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없는 모정 앞에서, 나는 다른 미움을 키웠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재밌게 보았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인생드라마”라고 극찬할 만했다.
극 중 요순(고두심)은 삼 형제의 어머니로 중년의 위기를 견디고 있는 아들들 때문에 걱정이 마를 날 없는 모정을 가진 캐릭터이다.
이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전, 제작진은 고두심에 대해 “시대의 어머니상을 연기하게 될 요순 역에 더없는 적임자”라 생각했다고 했다.
'시대의 어머니상'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에서의 요순을 좋아하지 않는다. 며느리 윤희(이지아)에게 건넨 대사 때문이다.
이지아는 아이를 낳은 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좋은 소식을 알리러 윤희와 동훈은 어머니를 찾아간다. 옆에 있던 요순의 큰 아들(박호산)이 이제 우리 집안에도 변호사가 있어 든든하다며 제수씨의 합격을 축하하고 대단하다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요순은 변호사 덕 볼 일 있다는 게 뭐 좋은 거냐며 시큰둥해 했다. 이에 큰아들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왜 그래? 그냥 축하해 줘. 애 낳고 한 번에 사법고시 합격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대사라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요순의 표정은 꽤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뾰로통 한 얼굴로 끝내 며느리에게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다.
후에, 큰아들은 엄마에게 왜 그러냐며, 안 그러더니 가면 갈수록 왜 그러냐고, 며느리 잘난 게 그렇게 밉냐고 묻는다. 그때 요순의 대사에 나는 놀랐다.
“내 새끼보다 잘난 것들은 다 미워! 내 새끼 기죽을 거 아냐! 말도 없는 놈 시키”
나는 드라마의 그 대사를 그냥 잊어버렸어야 했다.
요순의 모습을 우리 시어머니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내 속에서 지렁이 같은 것이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장교생활을 그만두고 재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던 시기,
나는 육아휴직 후 내 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속에 있었다.
아무리 ‘육아휴직’이라지만, 1년이라는 시간을 정말 아이에게만 써도 되는 걸까.
휴직이 끝난 뒤에도 내 자리는 남아 있을까.
휴직기간의 중간쯤, 회사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하다며 내 안부를 물었고,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휴직한 사이 회사는 많이 성장했고, 내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대리가 팀장 대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똑똑한 후임인지 알기에 마음이 놓였다.
팀장님 없는 팀은 방패가 없는 것처럼 가끔은 힘들지만, 그래도 다들 잘 견디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 자리를 채우고 있는 동료들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회사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다.
죽어있던 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았던 건 잠시였다.
그 전화 한 통으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육아라는 세계 안에만 갇혀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깨닫고 말았다.
그날 밤, 잠을 못 잤다. 내가 이렇게까지 일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나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건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불안감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남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나중을 위해 무언가 준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지지해 줬다. 우리는 하루 중 시간을 나눠 번갈아 쓰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나는 하루에 딱 두 시간만 자유시간을 달라고 했다.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집 앞 카페에서 공부했다. 그렇게 준비한 자격증 시험 1차에 합격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2차 실기 시험이 있었다. 공부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큰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시험 유형이 어떤지 파악하고 공부의 흐름을 놓고 싶지 않아서 시험은 치르기로 하고 접수까지 마쳤다.
문제는 2차 시험 날짜가 남편의 토익 시험과 겹친다는 사실을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이 때문에 둘 중 한 명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의 재취업을 생각하면, 나보다 남편의 시험이 더 중요한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마음을 접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도 뭔가 씁쓸했다. 남편은 둘 다 시험을 볼 수 있게 어머니께 아이를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말렸지만, 이미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해둔 뒤였다.
시험일 사흘 앞두고 시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둘 다 아기 보랴 공부하랴 기특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집으로 가면 되냐 물으셨는데 마지막에 문장 때문에 어머니의 도움을 나는 끝내 거부했다.
“애비 마음 편히 취업 준비 할 수 있게 해 줘라”
저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속마음을 숨기셨을까. 나는 단호히 시험을 포기했다. 어차피 합격을 기대했던 시험도 아니었으니 포기가 어렵지 않았다.
시어머니께도 분명 거듭 괜찮다고 말했는데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이런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공부하는 남편이 부럽다고 했다. 친구는 내 이야기에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시험 보러 가라고 했다. 합격을 하던 못하던 하고 싶은 거 포기하지 말고 했으면 좋겠다며 자기가 시험 보는 동안 아기를 봐주겠다 했다.
친구의 응원에 조용히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그깟 자격증시험이 별거냐고 2년 안에만 붙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았다.
그렇게 쿨한 척 마음을 내려놓고, 시험 당일 일요일에 나는 여느때 처럼 아이와 교회에 갔다.
모자실에 있던 한 집사님이 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오늘 시험 때문에 못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어찌 왔냐고.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나는 정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서러운 감정이 다시 일렁이었다.
나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억울한 일을 엄마에게 일러바치듯 말했다.
“시어머니가, 남편 마음 편히 취업 준비 할 수 있게 해 주래요.”
말끝이 떨리더니 끝내 눈물이 터졌다.
기왕 울기 시작한 거 도리가 없다는 듯 나는 더 서럽게 울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가요. 어차피 떨어질 시험인데 시험 보고 와서 나중에 무슨 소릴 더 들으라고요.”
나보다 10살 정도 연배가 많은 집사님은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참... 시댁이란 게 그래...”
그 말은 나를 향한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하는 체념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의 아저씨>를 본 건 그로부터 두 해쯤 지난 뒤였다. 드라마 속에서 고두심이 연기한 요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교회 모자실에서 들었던 그 한숨을 떠올렸다.
“참... 시댁이란 게 그래...”
그때는 그 말이 위로인지 체념인지 분간할 수 없었는데, 요순의 대사를 듣는 순간 어쩌면 그 말이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오래도록 굳어버린 관습이 입을 벌려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향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이 안쓰러운 마음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며느리를 향한 미움으로 번역되는 순간, 나는 그 마음에서 멀어졌다.
며느리의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듣고도 축하하지 않는 시어머니, 누가 들어도 축하부터 나와야 할 일인데 요순은 끝내 축하하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장면은 넘어갔다.
차라리 독한 말 한마디였으면 드라마 속 인물로 흘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요순의 침묵은 너무 익숙한 현실의 태도처럼 보여 나의 시어머니와 자꾸만 겹쳐졌다.
나는 그 인물을 ‘시대의 어머니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하다.
품을 떠나본 적 없는 막내 기훈이만 치우면 될 줄 알았더니, 큰 아이 상훈이가 늘그막에 빈털터리로 여편네에게 쫓겨나 집으로 들어왔다. 마흔 넘은 아들 둘이 집에 있으니 열이 뻗쳐 욕 한 바가지 퍼붓다가도 삼시세끼 따뜻한 밥은 해 먹이는 엄마.
죽기 전에 아들들 제 짝이랑 우애 좋게 사는 것을 보고 죽어야 눈이 감길 텐데. 집안의 철부지 아들 둘이 추레하게 혼자 늙을까 걱정이 태산. 사실 생전 말없이 묵묵히 뒤치다꺼리하는 둘째 동훈을 가장 안쓰러워한다.
tvN 홈페이지 프로그램 소개에 등록되어 있는 “변요순 (73세, 삼 형제의 모친) / 고두심”에 대한 설명글이다.
‘둘째 동훈을 가장 안쓰러워한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시어머니에게 내 남편이 가장 안쓰러운 자식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나는 며느리에 대한 태도에 많은 물음표를 남긴다. 자식이 안쓰러운데, 왜 그 마음이 며느리에 대한 미움으로 향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도 피곤해 잠든 남편을 보면 안쓰럽다.
퇴근하고 돌아와 귀찮을 법도 한데 아이들과 온몸으로 놀아주는 모습을 보면, 괜히 아이들에게 아빠 좀 그만 괴롭히라고 말하게 된다. 술기운에 힘들었던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는 밤이면
안타까워서 가만히 등을 두드려 주게 된다. 나도 내 남편이 아깝고, 나도 내 남편이 애틋하다.
아들을 향한 안쓰러움이 며느리를 밀어내는 말과 태도로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 마음에서 시어머니를 밀어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 모정이라 해도,
그 사랑이 타인을 밀어내는 논리가 되는 순간 나는 끝내 다른 감정을 배우게 된다.
이해가 아니라, 거리 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