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움직이는 건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무게다
우리 시댁은 명절에 모이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올 것 없다, 돈만 보내라.”
장난처럼 들리지만 시아버지의 솔직한 말씀이다.
그래서 명절은 대체로 자유롭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매년 10월, 시외할머니 생신엔 꼭 경주에 간다.
남편의 마음을 아니까, 내가 먼저 챙기게 된 약속이다.
남편은 내가 우는 걸 매우 싫어하지만,
그런 남편이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다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었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 깊은 곳을 함께 나눈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외할머니 생신은 내게도 자연스럽게 지켜야 할 일정이 되었다.
새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10월을 확인하고, 그 주말만큼은 늘 비워 둔다.
처음 만난 할머니는 먼지 하나 없는 유리창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빛을 오래 머금은 돌처럼 단단하고도 맑았다.
그 눈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말을 아끼고 고르느라 정작 하신 말씀은 "고맙다, 그저 고맙다" 뿐이었다.
나와 증손자를 바라보는 눈에는 할머니의 지난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나의 시어머니를 낳고 키우던 시절의 기억, 어린 외손자를 돌보던 시절을 지나 손주의 아들까지 마주하니 참으로 신비롭다 말씀하시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와 단 둘이 마주했던 순간에 할머니는 한 말씀 더 해주셨다.
"남자 철 안 든다. **이랑 살아주어 고맙다. 진짜 고맙다."
그 말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렇게 맑은 눈으로 이런 말을 하실 줄 몰랐다.
이후에도 해마다 나를 만날 때면 비슷한 말씀을 꼭 빼먹지 않고 해 주셨다.
시외할머니를 대략 일곱 번째 뵈러 가던 해,
나는 남편과 정말 많이 싸우던 시기였다. 서로에게 말로 상처를 주며 이혼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경주... 가고 싶지 않았다. 시댁 식구들 모두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일이었으면 안 갔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 생신이니 갔다. 할머니는 다른 시댁 식구들과 차별되는, 나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경주로 가는 차 안에서 문득 나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나에게도 외할머니가 계신다.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가 해를 거듭해도 물러날 줄 모르니
둘째가 백일쯤 되었을 때 본 게 마지막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셨으니 만나는 게 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경주로 향하고 있다.
경주에 갈 때마다 시아버지는 늘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셨다.
해마다 듣던 말인데도, 올해 그 말은 유난히 가슴 한쪽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다.
정말로 올해가 마지막일까 두려운 마음과,
어쩐지 나의 외할머니가 겹쳐 떠오르는 마음이 내 안에서 뒤섞여 요란하게 흔들렸다.
우리 할머니는 한해한해가 아니라 '이달 다음 달, 아니 오늘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왔다. 비교해서 생각하며 슬퍼하거나 씁쓸해할 일이 아닌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속마음이다.
아이들에게 왕할머니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아~! 병원에 있는 왕할머니?!” 라며
우리 할머니를 기억하는 말이 더 나를 글썽이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엄마에게 할머니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그해 경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우울하고 슬펐다.
마음의 무게만큼 몸도 무거워져 움직이기 싫었다.
이모님 댁에서 할머니 생신 파티를 마치고 나는 조용히 시댁 식구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들을 챙기는 척 아무도 모르게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사실은 그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버거웠다. 그들 틈에서 나만 다른 장소에 서 있는 것 같아서— 남편과의 서먹한 거리감도, 출발할 때부터 우리 할머니 생각도 잔잔히 겹쳐 올라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셨는지 소리 없이 들어오셨다.
이번에는 용돈까지 두둑이 찔러 넣어 주시며 또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더니 이번엔 새로운 말을 더하셨다.
“**이 키워줘서 고맙데이. 진짜 고맙데이”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다. 아, 어떻게 아셨지...
그동안은 그저 "남자 철 안 든다", "살아줘 고맙다", "욕본다" 그 정도였는데…
해마다 표현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할머니 손주 애 같고 철이 너무 없어요. 정말 키우기 힘드네요! 근데 왜 내가 키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그간 남편이랑 살면서 힘든 일을 푸념하듯 늘어놓고 싶기도 했다.
대신 마음을 다잡고
'내년에도 한 말씀 기대하고 올 테니 꼭 건강하세요. 올해가 마지막이면 안 돼요.'라고 생각하며
"매년 꼭 올 테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만 했다.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 한편이 따뜻하게 녹았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경주에 내려놓고 돌아왔다.
이번 경주행은 나만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출발 며칠 전, 시어머니가 백신 2차 접종 후유증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 소식에 아주버님은
"그럼 엄마 경주 못 가겠네"라고 하니 시아버지가 단호히 말씀하셨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
시아버지 말씀대로 어쩌면 우리 시어머니는 일 년 중 그날만을 기다리시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에 만난 시어머니는 정말 초췌하고 상당히 힘든 모습이었다.
그래도 엄마 생일이라고 자신의 몸 아픈 것도 잊어가며 차에 오르시는 모습이 조금은 소녀 같기도 했다.
시이모님 댁에서 모임을 마치고 시부모님과 할머니는 우리 차를 타고 할머니 댁을 거쳐 숙소로 이동했다.
시어머니는 엄마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아까워 1초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엄마~ 우리 애들 삼 남매 키우느라 엄마가 고생 많았는데, 이렇게 보니 좋지?? 얼라들도 보니 기분 좋제?”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 얼라들이 커서 새끼들도 델고 오고, 엄마 보니까 좋제?"
"고오맙다, 그리고 감사하다."
할머니는 마치 '감사하다'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연신 감사하다고만 하셨다.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도 그 말의 진심이 어디까지 닿을는지 안타까운 듯 계속 감사하다고만 하셨다.
내 무릎을 한쪽씩 베고 누워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두 모녀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행복이 참 별거 아닌 듯하면서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워했던 시어머니를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시외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데이, 정말 고맙데이” 하던 그 한마디가
사실은 시어머니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걸 나는 그날 밤 깨달았다.
내 속에 그대로 묵혀 있던 섭섭함들이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줄에 슬그머니 풀어져 버렸다.
누구에게서 받은 말이든 그 말이 결국 다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다시 부드럽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시월의 밤공기처럼 선선하고
할머니의 목소리처럼 따뜻하게
나는 시어머니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의 갈등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틈을 메우려 애쓰지만,
가끔은 그 틈이 있기에 서로가 각자의 고유함을 지닌 채 곁에 머무를 수 있다.
내가 시어머니를 싫어하는 마음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부딪히는 순간조차 관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갈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갈등을 바라보는 ‘나’가 조금씩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