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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왕자 없는 동화, 진짜 세상 이야기

진실이 통하지 않아도, 자신을 지키는 법

by Nova G

엄마는 엄지공주가 싫다는 말에, 딸아이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되물었었다.

"엄마는 어떤 공주가 제일 좋아?"

"엄마는 인어공주가 가장 좋아."

일곱 살 작은 여자는 또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 배우 중 한 분이 객석을 돌며 어린이 한 명 한 명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백설공주요!”

“신데렐라요!”

이곳저곳에서 귀여운 대답이 쏟아졌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말했다.

“인어공주가 되고 싶어요.”

그 순간 내 딸이 작게 중얼거렸다.

"헐! 후회할 텐데"


아이의 말에 웃음이 났다. 동시에 생각했다. 인어공주를 좋아한다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하겠구나.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책을 펼쳤다.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라푼젤, 벨, 신데렐라는 모두 마지막에 왕자님을 만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지? 그런데 인어공주는 어때?"

"물거품이 돼서 죽어"

"엄마는 그래서 인어공주가 좋아. 다른 공주들이랑 달라서. 그래서 좋아. 왕자가 없어도 되는 인어공주가 좋아."


인어공주는 바다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험을 시작했다. 사랑과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단 한순간도 타인의 이야기 속 조연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의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를 보고 아이는 화가 나서 말했다.

"왕자가 너무 나빴어! 왕자가 너무 싫어."

그 말이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나는 아이의 감정에 맞춰 물었다.

"왜? 왕자가 인어공주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왜 그것도 몰라? 아주 나빠"


인어공주의 진짜 가치를 깨닫기에는 일곱 살은 너무 순수하다.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행복한 결말’이라면, 이웃 나라 공주는 인어공주의 것을 빼앗은 셈이다. 하지만 왕자와 공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하고, 인어공주는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진실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어릴 적에는 세상이 단순하다고 믿었다. 진실을 말하면 통하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상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살아간다. 진심이 왜곡되고, 노력은 아무런 결과 없이 흩어질 때가 많다. 때로는 착한 이가 상처받고, 이기적인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 배신감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 나에게 세상을 단순하게 가르쳐준 어른들일까,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 자체일까.


왕자도, 이웃나라 공주도 인어공주의 죽음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들은 결코 다른 동화 속의 늑대나 마녀처럼 나쁜 인물이 아니었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된 이유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였다. 그 선택은 어리석을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따랐다.
사랑을 택했고, 희생을 감내했으며,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어공주의 삶은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찬란했다.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세상은 진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가 많아. 진실을 말해도 통하지 않을 때도 많아.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을 때도 있어. 인어공주의 목소리가 사라졌던 것처럼. 그래도 인어공주는 왕자를 원망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왕자를 지켰어. 그런 게 진짜 사랑이야. 그래서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었어도 행복했을 거야."

그러나 아이는 이미 내 말을 흘려 들고 있었다. 왕자에 대한 미움과 인어공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OO아, 너 자신을 버리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지키는 사람이 돼."


사랑도 신념도 지키며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인어공주가 바다 마녀와 거래한 것처럼, 세상에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 또한 내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옳다고 믿은 신념조차 때로는 나를 흔들어놓았다.


아이가 나의 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이 아이도 알게 되겠지. 진심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고, 사랑도 신념도 때로는 스스로를 다치게 만든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고, 믿고,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아이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기보다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비록 그 선택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믿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기를. 진짜 사랑이란 자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며 타인을 품는 일임을 — 그 사실을 언젠가 아이가 깨닫게 되길,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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