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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을 키우는 중이었다

품위·희생·자부심으로 얽힌 한 가족의 서사를 통과하며

by Nova G

결혼할 때 우리는 예도를 받으며 퇴장했다.

이 점에서 시부모님은 꽤나 큰 부심을 가지시는 듯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결혼식에 사회자의 이벤트를 일절 못하게 하셨다. 신랑이 신부 안고 벌칙 수행하기, 신랑신부 뽀뽀하기, 춤추기 등등의 행동이 '품위'를 깎아 먹는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 나는 추억이 될 만한 이벤트 하나 남기고 싶었는데...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이 남자는 결혼 그 자체에 신이 나서 엄청 들떠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뭐가 됐든 불화의 싹을 지피는 게 싫어서 그냥 시부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부모님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는 마음으로.

장교인 막내아들이 품위 있게 결혼식을 치르는 게 자신들의 품위를 보여주시는 거라 여기시는 것 같으니 그 품위를 지켜드리자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편은 결혼 후 장교생활을 그만두었다. 결혼 전부터 군인이 싫다고 했던 사람이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은 그렇지 못했다.

결혼하고 1년 후, 남편과 시아버지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 시기 남편은 나를 꽤 많이 의지했는데, 남편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군복을 벗고 약 1년간 이런저런 노력을 해 보았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아이까지 태어난지라 남편도 어쩔 수가 없었는지, 고민 끝에 다시 군복을 입는 선택을 했다. 공군으로 재입대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부사관이었다.


군의 계급체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특히나 내 남자 사람친구들은 장교에서 부사관이 된다는 건 '대단한 결정'이라고, 너희 남편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군대에 다시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기보다 싫은데 심지어 장교에서 부사관으로 간다는 건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 거라며 나보고 남편 잘 골랐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나는 알고 있었다. 뭘 해도 할 사람이라는 걸. 내가 이 남자를 고른 이유, 부모마저도 뜯어말리던 장교를 그만둘 때에도 지지해 줬던 이유가 그거였다. 남편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믿었다.

하지만 장교와 부사관의 차이를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가 얼마나 힘든 결정을 한 것인지까지는 몰랐다. 그저 장교 생활할 때 보다 퇴근도 빠르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며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아이는 하루하루 기특하게 성장했다. 남편은 아이를 보며 모든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듯했다. 사실 남편은 다시 시작한 군생활에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계급의 문제였다. 장교 생활하다가 부사관으로 근무하려니 당연히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남편이 그런 서열관계에서 받는 자존심 문제 따위는 가뿐하게 넘겨버릴 거라 믿었고, 그러길 바랐다.


남편의 첫 근무지가 지방으로 떨어지면서 나는 일을 그만두고 이사해 관사생활을 시작했다. 시부모님께 육아를 더 이상 짐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퇴사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시부모님과 거리가 멀어지자 남편은 아이의 기특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시댁 단독방에 자주 올렸다. 매일 손주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갑자기 멀리 떨어져 지내니 손주가 많이 보고 싶으실 거라는 생각에 나도 자주 안부를 묻고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의 말에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장교의 아들이다"

시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장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신 걸까, 아니면 아들이 장교였던 시절에 머물러 계신 걸까. 저 말 한마디에 남편은 또 하루 얼마나 슬펐을까, 안 그래도 계급문제로 힘들어하는데 지난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남편을 향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아들의 속마음도 모르고 저런 말을 하시는 시어머니가 안타깝고 답답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장교도 부사관도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을 아예 나와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나름 잘 살아가고 있다.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던 날, 시부모님은 아이의 입학식에 참여했다가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셨다. 그러던 중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축하한다고 직접 전화를 하신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장교라고 믿고 딸 시집보내셨을 텐데, 할 말이 없다."

난데없이 난감해졌다. 이런 비슷한 말을 시어머니는 전에도 몇 번 하셨던 적이 있다.

둘째를 낳고 병원에 있을 때, 엄마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다. 병원에서 우리 시어머니를 만났는데, 시어머니의 첫마디가 "사부인 죄송합니다." 였다고 한다.

그리고 내 막냇동생 결혼식 때에도 또 그 말씀을 했다고 하셨다.

"사부인, 면목이 없습니다."


그 비슷한 말을 내 귀로 직접 들은 그날은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우리 집에서는 아이 아빠가 장교라서 결혼시킨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남편이 장교든 아니든 상관없어요.'라고.

하지만 안 했다. 그 말이 오해를 일으켜 시어머니의 자부심에 또 어떻게 스크래치를 남길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자신이 없어서 나의 진심을 매번 숨긴다. 시어머니와 가족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다.




시어머니는 요즘 또 다른 손주들을 돌보시느라 바쁘시다. 한두 해로 끝날 줄 알았던 조부모 육아가 길어지니 남편은 형에게 불만이 쌓였다.

아주버님네는 첫째를 낳고 연년생으로 쌍둥이를 낳았다. 형님은 출산휴가만 쓰고 일을 쉬지 않은 데다 쌍둥이까지 임신했으니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했을 터였다. 남편은 형 내외가 육아휴직을 하고 왜 직접 아이들을 볼 생각을 안 하는지, 언제까지 노모한테 의지하고 살 거냐며 화가 잔뜩 났다. 시댁일에는 절대 내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었었기에 그저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한 번은 남편의 불만을 듣다 듣다 우리도 그랬던 때가 있지 않았냐, 형도 사정이 있으니 그러지 않겠냐고 남편을 나무랐다. 남편은 우리는 다르다며 얼굴을 더 붉혔다. 그래도 우리는 최대한 부모님 편하시도록 집 근처로 이사까지 왔는데 형네는 엄마아빠 이동 시간만 왕복 두 시간이라며 너무 이기적이라는 거다. 게다가 우리는 1년도 안 맡겼다고. 형은 기약이 없다고 한다. 첫째 그렇게 봐줬으면 쌍둥이는 둘이 같이 육아휴직을 해서라도 봐야지 언제까지 늙은 노모가 마흔이 넘은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냐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남편의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우리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시부모님이 자신들을 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심보를 드러내는 일인 것만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걱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시부모님을 뵙고 온 어느 날, 남편은 또 돌아오는 길에 형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길래 나도 속에 얘길을 하고 말았다.


"어머님이 결단을 내리셔야 해. 이건 자기가 아무리 속상해하고 욕해봤자 소용없어. 형제들 간 사이만 나빠지지. 어머님이 결정하실 문제야."


남편에게 돌아온 대답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손주 봐주는 일 그만하라고 말을 안 해본 게 아니란다.


"그런데, 며느리가 자기 아들보다 많이 버는데 어떻게 그러녜. 어떻게 모른 척 하녜. 자기가 이거라도 안 하면 장남 무시받는대."


시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어머니는 아직도 자식을 키우는 중이시네."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깊이깊이 묻어놓았다. 어머니를 측은하게 여기던 마음조차 더 단단하게 닫아 잠갔다.


내가 복직하기로 하면서 우리 첫째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던 그날.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겨우겨우 소리를 냈던 그날의 장면이 필름처럼 지나가며,

"자식이 변변치 못한데 어미가 뒷바라지하는 게 당연하지!" 했던 시아버지의 말씀이 천둥처럼 울렸다.


시어머니가 왜 그토록 아들의 장교 타이틀을 놓지 못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자식이 잘나야 자신도 당당해질 수 있다는 마음,

자식이 흔들리면, 어머니가 더 헌신해야 체면을 지킬 수 있다는 오래된 방식.

그런데 그 사고방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더 아찔하다.

만약 두 아들이 ‘기세등등하게 잘 나가는’ 순간이 왔다면, 시어머니는 그 영광을 자신의 것처럼 휘두르지 않았을까.

자식의 능력이 부모의 자존심이 되고, 부모의 희생이 자식의 부족함을 가리는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어느 누구도 진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무섭고 싫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가족이 되고 싶지 않다.

누구의 성취로 우쭐대지도, 누구의 부족함 때문에 죄스러워하지도 않는, 그저 서로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며 연결되는 관계가 내가 바라는 ‘가족’의 모양이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나의 이전 글에 어떤 이가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당신도 아들이 있다면 시어머니가 됩니다'


그 말이 지금 나를 너무도 아프게 찌른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마음도 결국 ‘나도 누군가의 엄마라서’ 가능한 생각이라는 걸 안다.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시어머니가 되어 비슷한 마음을 품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 관계로부터 더욱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부모의 사랑이 깊다고 해서, 자식을 제대로 놓아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때로는 자식의 자립을 막는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부모가 자식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어쩌면 자기 존재를 ‘누군가의 부모’라는 역할에 기댄 채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간절히 나 자신에게 바랄 뿐이다.

아이의 인생을 빌려 나의 자존감을 세우지 않기를.

아이의 선택에 상처 입지 않는 부모가 되기를.

아이의 삶이 흔들릴 때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나약한 결심을 하지 않기를.

아이를 위해서였는지, 나 자신을 위해서였는지 구분할 수 있는 어른으로 남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이런 단단한 결심 뒤에 남는 건 결국 아주 단순하고도 단단한 문장 하나다.


"양육의 목적은 자녀의 자립이다."


아이의 능력이나 성취가 내 체면이 되지 않고, 아이의 어려움이 나의 실패가 되지 않는 관계.

내가 아이의 뒤에 묵묵히 서 있되, 아이가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남겨두는 관계.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경계하듯 살아가기를 부단히 애쓸 것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시어머니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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