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남자친구(현남편)의 친구들을 만난 날 누군가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을 때 그랬다. "빈 말 안 해서 좋아요. 오빠가 하는 말은 다 진짜거든요."그들은 끄덕였더랬다. 맞아 00이가 빈말은 진-짜 못하지.." 그 때 나는 그게 정말 좋았다. 말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아주 싫어했으니까. 10년 후에 내가 빈발에 얼마나 굶주리게 될지는 모르고서.....
남편은 누가 봐도 꼿꼿하고 올곧은 FM이다. 그는 도덕책이고, 젠틀맨이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이며, 그러므로, 또는 그러기 위해서, 틀린 말은 절대 하지 않고 선을 넘지도, 말실수 하지도 않는다.
아아! 왜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하고 또 탐하는 것일까. 닮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가정 내에서 그의 몫까지 열렬하게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리하여, 틀린말과 선을 넘는 말과 실수로 튀어나오는 말에 파묻혀서 살았다. 내가 더 괴로울까 그가 더 괴로울까? 막상막하일까?
우리의 문제는 감정 케어라고 썼는데, 물론 처음부터 감정을 가지고 싸우는 건 아니었다. 시작은 언제나 늘, 말 한 마디였다. 내가 바라는 말과 남편이 하는, 할 수 있는 말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었다.
그날은 아이들 잘 시간이 훌쩍 지나서 바빴던 저녁이었다. 큰아이를 씻겨 내보내고 둘째 씻길 준비를 하면서 아이 머리를 좀 말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나 지금 화장실 갈 건데"라고 쏙 들어가 버렸다.
"아.. 진짜. 무슨 화장실을 꼭 뭐 할 일 있을 때마다 가냐?"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중에 들으니 미간도 잔뜩 구겨지고 감정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남편과는 다르게 말 한마디에도 과거와 미래를 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내 한 마디 말에는 과거에도 너는 그랬고 미래에도 너는 그럴 것이라는 서운함과 암담함이 스며들어 있는데, 현재만을 사는 남편이 그 행간을 어찌 읽으리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과거에는 잘못했고 미래에는 잘하리라는 말. 나도 알고 너도 알고 하늘도 아는 오천만의 빈 말... 그 말을 예상하고 또 바란다. 하지만 남편이란 존재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
남편: "그렇다고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건 잘못이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죄는 아니지 않냐.(!!)"
물론 태초에 인간의 장기에는 죄가 없다. 장기를 품은 인간이 잘못이지.. 그리고 중요한 건 화장실을 가냐 마냐가 아니라, 머리 말리는 일을 일을 하냐 마냐 아닌가... 못하면 미안하다, 라고 말해야 하는 거고.
남편: "(의아) 왜 사과를 하냐? 1도 미안하지 않다. 생리현상은 미안한 일이 아니다."
..... 미안해야지. 애초에 육아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안 미안한 거다. 내가 회사 동료고 생리현상으로 회의 참석을 못하게 된 상황이라도 이렇게 당당했을까?
"당연하다. 동료라면 화내지 않고 이해해 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으니 서로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미 나에게는 감정의 쓰나미가 덮쳐온다. 애초에 나에게는 이렇게 말을 주고 받을 여유가 없었다. 애들 씻기고 재우기도 바쁜데, 어른은 둘이지만 애들 챙기는 건 언제나 한 명이고 나는 이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상황이 힘들고 서운하고 화가 난다고 한마디 한 걸 가지고, 기어이 생리현상을 핍박하는 인간과 그를 지키려는 인간으로 우스운 상황을 만들고 마는 그에게 또한 화가 난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나를 위로할 수 있을까?
이런 나를 이해 받고 싶은 건 욕심일거야.
아...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듣고 끝내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도 화나서 얼굴이 빨개지는 건 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됐으니 그냥 미안하라고 말 좀 해달라고, 그럼 나는 더 잔소리 안 할거고, 하던 일 마저 할거라고, 체념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잽을 날렸다.
" ....진심이 아닌데 괜찮겠어?"
그는 나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 애초에 부탁을 할 때나 감정을 보듬어 달라고 할 때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공격적으로 짜증만 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이들한테도 우리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냐고.
예의 지켜 말하면??? 똥 안 싸고 머리 말려줄 거야? 아니잖아!! 어차피 안 되는 상황인 건 나도 보니까 아는데 그냥 투정 부리는 거고 넌 그냥 미안해하면 된다고!!!!답정너야!!
라고 소리치는 나에게 그는 침착하게
"그럴 수가 없다니까?"
라고 말했다.
이게 너무나 너무나 전형적인 우리 대화의 패턴이다. 그의 말은 객관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틀린 점은 없다. 그렇지 생리현상이니까 이해해해야지. 좋게 말해야지. 알지. 아마도 이렇게?"여보, 자꾸 필요할 때마다 여보는 화장실을 가네요 호호 다음에는 여보가 아이들 씻기는 것 꼭 도와주세요^^" 이렇게 애교있게? 돌려서?내가 왜?감정 거지야?그래서 차라리 입을 닫게 되었다.
이게 내가 느끼는 10년 묵은 '감정 케어'의 '문제'이다. 눈치 챘겠지만 사실은 감정의 케어가 아니라 감정의 존재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이렇게 감정을 느끼는가. 왜 그는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분통은 터지는데 할 말이 막힌다. 그뿐이 아니다. 감정은 왜 늘 이성보다 열등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 내가 또 미숙했네. 본전도 못 찾았네. 나는 진짜 왜 이렇게 감정 조절을 못할까 밀려오는 자책의 쓰리콤보.
나는 맹세컨데 그저 "어 미안, 혼자서 다 하느라 힘들지? 얼른 나올게"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울고불고 밑장을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는 설명이라고 하고 나는 변명이라고 하는 그런 말들, 사실관계를 가리고자 하는 말들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가끔 우리에겐 빈말이 더 쓸모있을 것이란 나의 생각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내가 바라는 게 이렇게나 명확하고 간단한데, 그게 어려운 일일까? 이렇게 쉬운 행복을 왜 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오열한다. 남편은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남편: "행복은 외부에서 채워지는 게 아니다. 남의 인정과 사랑이 없다고 해서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 자존감의 문제다. 낮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나는 이쯤에서 뚜껑이 뽕 열리고 용암이 흘러내린다. 눈과 코로 뜨거운 용암을 철철 흘리며 역시 오빠랑은 대화가 안된다, 나 정말 속이 터질 것 같다고 외치면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자기는 법륜스님 좋다며, 책도 보고 강연도 보던데, 거기에 나오는 말 아니야? 자기 계발서랑 심리학 책도 많이 보잖아, 거기서 하는 말은 그렇게 귀담아듣는데 내가 하는 말은 왜 그렇게 질색을 해?"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시여 저 입을 음소거시켜주소서.
남편과의 말다툼은 마치, 체급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와 권투 스파링 같았다. 늘 패배가 예정된 싸움, 나만 밑장 다 보이는 싸움. 하지만 다른 대안을 몰라서 멈출 수도 없는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