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 우울을 더 깊게 했던 시어머니의 말
모두들 “조리원 천국”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은 낯설고, 불안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 같았다.
아기를 낳았다는 기쁨보다 막연히 ‘달라질 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2주간의 우울했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친정에서의 조리생활이 시작되었다.
출산을 앞두고 휴직을 한 후, 출산예정 2주 전부터 친정에서 생활하다가 친정 근처의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출산 직전까지 친정에서 생활해서 그랬는지 아기를 낳고 다시 돌온 친정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엄마의 존재였을 것이다.
내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을 언제 꺼내놔도 들어줄 엄마가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편안함 보다 위안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때를 회상하면 아기를 품에 안은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낮게 깔린 우울감부터 떠오른다. 4시간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볼 때 작은 미소를 지었던 것 빼고는.
거실에 앉아서 잠든 아기를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툭 말을 건넸다.
"엄마, 얘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었다가 죽을 고생 해서 낳았고, 지금도 엄마가 분유도 먹이고 엄마랑 나랑 목욕도 시키고 하는데, 얘는 왜 ●씨(엄마의 성)도 ○씨(나의 성)도 아니고, *씨야?"
나의 실없는 소리에도 엄마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한번 웃고 말뿐 대답이 없다.
내가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뱉고 나니 괜히 더 화가 났다.
여기 이 한 공간에 세상에서 가장 끈끈함으로 함께 있는 이 세 사람의 성이 다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때는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 화가 났다.
남편은 가능한 한 친정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조금 불편해 하긴 했지만 남편은 최선을 다해 내 기분과 아기를 살폈다. 시댁에는 단체 채팅방을 통해 종종 아기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드렸다. 첫 손주인지라 모두의 관심이 뜨거웠다. 특히 시아버지는 첫 손주가 아들이라고 더 좋아하셨는데 그 좋은 마음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셨다.
보통의 일상을 보내던 어느 저녁이었다. 아빠는 퇴근 후 저녁 식사 중이었고, 엄마는 거실 한쪽에서 아기의 똥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어머, 기특하게도 잘 쌌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며
“하하, 구수하다. 밥이 더 잘 넘어가네.”
하고 장난스레 받아쳤다.
우울감에 빠져 지내다가도 그런 순간만큼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시댁 단체 채팅방에서 알림이 울렸다.
"세상 할미할비 아무리 손주 이쁘다 해도, 나는 똥기저귀 못 치운다"
시어머니의 메시지였다.
공기가 멈춘 듯 숨이 막혔다. 앞뒤 맥락도 없이 던져진 그 한 줄은 그저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마치 친정 거실 한가운데, 따스하게 흐르던 시간 위에 던져진 폭탄 같았다.
혹시 앞서 놓친 대화가 있나 싶어 허둥지둥 핸드폰을 스크롤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남편이 나와 상의도 없이 아기 양육을 부탁한 적이 있던가? 남편과 나눴던 대화도 되짚어 봤다. 이 메시지의 타당성을 찾으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혼란과 답답함만 가득했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관경을 천천히, 다시 살폈다.
똥기저귀를 갈고 기분 좋아진 아기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아기의 모든 냄새를 온전히 감싸 안으며 저녁밥을 드시는 아빠,
그 따뜻한 풍경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른 숨고 싶었다.
이놈의 눈물은 또 가득 차올랐다. 엄마 아빠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기를 재우는 척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숨죽여 울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엄마가 살며시 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단지 그 눈빛만으로도 내 마음을 읽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지랄 맞던 성격 여전하네' 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속상해하셨을 테지만
그 조용한 이해가 내게는 온전히 안심이 되면서도 미안했다.
남편이 돌아오고, 시어머니가 메시지를 보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또 울었다.
남편은 내 말을 다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에서 답답함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남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남편은 그저 내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모하리만큼 예민하게 굴고 별것도 아닌 일에 눈물을 보이더라도 그걸 받아줘야 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남편이어야 했다.
남편은 "말 가려서 하세요"라고 채팅방에 한마디 남겼고, 그 주 주말 시댁으로 올라가 직접 말끝을 바로 잡았다.
시부모님에게 한번 더 "말 가려서 하시라"라고 직언을 날리고 온 것이다.
돌아온 남편에게 그 일을 물었다. 정작 그 말을 쓴 시어머니는 별말 없으셨고, 오히려 시아버지가 '자식 키워놨더니 부모한테 큰소리친다'며 남편에게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남편은 그런 아버지와 맞서 크게 싸우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너무 심하게 말한 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은 곧 죽어도 아니라고 했다.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그때만큼 남편이 듬직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시부모를 상대로 나를 대신해 시원하게 한마디 해주어서가 아니다.
나의 불안과 눈물을 ‘지나친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싸 안아준 그 마음 때문이다.
그건 단 한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였다. 유별나다 생각하지 않고 내편이 되어준 것이 고마웠다.
며칠 후 첫 번째 결혼기념일,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첫 외출을 했다. 겨우 두어 시간을 보내며 밥 한 끼 먹었을 뿐이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남편은 어머니께 아기를 맡기고 누리는 이 시간이 죄송스럽다며, 빨리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면서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기에게로 향하는 우리가 아빠이고 엄마라는 사실이 그제야 감격스러웠다.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사람은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고, 그 자리에서 단단해지는 게 아니란 걸.
그리고 그 순간에는 몰랐다. 결혼생활의 불안과 어려움은 남편의 호탕한 행동 한 번만으로 완벽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 남자 한 명만 온전한 내편이 되어주면 내 인생의 2막은 어디로 흘러가든 평온할 거라는 착각을 품었던 나는 얼마나 순수했던가.
남편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듯 남편은 모든 순간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어리석게도, 시부모를 미워하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해소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시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왜 그런 태도를 보이셨을까.
그 후의 모든 만남과 언행 속에서, 이유를 찾아내려 촌각을 세워 살피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아이를 낳은 어미가 되어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와 정말로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