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생이 여자다.
나의 전 직업은 영양사다. 감히 서비스직의 최전방이라 말하고 싶다. 누구나 그러하듯 직장생활에서 점심시간은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직장의 복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양사라는 직업의 심적 부담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려나)하건대 가히 어마어마 하리라.
'그 어려운 일을 제가 해냅니다 여러분, 무려 8년 동안.'
많은 클레임을 받았지만 제일 힘든 건 다수인 고객들의 요구사항보다 한 명인 담당자의 요구사항이다. 심각한 곳(?)은 배추와 같은 과의 나물메뉴가 나가면 김치를 못 내게 하는 곳도 있다. 같은 '배추류'를 한 끼에 먹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가이드라인을 확실하게 짜주는 곳은 오히려 편하다. 하지만 문제는 추상적인 요구사항이다. "아침엔 속이 더부룩한 메뉴는 빼주시구요,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식사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지 않을 메뉴로 짜주세요." (내가 실제로 담당자에게 들은 말이다)응? 내가 방금 문학 책을 읽은 건가. 마치 시와 같다.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는 피급식자에게 '평범한' 클레임을 듣는다. 우선 그들은 백여명 이상이 밥을 먹고 있는 넓은 식당에서 큰 소리로 영양사를 자기 자리로 부른다. 요즘 들어서 계란이 식단에 자주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최대한 슬픈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고객님 시정하겠습니다."며 사과했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가서 식단을 확인 한다. 이유는 점심으로 계란찜을 먹은 다음날 아침으로 계란국을 먹었기 때문. '식자재를 겹치게 메뉴를 짜다니, 내가 죽을 죄를 지었군.'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음에 식단을 짤 때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된다. 혹시나 겹치는 식자재가 있나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자재가 겹치는 메뉴를 짠 곳이 있을 때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다. '내 식단은 눈에 안 보여.' 다른 영양사와 서로의 식단을 검열해주지 않는 이상 매주 짜는 식단에 식자재가 겹치지 않게 하기란 쉽지 않다.
'평범한' 클레임을 들으며 관중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혼이 난 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건지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의 자존감이 남아나질 않을것 같았다. 그래,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정중히 사과하되 상대방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면 웃어넘기지말자. 나는 당당해지기로 했다. 일부러 몸을 밀치는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나에게 욕설을 내뱉은 사람에게는 사과를 요구했다. 그렇게 할 말 다 하는 나에게 행동을 조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청개구리처럼 더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 피급식자 중 한 명이 면담을 요청했다. 식사를 하는 인원이 다소 적은 저녁 식사 시간, 식당에는 그 분과 나 그리고 뒷마무리를 하는 조리원 두 명까지 모두 네 명 뿐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총대매기를 좋아하는 스타일로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문장으로 처음 입을 뗐다. "영양사님은 나쁜남자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의 요지는 나에게 '더 웃어달라' 는 거였다. 이미 나쁜남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내가 쉽게 응해줄리 없었다. 나는 나쁜남자가 된 계기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더 웃어 주었을 때'에 얼마나 많은 욕설과 정서적 폭력을 당했는지를 말했다. 이 세상이 친절에 친절로만 응하는 살기 좋은 곳이라면 애초에 내가 나쁜남자가 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 20여분을 각자의 의견을 설파하고 더이상 할 말도 없어졌을때 상대방이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말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에는? 대놓고 나를 무시하며 전보다 더 까칠한 고객이 되었다. '나쁜남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