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도시와 창조적인 사람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꿈
클리블랜드에는 내 박사 논문 주제가 된, '문을 닫은' 교회와 학교가 상당히 많다. 당연히 인구의 이탈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도시 중 2000년대 초반에 클리블랜드보다 인구가 많이 감소한 도시는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밖에 없었다고 한다. 뉴올리언스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인구의 이탈이 매우 심했다. 이 미국 태풍은 무려 2만 명의 뉴올리언스 주민을 실종 상태에 이르게 했다. 도시 주민의 대부분이 이재민이었는데 뉴올리언스는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 많아 대형 허리케인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뉴올리언스를 제외하면 사실 상 인구의 감소가 가장 큰 지역이 바로 클리블랜드였다. 13화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미국 4대 스포츠 중 3대 스포츠의 클럽을 보유하고 있는 클리블랜드인데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지역 상황이 많은 교회와 학교를 망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의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바이오산업과 연구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클리블랜드에는 전미 최고 수준의 병원인 클리블랜드 클리닉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의 대학병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 병원들에 대한 지역 주민의 자부심은 상당하다. 우수한 병원이 두 개나 존재하다 보니 인근에 소형 병원도 적지 않게 성업하는 것으로 보였다.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꿈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도시가 사는 길
도시가 살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도시로 돌아 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창조적인 사람들이 도시로 모이지는 않는다. 일자리는 어디에나 있지만, 막상 찾아보면 어디에도 없다. 사이먼스 교수님은 문을 닫은 학교와 교회를 재활용하는 방안에 관한 책을 쓰는 동안 종종 이런 어댑티브 리유즈 프로젝트(adaptive reuse projecdts)가 창조적인 사람들을 도시로 불러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이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일과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일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일이다. 언듯 보면 매우 피곤한 인생일 것 같아도 실상 그렇지 않다. 시간에 얽매이거나 쫓기지 않는 삶을 살고, 명령 체계에 의존하기보다 협업에 의존하므로 시간의 강박과 상하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덜 발생한다. 좋아서 일을 하는 사람만큼 생산성이 큰 사람이 있을까.
둘째, 이 사람들은 경제적 이윤(profits)보다 삶의 질(quality of life)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가끔 창조적인 사람들은 최고의 정점, 즉 가장 돈을 많이 벌 때 나머지 여생은 가족과 함께 즐기겠노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경쟁의 현장을 완전히 떠나기도 한다. 나 같이 전혀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조금만 더 일을 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음에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사람들은 문화가 만들어내는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즐길 줄 안다. 만약 당신의 도시가 창조적인 사람들로 넘쳐나길 원한다면 문화의 부흥은 필수적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뺏길 줄도 알고, 이름 없는 언덕 위의 화가가 그려준 풍경화 한 점을 그 어떤 르네상스 시대 작가의 작품보다 더 아낄 줄 안다. 문화에 대한 수요를 높이므로 공급자인 예술인 또한 더욱 모여들 수밖에 없다. 기억하자. 문화가 메마른 도시에 창조적인 사람은 발로써 투표(foot voting)하지 않는다.
넷째,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질을 위해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펀드와 주식에 약간의 투자를 할 수 있어도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에 올인(all-in)하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돈을 벌면 더 훌륭한 문화를 소비하고 더 깨끗한 환경을 소비한다. 지갑 열기를 아끼면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더 즐길만한 문화, 더 깨끗한 환경을 소비하기 위해 지갑을 여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창조적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는 지역경제가 잘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섯째, 몇 가지 더 쓸 수 있지만 한 가지만 더 보태면, 이 사람들은 획일화된 지역사회를 거부하고 다양성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들은 종교에 열려있고 인종에 열려있고 타인의 직업과 경제적 상황에 열려있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생태계 역시 곧 무너지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다양한 가치가 공존할 때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고 믿는다. 비록 나와 종교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돈을 더 벌지 못해도 타인을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혐오자를 혐오한다.
그렇다면 사이먼스 교수님은 왜 어댑티브 리유즈 프로젝트를 통해 창조적인 사람들은 클리블랜드로 불러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까? 그 단서는 앞으로도 많이 언급되겠지만 우리나라 부산의 전포동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전포동 카페거리, "창조도시의 길목에서"
2017년 모 일간지에 기사가 하나 났다. 뉴욕타임스에서 올해 가봐야 할 곳을 세계에서 52곳 선정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곳이 바로 부산 전포동 카페거리라는 기사였다. 뉴욕타임스에서 전포동 카페거리를 소개하면서 버려졌던 땅이 창조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했음을 강조한 것이 흥미로웠다.
전포동은 행정구역상 부산진구에 위치하고 있다. 전포동 바로 옆에는 부전동이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을 학회와 관광 목적으로만 방문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부전동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을지라도, 아마 '서면'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부전동이 바로 부산의 대표적인 구도심, 상권의 중심가, '서면'이다.
서면 앞에 위치한 전포동은 과거 부품공장 밀집지역으로서 소규모 공장과 철물점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곳이다. 이 지역에도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개발에서 소외된 저소득층 주거지로서 달동네로까지 불리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장과 철물점이 떠난 공간에 크고 작은 카페들과 개성 넘치는 소규모 샵들이 들어서 젊은이들 사이에 머스트 비짓 플레이스(must visit place)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전포동 카페거리는 두 차례 방문을 통해 나와 더 깊은 만남을 갖게 되었다. 두 번의 방문에서 동일하게 가장 먼저 들른 공간은 바로 편집 샵, '오브젝트(object)'였다. 뉴욕타임스가 부산, 그중에서도 전포동을 주목하게 만든 창조적인 공간이다. 사실 '오브젝트'는 전포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면점으로 불리는 전포동의 오브젝트 외에도 세 곳의 오브젝트 샵이 더 있다.
오브젝트 내부에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시그니쳐 상품인 재활용 에코백도 훌륭했지만, 불필요함을 제거한 케이스에 '인위적임'을 1도 찾을 수 없는 화가들의 진짜 작품이 그려져 있는 폰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방학이 아닌 평일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편집 샵, '오브젝트' 맞은편에 위치한 'espace'라는 카페가 여기가 바로 전포동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매우 이색적인 모습이며 전포동 카페거리의 아이덴티티를 형상화한 곳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한 전파상이 옛 모습 그대로 1층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위에 낮에는 커피, 저녁에는 주류를 판매하는 샵이 살포시 얹어져 있다. 이 곳이 바로 옛 것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샵들의 군락(cluster), 전포동 카페거리이다.
전포동 카페거리에는 '빈티지 38', '로망 34', 'LANDMARK 9' 등 전포동 카페거리의 랜드마크 커피숍은 자기네라고 주장하는 듯한, 하지만 수긍이 갈 만큼 독특하고 새련된 자신만의 스타일을 뽐내는 샵이 있다. '빈티지 38'은 공장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실내는 공장 분위기를 연출하여 샵의 이름대로 매우 빈티지한 느낌을 풍긴다.
반면 '로망 34'는 디저트 라인업이 훌륭했으며, 여성 취향 저격의 프리티 샵이라 할 수 있다. 핑키한 내부는 사랑스런 연인과 즐겨야만 할 것 같다. 남자 둘의 방문은 있을 수 없다.
한편, 'LANDMARK 9'의 내부는 우아하다. 예식장의 신부 대기실에서나 볼 수 있는 의자들이 마치 유럽에 와 있는 착각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내의 환한 느낌은 '빈티지 38'과 대비된다. 음료 역시 매우 이색적이어서 메뉴를 선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LANDMARK 9'의 바로 옆에는 '부산 커피 박물관'이 있는데 커피의 역사와 커피 머신의 변천을 감상할 수 있다. 방문했을 당시에는 단체 관람객이 있어, 박물관의 관장님과 이야기를 못 나눈 것이 아쉬웠다. 박물관에 왔다면 반드시 옥상까지 올라가 봐야 한다.
전포동에서 객의 발걸음을 잡아 두는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 '청소년 복합 문화공간 놀이마루(이하 놀이마루)'이다. 놀이마루는 도시의 폐교가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어댑티브 리유즈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원래 서면중앙중학교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으나, 수학과 과학 창의체험관인 '궁리마루'로 변신한 후, 다시 한번 변신한 끝에 지금은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전형적인 학교 건물답게 총 네 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는 북카페와 인문학 콘서트홀, 전시실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2층에는 주로 청소년 동아리 활동을 위한 개방형 동아리 공간이 배치되었다. 2층의 나머지 공간과 3층에는 연극이나 음악 등의 공연을 준비하고 연습하기 위한 공간이 가득하다. 한편, 4층에는 부산다문화교육지원센터가 위치하여 폐교가 다문화 가정의 교육 지원을 위한 공간까지 배려하고 있음은 큰 교훈이 된다.
놀이마루의 내부는 복도와 교실, 화장실 등의 기본적인 학교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었는데, 매우 이색적인 것은 복도의 벽에는 청소년들의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가 난잡하지 않게 실내와 잘 어우러지며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전문적 예술인이나 인테리어 업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학생들의 참여로 구석구석을 채운 것은 감동이다.
후기
여기가 바로 창조도시인 이유
전포동은 매력 넘치는 카페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네이밍이 넘쳐 흐르는 곳이다. 이 곳에 위치한 작은 가게의 간판만 둘러보아도 재미나다. 단순한 이름 붙이기를 넘어 가게 네이밍 역시 작품인 곳이 바로 전포동 카페거리이며,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인생도 날로 먹고 싶다."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실상 이 곳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그들의 '창조성'과 결합하여 도시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갈 곳이 없는 누군가는 제주도로 갈터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전포동 카페거리로 모여들기를 소망한다.
여전히 우리의 옛 일터와 호흡하고 있는 곳, 전포동 카페거리는 서로의 삶을 희생시켜 승리자만 남는, 승리자끼리 또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여 결국 아무도 남게 되지 않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인생이 함께 동행하는 공간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이런 장소가 우리나라에 서 너 곳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