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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또 울린, 시어머니의 다른 언어

이해의 조각을 모아 작은 균열 하나를 메우다

by Nova G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정말로 시부모님께 아기를 맡기며 살아가는 날이 오고 말았다.


남편은 첫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이가 안 좋았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나오는 걸 끝까지 반대하셨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으실 수는 없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시아버지는 그 화살을 공연히 시어머니에게 돌렸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취업준비 문제로 걱정이 더 크셨을 것이고 본의 아니게 시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남편에게 털어놓으셨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남편의 재취업은 계획했던 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때마침 우리 회사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복직을 했으면 한다고 조심스레 연락이 왔었다.

우리는 의논 끝에 내가 복직을 하고,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남편의 공부 시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우리는 같이 시부모님을 찾아갔고, 남편은 자신의 계획을 말씀드리며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절대 손주의 똥기저귀 안 치우겠다던 시어머니의 말이 자꾸 생각나서, 그때 남편이 시부모님께 “말 가려서 하시라”며 상처를 드렸던 게 생각나서, 남편의 그 행동에 위로를 받았던 내가 생각나서, 이렇게 된 상황이 더욱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계속 내 입술에 머물다가 결국 새어 나왔다.

“어머님 아버님,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아,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시댁은 왜 평범한 대답이 돌아오지 못하는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아버지가 날카롭게 말씀하셨다.


“자식이 변변치 못한데, 어미가 뒷바라지하는 게 당연하지!”


반사적으로 내 목구멍까지 무언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분위기에서는 할 수 없는 말, 그 말을 삼키고 시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시아버지는 “부모가”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어미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그래, 괜찮다. 아무쪼록 아범 계획한 거 열심히 해라.”


이번엔 시아버지의 말을 시어머니가 재빨리 받으셨다.

짧은 순간 오간 우리 세 사람의 말은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명확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시어머니의 말은 내 말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시아버지에 대한 자기 방어 같았다.

'며느리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방어.




이사할 집과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알아보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시부모님에게 대한 죄송한 마음 반, 아직 돌도 안 지난 아기를 떼어 놓고 출근을 어찌 하나 걱정 반.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그 무렵 아이는 돌치레를 했다. 처음엔 돌치레인지 모르고 이유 없이 나는 고열이 무서웠지만, 먼저 엄마가 된 친구들이 으레 있는 일이라며 다독여 줬기에 담담하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히려 열이 내리고 열꽃이 피니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복직 전에 엄마 품에서 아팠던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어느 주말,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시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열꽃의 흔적이 남아있던 아이를 보고 시아버지의 표정이 더니 어디 아팠냐고 물으셨다. 그동안 돌치레를 겪었지만, 열꽃이 피고 괜찮아졌고 그 흉터가 남은 거라고 말씀드리니 시어머니가 내 말을 거드셨다.


“애들 다 아프면서 큰다. 걱정 마라. 아프고 나면 애들도 재주 하나씩 늘고 그런다.”


내가 아직 남아있는 열꽃 흉터를 걱정하니 시어머니는 애써 나를 위로하듯 말씀하셨다. 예전에 친정 엄마에게도 들었던 말이라 그런지 그 말이 더 따뜻하게 들렸다.

시아버지는 그날 내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애지중지 아끼는 하나뿐인 아들 손주 아픈 모습을 보니 많이 속상하신가 보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우리가 떠난 뒤 두 분이 크게 다투셨다고 했다.


“애 아픈 게 어른 잘못이지, 아프면서 큰다니 그게 무슨 말이고!”

라며 시어머니에게 화를 내셨다고.

나를 위로하려던 시어머니의 말 때문에 두 분이 다투셨다니, 마음 한켠이 상당히 불편했다.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걱정이 깊어갔다.




우리가 이사한 집은 회사까지 전철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대신 시댁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갔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 동안은 남편이 시간을 할애해서 돌보다가 차츰 시부모님이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나도 처음부터 시부모님께 온전히 아이를 맡기는 거라면 불편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을 텐데, 남편이 있어서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에 갈 수 있었다.


그런 시간도 잠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다시 직업군인이 되었다. 3~4개월 집에도 오지 못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기에 남편 없이 시부모님과 아이를 돌보며 회사생활을 해야 했다.

내 출퇴근 시간에 맞춰 시부모님께서 우리 집으로 직접 아이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셨다. 종종 아이를 차에 태우고 역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시기도 했다. 그때 우리 아기의 모습과 그 계절의 공기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회사까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출퇴근만으로도 녹초가 되었지만 시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남편도 없이 워킹맘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으니. 아이가 아플 때였다.

아픈 아이를 뒤로 하고 출근하는 일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걷는 심정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무리 잘 봐주셔도 아픈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출근하는 마음은 칼로 심장을 조금씩 오려내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팠다.

감기는 일상이었고, 고열과 함께 찾아오는 중이염도 단골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싶으면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열이 났다. 주말에도 진료가능한 소아과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밤새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해도 뜨기 전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로 향한 날도 있었다. 수족구, 독감, 유행하는 전염병을 아이는 전부 다 앓아냈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이의 두 살은 병치레 속에서, 엄마 없이 보내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 시기 내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달라지는 시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일이었다.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가실 때 아이가 아프면, 시아버지의 표정에선 찬바람이 불었다.

‘아이가 아프면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이 엄마라는 걸 모르실까…’

섭섭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회사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훈련소에서 남편이 보내온 편지에는 '시부모 어려워하지 말고 주말에도 아이를 맡기고 좀 쉬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보고 내가 얼마나 오열하듯 울었는지 남편은 모른다.


아이가 아팠던 주말, 하루는 시댁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날도 시아버지 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가 아프니, 괜히 시댁의 온도가 서늘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시어머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남자들 애 아프면 다 여자 탓이라고 생각한다. 삼 남매 어릴 때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누구라도 아프면 나한테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아버지가 뭐라 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어라.”


투박한 말투였지만, 그 뒤에 숨은 마음을 다 알 것만 같았다. 남편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그날은 하염없이 울었다. 그간 시어머니가 나를 아프게 했던 말들이 하나씩 귓가에 울렸다.


“손주 아무리 예뻐도 나는 똥기저귀 안 치운다.”

그 말이 계속 메아리쳤다.

그 메시지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듯 놀랐던 날.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어 내 마음만 할퀴었던 그 말을, 이제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손주라는 갓난아이를 마주한 순간, 시어머니는 오래전 삼 남매를 키우며 겪었던 시아버지와의 갈등이 떠올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내 남편은 신장병으로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긴 막내아들이었다. 혹시라도 그 시절의 아픔이 다시 반복될까 봐, 며느리에게도 같은 상처가 갈까 봐, 시어머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먼저 선을 긋고 방패를 세우셨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도 ‘엄마’라는 자리를 배워가고 있었다. 그건 비단 나와 남편, 나와 아이 사이에서만 깨우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모든 부모들도 그 과정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마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의 무뚝뚝한 말속에 깔려 있던 불안, 시아버지의 강한 말투 속에 감춰져 있던 두려움, 그리고 그 두 감정 사이에서 오래 버텨온 시어머니의 마음.

예전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주 조금씩 짐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은 거창한 화해의 순간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오해를 풀어가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일의 반복이 아닐까.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마음이 긁히고, 어떤 날은 울컥해졌다가, 또 어떤 날은 서로의 사연을 이해하며 마음이 조용히 풀리는 일들의 반복. 그렇게 생긴 작은 이해의 조각들이 쌓여, 관계의 결을 서서히 바꿔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어머니와 가족이 되어 가는 중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큰 오해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해와 오해의 시소를 타고 있다.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다른 미움을 틔우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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