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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Dec 10. 2023

구립 수영장 등록했습니다

25미터


초긴장 상태였다. 세상에서 가장 긴 25미터가 눈앞에 있었고 나는 그 끝을 향해 출발해야 했다. 닦은 수경을 또 닦고 편안한 착용감이 들 때까지 몇 번이나 고쳐 쓰며 벌써 내 앞으로 몇 명의 회원들을 먼저 보냈다. 물러설 곳이 없을 때쯤 후욱하고 숨을 폐에 들이붓고 팔을 어깨가 빠질 정도로 쭈욱 앞으로 펴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원했던 수영 자세는 발목을 유연하게 놀리며 발차기를 하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코로 숨을 내쉬고 오른쪽 팔이 물 잡기를 시작할 때 고개를 오른쪽 살짝 뒤쪽을 보며 숨을 들이쉬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였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열심히 시청했던 유튜브 수영강사가 가르쳐 준 꿀팁대로 했지만,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몸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리가 뻐근하도록 발차기를 하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다니 수영장에 갈 때마다 배신감이 심하게 들었다. 이때가 지난 5월이었다.

 

구립 수영장을 등록을 해 본 사람들은 소리 없는 전쟁 수준의 등록 대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수영장 신입 회원 등록은 매월 21일 아침 9시에 시작하는데 그 시간 수영장 홈페이지는 거의 마비가 되어 접속은 ‘신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할 정도이다. 나는 지난해 10월부터 여섯 번이나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올해 4월 21일, 만반의 준비를 한끝에 구립 수영장 등록에 성공했다. 홈페이지 접속의 비밀은 컴퓨터 새로고침 버튼에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아침 8시 40분쯤 수강신청을 하는 장바구니까지 가서 준비를 해 놓은 다음 8시 59분 58초쯤에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면 누구보다 빠르게 수강등록이 되는 원리였다. 2023년 나의 봄은 샛노란 수영 가방과 함께 희망차게 시작되었다.

전문가용 수영복과 도수가 있는 수경까지 완벽한 준비를 하고 씩씩하게 강습을 갔지만 또 다른 레벨의 태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지런히 연습을 했지만 자유형으로 25미터를 가는 것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첫 번째 깃발을 지날 즈음엔 여지없이 멈추고 말았는데 숨이 턱에 차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이 전에 요가, 등산, 클라이밍 등 갖가지 운동을 했었는데 25미터 수영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수영을 가기 전날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러워졌다. 먼저 수영을 시작한 친구에게 나의 수영은 거의 난파선 상태라고 고백했다. 친구는 난파선이고 침몰선이고 간에 무조건 빠지지 말고 계속 강습을 가라며, 다음 달이 되면 함께 수강한 사람들 중 반 정도가 지금 나와 같은 이유로 그만두고 새로운 강습생들로 채워질 거라며, 이곳에서도 버티는 사람이 결국 상급반까지 간다고 귀띔해 주었다.

다음 달이 되었고 친구 말대로 강습생의 상당수가 등록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초급 자유형 호흡 터지는 법, 발차기 이렇게 하면 된다, 초급 물 잡기 비법, 배영 발차기 쉽게 하는 법, 초급 물 안 먹는 법, 등 갖가지 유튜브 코너를 구독하며 뇌로 수영을 익히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5700원을 내고 혼자 자유수영을 가서 유튜브에서 배운 내용을 연습했는데 선생님들마다 강습 법이 조금씩 달라서 내 몸에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물을 몸에 붙였다. 실내 클라이밍을 배울 때도 벽과 친해지기 위해 매일 암장에 가곤 했었는데 어깨에 탈이 나서 그만둘 때까지도 수준급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몸 쓰는 법을 익히는 기쁨을 알게 되었었다. 운동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스미듯이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도 그때 배웠었다. 나는 암장에서 벽과 친해졌던 것처럼, 그래서 안전하게 떨어지는 법을 터득했던 것처럼 수영장에서 물과 친해지기로 했다. 물을 먹거나 가라앉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자주 수영장에 갔었고, 우리 동네 수영장이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수리 중이었을 때는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옆 동네로 자유수영을 다녔다.

수영장은 다시 문을 열었고 나는 여전히 화요일과 목요일 아침마다 수영장에 간다. 어설픈 자유형과 덜 어설픈 배영을 할 줄 알게 되었고 지금은 평영 발차기를 배우고 있다. 지난달에 여행을 다니느라 진도가 뒤처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늦어도 하는 것이 낫다 (Better late than never)’라는 신념으로 중급반에서 평영 발차기를 맹연습 중이다. 실력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요즘은 그토록 두려웠던 25미터를 수영하면서 물속의 풍경을 살피는 여유까지 생겨서 옆 라인의 초초급반 강습생들의 반쯤 가라앉은 다리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하나, 둘 스트로크를 세다 보면 바닥에 반가운 파란색 피니쉬 라인이 보인다. 스트로크를 할 때 오른손이나 왼손을 쭉 뻗고 앞으로 쑤욱 미끄러지는 글라이딩을 느낄 때는 물속에서 마치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난파선에서 약간 나아진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수영에 재미를 느낀다. 수영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입수의 순간이다. 실크가 감싸는 듯이 물이 안아주는 그 느낌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팔을 뻗어 물을 잡고 당기고 그리고 밀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마치 클라이밍을 하면서 다음 홀드만 생각했던 것처럼 수영을 하고 있는 몸에만 집중한다. 평형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그냥, 계속하는 거,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것, 그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아는 것, 이것을 등대 삼아 계속 수영을 배우려 한다. 처음에 가졌던 배신감은 이제 단단한 충성심으로 바뀌었고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영을 즐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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