 14곳 중 세 곳(프롬더럭/아라리오 뮤지엄/앤트러사이트 한림)이 제주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많다 싶었다.
더욱이 숙소에서 얼마 정도 걸리나 싶어 렌터카 회사에서 제공한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검색을 해보았는데 검색이 되지 않았다. '명월'을 찍으니 제주도 명월리에 위치한 다양한 장소가 가나다 순으로 나열되었는데 명월국민학교는 나오지 않았다. 명월초등학교로 해야 하나 싶어 다시 검색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방문을 하지 말자고 했는데, 제주공항에서 청주공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렌터카를 반납하러 가던 중 일정 하나가 급히 변경되어 아이폰의 내비게이션 어플을 활용해 검색해보니 '명월국민학교'가 검색되었다. 렌터카 제공 내비게이션의 업데이트가 별로였던 모양이었다.
명월국민학교의 방문은 명수대 초등학교 시절,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특별했던 내 추억을 강제로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이 곳은 너무 멋진 장소이다. 문을 닫은 학교 부지에 카페와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정문을 지나면 긴 칼 옆에 찬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과 함께 초등학교를 지키고 있다. 나라를 지킨 영웅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명수대 국민학교의 이순신 상의 모습은 아쉽게도 기억에 없다. 아마 이 상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상 오른편으로 학교 건물이 보이며 뒤로는 운동장이 보인다. 하늘에 두 마리의 새, 아니 연이 보인다.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그렇게 놀고 있었다.
차량은 운동장에 출입금지이다. 대신 운동장 앞에 적지 않은 공간이 주차장으로 할애되어 있다. 주차한 차 앞에서 보이는 학교와 운동장 전경이다. 운동장에 차는 출입을 금했어도 사람은 맘껏 뛰어놀 수 있다.
중앙 출입문은 조금 진한 듯한 하늘색으로 칠해져서 모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문을 중심으로 왼편에 카페가 위치하고 있고 오른편은 아직 개관하지 않은 '명월리 백난아 기념관'이 준비 중인 듯했다. 가수 백난아는 한림읍 명월리가 고향이라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로 단장 중인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는 우리가 알던 세상의 모든 국민학교의 모습 그대로였다. 중앙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만 출입이 가능하고 아직 백난아 기념관은 출입이 불가한데 이 왼쪽에는 총 세 개의 교실이 있었으며, 바닥과 창문틀은 나무 재질로 보존되어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우리는 이 나무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모두 실내화를 신고 다녔으며 주기적으로 왁스로 청소했었다. 물청소는 나무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세 개의 교실은 각각 '커피반', '소품반', '갤러리반'으로 이름이 붙어 있었다. 당연히 커피반은 카페였고 소품반은 작은 선물 가게, 갤러리반은 그림 전시실이었다.
커피반 내부 모습이다. 교실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카페가 살포시 앉은 느낌이다. 커피를 만드는 곳과 카운터 쪽에는 칠판이 있어 매우 이채로웠다. 물론 명월국민학교 시절에 쓰인 칠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공간을 생각할 때, 이 인테리어는 이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여기는 소품반의 내부이다. 명월국민학교는 브랜드 구축에도 신경 쓰고 있었다. 구입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학용품과 소품에 명월초등학교라고 새겨져 있었다. 에코백과 각종 노트는 질 또한 훌륭해 보였다.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다시 삶을 얻은 폐교의 미래를 위해 선물 구입으로 힘을 실어 주는 것도 좋아 보인다.
갤러리반에는 많지는 않지만 따뜻함을 품고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갤러리반에는 명월국민학교 전경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다. 사진을 찍는 포인트이므로 인생 사진을 한 번 찍어 보자. 명월국민학교의 본 건물은 나무들로 감싸여 있다. 그리고 뒷 배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이 자체가 작품이다. 의자와 책상에 앉으면 그 누구든 영락 없는 명월국민학교 학생이 된다.
커피반에서 커피 한잔하고 소품반, 갤러리반을 모두 둘러본 후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하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복도 끝에 위치한 곳인데 우리 가족 외에도 이 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곳이다. 명월국민학교를 벗어나 빨리 공룡랜드로 빨리 가고 싶은, 아직 초등학교 추억이 뭔지 모를, 유치원 화석 아들 유주의 표정이 별로다. 브이하고 있는 손과 균형이 맞지 않는 표정이다.
운동장에서 뛰어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목이 마른 지. 학교는 학교다. 쉬는 시간에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다녔을 아이들이 수업 시작 종소리와 함께 이리로 달려왔을 것이다. 단 다섯 개의 수도꼭지가 귀엽다. 이 수도꼭지에 머리를 거꾸로 들이밀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을 것이다. 밥을 싸오지 못해 물로 배를 채웠을 아이도 있었겠지. 이 학교를 거쳐간 모든 학생들의 형편과 마음을 이 수도꼭지는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건물의 뒤편으로 이동해 보았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거나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었을 의자와 탁자 등이 보인다. 의자의 높이가 앙증맞을 정도로 낮다. 그리고 그곳에 앉으면 바다가 보인다. 사진에서 식별이 될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제주도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학교는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이 얼마나 심미적 가치를 높여주는 곳인지 여기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시골 동네를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뭍으로 간 졸업생들은 이 자리의 바다를 잊지 못할 것이다.
분수도 보존되어 있다. 여전히 분수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뒤편에 위치한 작은 건물은 운동 기구 등을 보관했던 곳으로 보인다. 고래 벽화는 작은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장작이 쌓여 있는 작은 건물이 보인다. 국민학교 시절 주번의 매우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교실 전체의 보온을 위해서 30분 일찍 등교하여 탄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 중 하나. 아마 그 탄을 장작과 함께 보관하던 장소가 아닐까 한다.
후기
갤러리반에 들어서면 그림 작품뿐만 아니라 중앙에 보면대 하나가 보인다. 이 보면대에 놓여 있는 '학교 인사'. 명월국민학교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폐교는 1993년에 되었다고 한다. 1993년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불리기 전이다. 명월초등학교가 아닌 명월국민학교로 이름이 남게 된 이유가 아닐까. 1996년 이후에 문을 닫았다면 아마도 명월초등학교로 내비게이션 어플에 담겨 있을 것이다.
맨 마지막 문장이 두 문장이 울컥하게 한다. "명월국민학교의 운동장에서 들리는 바람소리, 새소리, 나무소리를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 가셨으면 합니다. 다녀 가시는 모든 분들이 따뜻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명월국민학교 올림-"
바람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듣기 힘든 도시민을 위한 명월국민학교의 가슴 깊은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었다. 특히 '명월국민학교 올림'으로 글을 맺고 있는 것도 따뜻했다. 개발자나 대표가 아닌 추억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따뜻한 날, 행복한 날을 이 곳에서 만끽했으면 좋겠다.
이 곳에 오면 떠올리기 싫어도 국민학교 또는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소환된다. 이 추억은 곧 아련함과 따뜻함으로 바뀌고. 이 것이 바로 '보존(preservation)'의 묘미다. 새로 짓는 것 대신 보존하면 추억도 그 공간 속에 갇혀 버린다. 당연히 그 공간을 찾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
아무리 떠들지 말란 글귀와 뛰지 말란 글귀가 우리에게 경고를 날려도 우린 그 시절 건강하게 떠들고 뛰어다녔다. 아직 삭막함과 공허함이 도시를 잡아먹기 전 우리는 그랬다. 공간으로서 국민학교는 우리 마음의 인격이 형성되고 몸의 건강함이 자라나던 곳이다. 그래서 보존의 가치는 빛에 빛을 더한다. 제주 한림을 지난다면 꼭 명월리에 위치한 이 국민학교의 '학교 인사'를 받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