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경김웅기 Apr 03. 2020

형의 생활, 나의 생활

김수영 시인을 만나다

생활은 고절이며
비애였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생활>의 마지막 구절




     그를 수영,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건 졸업논문을 마무리할 무렵부터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1년이라는 시간이 넘도록 한 시인의 일생부터 작품까지 파고들었기에 한 번을 본 적 없는 얼굴이라도 친숙함이 느껴졌기 때문. 두 번째는 그래서인지 내 인생이 힘들 때마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그의 언어들이 꼭 나를 돌보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선물 받은 그 마음이 우리를 친구로 만들어 줄 충분한 계기가 된다는 단순한 귀결에서, 그는 나에게 '수영'이 되었다.

     오늘은 수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가 60년대 독재와 불의에 맞선 자유시인이었다는 것은 나의 졸업논문을 참조하면 듣기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그것보다는 형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이 있는 늦둥이였으니 집에서 내가 어떤 포지션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물론 이 정도 신상을 밝혀도 되겠지, 하고도 생각한다. 수영은 이보다도 더한, 어쩌면 자신의 생활 전부를 역사적으로 들켜왔었으니까. 어쨌든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살면서 형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조용한 학생으로 지냈고, 중학교는 선배가 없는 신설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형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인연이 오래가진 못했다. 나에게 제대로 된 의미로서의 '형'을 만났던 시기는 아마 대학교 때였을 것이다. 작은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때 만났던 형이었다. 그때도 고등학교 때와 비슷하게 연락이 뜸해진 형들도 있고, 여전히 한 번씩 만나 술 한잔 하는 형들도 있고 그랬다. 나는 오늘 그중에서 제일 친한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항상 마음이 언어를 앞질러버린다. 그래서인지 좋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글을 다 써놓고 보면 차라리 편지를 쓰지, 왜 비겁하게 장르를 빌려 이런 식으로 푸는가? 하는 생각만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마음을 붙잡고 최대한 힘을 빼고 써보려 하니 독자분들께서도 양해해 주시길.

     형과 나는 나이 터울이 조금 있다. 그래서 형이 한창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만나서 술을 마셨다. 그때는 내가 서울에 살지 않을 때였으니까 형이 놀러 오거나 내가 놀러 가는 식이었다. 내 기억에 우리는 한 번 만나면 술을 진탕 먹었다. 일종의 기회비용을 퉁치기 위한 전략이랄까. 지금도 물론 서울에서 타지로, 또 타지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경비가 만만치 않지만 그때는 취준생과 학생이었으니 속된 말로 뽕을 뽑는다는, 그런 과음은 납득이 되는 것이다. 남자 둘이서 만나면 애인 이야기를 하거나 게임 이야기를 한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만나서 그런 얘기와 함께 문학 이야기를 꼭 했었다. 사실 이런 게 형만 만나면 하는 특이한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문학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으니, 종종 문학을 아예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도 몇 시간씩 문학 이야기를 할 정도로 문학에 미쳐 있었던 나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형과 이야기를 하면 통하는 게 참 많았다. '한국의 문학이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꽤 복잡하고도 큼지막한 주제를 가지고 몇 시간이고 씨름을 하기도 했고, 글이 가져다주는 따뜻한 손길에 뺨을 대고 있으면 겨울이 녹는다고, 그런 식의 위로를 주고받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멀리 있었으니 전화도 자주 했었다. 그때 했던 이야기들이 다 기억이 나진 않는다. 대충 시시한 이야기들과 묵직한 이야기가 섞여서 오랜 시간 희석되어버린 탓에 이제는 그냥 그런 때가 있었지, 정도의 추억거리로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 말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형이 절필을 한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너는 끝까지 글을 써주길 바란다"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중에 또 쓰시면 되죠, 많이 힘드세요? 등등 나에겐 그 말에 반박할 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저, "네"라고만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말조차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무게감의 언어를 받아들인 적이 여러분은 있으신지. 형은 글을 꽤 잘 쓰는 사람이었다. 책도 한 권 낸 적 있는 사람이고, 특히 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 리뷰를 곧잘 쓰는 사람이었고 텍스트에 흡인력도 있었다. 제법 그럴듯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고 작가로서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이 갑자기 절필을 한다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해했다. 물론 정말 갑자기는 아니었을 테니까. 사람들은 항상 고백이란 걸 깜깜한 마음속에 묵혀두었다가 어떤 계절이 되면 갑작스레 꺼내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고백을 내가 갑자기 받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법이기도 하다. 다만 그 깜깜한 속에서 무엇이 자라는지도 모르고 부푸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일종의 배려, 그것만이 그 사람의 진심에 정당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필'이라는 단어가 형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네'뿐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형은 정말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나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형과 만나고 싶었지만 취업 준비가 한창이었기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도 열심히 살고 있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대학원생으로서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나는 무얼 연구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처음으로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에 습격을 당했다. 그 회의감은 농도가 짙은 물감이었다. 천천히 스미는 것이 아니라 닿는 그 순간 스케치를 망치게 되는 검은 물감이었다. 한국문학은 이제 정말 공부할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를 쓴다는 건 몸으로 밀고 나가는 건데, 이제 우리에게는 그럴 몸도 없구나 싶다. 다 옛날의 낭만이구나 싶다. 글을 쓴다고 세상이 바뀔까? 목구멍에 물 한 방울 축일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려고 이렇게 큰 도시로 온 건가, 내 꿈에 비해 너무 큰 이 공간이 오히려 나를 허무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형으로부터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나 취업했어!"

     형이 그렇게 말했다. 약간은 떨리고 설레지만 최대한 침착하고 덤덤하게,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지금 돌이켜봐도 어딘가 찝찝하다. 이제 정말 잘 될 일만 남았다고 말을 하면서도 내 마음 어딘가가 아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형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형이 취업을 했는데 나는 형을 축하하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방도 구했고 논문 쓴 거 칭찬도 들었고 시도 꾸준히 응모하고 있다면서, 구구절절 내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온 연락이었고, 정말 오래도록 축하해주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때는 내가 참 후져서 그런 식으로밖에 통화를 끝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형은 종종 술을 마시면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해 왔다. 나는 그것이 퍽 좋았다. 그리고 우리 이제 정말로 얼굴을 볼 때가 됐다고 항상 말했다. 하지만 약속은 늘 엎어졌다. 서로 바빠서, 다른 약속이 꽉 차서. 이제는 서로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나 싶을 때쯤 새해가 밝아버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섭섭할 것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2월이었나, 드디어 서울 올라오고 처음으로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형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나는 가방끈이 제일 긴 학생으로. 정말 오랜만에 진창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형에게 '수영'의 논문을 주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꼭지에 형이 언젠가 다시 글을 쓰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적어서.

     형은 다시 글을 쓸까? 모른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나에게 '형'의 의미를 다르게 해주는 일도 딱히 아니다. 물론 다시 쓴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다만 그보다는 형이 살아가면서 언젠가 하게 될 또 다른 결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준 것이었다. 기대감? 물론 어떤 언어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힘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이미 흔들리고 있거나 이미 잠들어버린 인생 그 어디쯤에서 만나는 언어가 가끔 대단한 빛을 내는 것뿐이라는 편이 더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바람 한 점 없는 그 여름날 나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부푸는 마음이 버겁기만 했던 그때, 형이 했던 오래 전의 결정은 결국 옳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조금 바꾸었던 것럼 말이다.

     수영을 주제로 한 학위논문만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나의 논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제 김수영에 대한 연구는 그의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대문자적 작업보다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연구로 전향된 듯하다." 한 사람이 술을 왕창 마신 날, 집으로 가다가 뒤에 오는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드라마 같은 수영의 마지막 모습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영은 시를 쓰는 매 순간이 위기였으니까. 그때마다 항상 결정을 해야 했으니까.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선택을 해야 했고, 가장 아끼는 아내와 친구들에게 상처를 줘야 했고, 자신의 삶과도 같은 시를 위해 매번 가난해야 했다. 수영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그런 '생활'에서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운다. 지난날 형으로부터 전해온 두 통의 연락도 그런 것이었다. 수영의 시들이 아직까지 남아서 나를 글 쓰게 만들었듯, 형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나와 공유해주었기에 어쩌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형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형의 눈동자와 수영의 눈동자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 거리의 먼지 나는 길 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에서

김수영(1921-1968)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논문의 정확한 제목은 <김수영의 변증법적 공간 연구>입니다. 읽으면 논문이 으레 그렇듯, 머리가 아파오고 이내는 수영이 싫어질지도 모르니 읽지 마십시오. 연구자의 못된 사랑법이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 잠에서 깨어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