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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어머니만 미울까

시댁의 감정과 관계 사이, 그 속에서 내가 선택한 길

by Nova G

이번 연재에서는 시아버지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어쩌면 내가 시어머니를 싫어하는 이유의 팔 할은 시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시아버지가 그리 밉지 않다.


남편은 삼 남매 중 막내다. 나와 동갑인 형, 두 살 많은 누나, 그리고 남편.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안 형과 누나는 결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자연스럽게 ‘첫 손주’의 자리를 온전히 누렸다. 그날도 시댁 방문은 아이 덕분에 화기애애했다.

평소 보기 힘든 형님과 아주버님도 조카를 본다며 집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주방에서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고, 가족들은 베란다 앞에서 둥글게 모여 콩을 까고 있었다.

늘 그렇듯, 시아버지의 훈화 말씀이 시작되면 모두 입을 다물고 콩만 깠다.


대부분 흔한 친척 이야기였다. 누가 뭘 했다더라, 어느 집 아이가 어떻게 됐다더라.

친척 중 누가 어릴 때 공부를 얼마나 잘했고 결국 그 아이가 변호사 시험을 합격했다고 했다며 친척들의 소식을 전하는 듯했다. 그러다 별안간 내 귀에 날카롭게 꽂힌 말이 있었으니...


"그러니까, 엄마가 또릿또릿 해야 한다. 엄마가 똑 부러져야 자식들이 잘 되는 법이야. 우리 집은 엄마가 흐~~릿해서 자식들이 잘 안 된 거다."


원 안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칠 뻔했다.

그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이어야 했다. 시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시아버지의 그 말은 시어머니를 향한 듯했지만 결국 나에게까지 도달하는 화살이었다.


이곳이 좀 무서웠다. 약간은 두려운 마음에 소리 없이 다짐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만큼은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시부모님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는 엄마 혼자 키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나의 복잡한 생각 속을 비집고 ‘엄마도 명문대 며느리 보고 싶어’라는 문자 메시지가 다시 쑤욱 올라왔다.

그 문장을 이해했을 때는 시어머니가 조금 가여웠지만, 이런 분위기를 접하고 보니 도리어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은 시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건, 시어머니와 달리, 시아버지는 결혼 전부터 나를 예뻐하셨다는 점이다.

나이가 많지만 그렇기에 고집불통 막내아들에게 더 좋은 배필이라 하셨다. 그리고 내가 소위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도 높이 사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그렇지 집에서 서포트를 잘해줬으면 명문대학도 갔을 거라고 하셨다. 그뿐 아니라 외모도 언행도 똑 부러진다고 하셨다고... 한다.


물론 이런 말들을 나에게 직접 하신 건 아니다.

모두 남편이 전해준 이야기 들이다.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사람이 참... 투명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그 칭찬들은 곱씹어 생각할수록 묘하게 불편했다.

내가 연상이라서 왜 더 좋다는 거지? 나는 배우자를 맞이하는 결혼을 한 것이지, 이 집 ‘막내아들을 관리하러’ 들어온 게 아닌데.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똑바로 밀어주지 못해서 좋은 대학을 못 갔다는 식의 말은 또 무슨 논리란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왜 시아버지가 밉지 않고 시어머니만 유독 미울까.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어떻게 대하는지 내 눈으로 보고도, 왜 나는 더 시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을까.


신혼 초, 남편은 시어머니와 통화를 자주 했다. 심할 때는 두 시간씩 통화를 하느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랑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아?”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 아버님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또 엄마한테 뭐라 했다’, ‘또 싸웠다’는 이야기.
내가 이해 못 하는 표정을 지으면 남편은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이혼하라고 했어. 이혼해도, 아버지 연금 반은 엄마 거라고.”


남편은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남편의 마음을 나도 처음엔 이해했다. 자기가 어머니 얘기 많이 들어드리라고 했다.


- 하지만 남편은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어머니가 가정에서 놓였던 자리와 그 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채 자라왔다. 그 이중적인 태도는 결국 우리 결혼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


몇 번을 반복하니, 아들에게 전화하는 시어머니가 점점 싫어졌다.
신혼인 아들 부부에게, 그것도 며느리와 함께 있는 시간에, 몇 시간씩 하소연을 하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장 싫었던 포인트는 자식에게 아버지 흉을 보는 태도였다.


내 남편도 이제 '아버지'가 된 사람인데.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장남은 시어머니가 애지중지 아끼는 자식이라 그렇다 쳐도, 아직 결혼 안 한 딸도 있는데 왜 굳이 결혼한 막내아들한테 전화해서 그럴까 의아했다.


“근데 누나도 있잖아. 보통 엄마들은 딸에게 그런 얘기하지 않아?”


남편의 대답은 간단했다.


“누나는 엄마 얘기 안 들어줘. 누나는 엄마보다 아빠를 이해할걸.”


그러면 안 되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딸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더 이상은 싫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아, 내 남편한테 좀 그만하세요!!"





시어머니는 어쩌면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분명 잘못된 방법이었다.

어른이지만, 어른답지 못한 방식.
그게 나를 시어머니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며느리인 내 눈에만 보이고 나만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걸 발견할수록 나는 이 틈에서 외톨이가 되어감을 느꼈다.

시댁 식구들과는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먼저 결혼한 선배들의 말이 진리인가 하고 씁쓸한 생각만 쌓여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댁의 풍경은 누가 더 잘했고 누구는 더 잘했고, 늘 외부를 향하여 비교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교로 자존감을 세우는 사람과, 그 비교 속에서 평생을 움츠린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시집와 또 다른 비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결국 미움의 핵심은 인물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였다.
어른의 말 한마디가 또 다른 어른의 생을 움츠리게 하고, 그 상처가 다시 다음 세대, 나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을 끊고 싶었다.

누구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각자의 상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마 ‘시어머니가 싫다’는 감정 속에는,
그분이 견뎌온 삶의 모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나의 미숙함과, 그 삶을 짊어진 채 나에게 뼈아픈 말로 다가온 시어머니의 외로움이 함께 얽혀 있는지도 모른다.


내 감정의 방향은 누구를 향해 가야 할까.

시어머니를 이해하지만 왜 시어머니는 싫고 시아버지는 견딜 수 있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비교로 이어지는 가계의 역사를 끊고, 이 속에서도 온전히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가족의 형태이고, 내가 꾸리고 싶은 가정의 모습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이 속에서 온전히 나로 존재하겠다는 다짐이, 내가 당당히 선택한 가족의 형태가

우리 가정을 거세게 흔들어 이혼의 문 앞까지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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