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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만한 딸이 되어

상처받은 영혼

by 글마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혼자 농사를 지으며 아직 학생인 막내 여동생과 살았다. 여자 혼자 농사짓는 게 쉽지 않은지라 나는 친정에만 가면 농사일을 도왔다. 여느 딸처럼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내가 해서 먹는 게 당연하게 굳어졌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집은 방 한 칸이 창고로 쓰이면서 온갖 잡동사니와 음식물로 가득했다. 어쩌면 엄마의 보물창고이기도 한 그 방에 나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어질러진 방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답답함이 느껴져 잔소리가 나왔고 내 말이 듣기 싫은 엄마는 지껄이지 말라며 잘랐다. 또한 먹을거리가 가득해도 내게 나눠주지 않았으며 내가 농작물이나 음식을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엄마는 내가 친정에 방문하는 걸 별로 반기지 않은 듯하다. 가면 집안일과 들일을 가장 많이 도와주고 엄마의 손발처럼 어려움을 덜어주었는데도 말이다. 늘 친정에 도움이 되거나 갈 때마다 먹을 걸 바리바리 사가거나 용돈을 드리거나 할 때만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만 들을 뿐이었다. 엄마 삶이 팍팍해서인지 단 한 번도 나를 웃으며 반긴 적도 없고 밥상을 차려놓는 경우가 없었다.


여동생이 결혼하고 어쩌다 형제들이 모두 모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식구를 위한 밥상은 없었다. 형제들이 모일 때에도 내가 주도가 되어 음식을 하고 밥상을 차리고 뒷정리까지 늘 나의 몫이었다. 언니는 시어머니와 같이 산다는 이유를 대며 쉬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언니에게는 쉬라고 하면서 내게는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듯 했다. 나는 가끔 나만 가정부처럼 일하는 게 억울하게 생각돼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엄마는 서늘한 눈빛을 보내며 나를 비난했다.


혼자 있는 엄마가 늘 마음에 걸렸던 나는 시간만 나면 친정에 갔다. 친정에 가면 대청소를 하다시피 했다. 갈 때마다 싱크대에 그릇을 정리해 놓고 한 달도 안 되어 가 보면 숟가락도 여기저기, 반찬통은 통과 뚜껑이 여기저기 따로 굴러다녔고, 냄비 또한 짝이 맞지 않은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기에 새로 설거지해 접시는 접시끼리, 밥공기는 밥공기끼리 분류별로 정리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싱크대에는 밀린 설거지가 산더미였는지라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나도 짜증이 날 때가 있었다. 남들에게는 친정이 편하게 쉬는 공간이라면 내게는 상전댁 종년이 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한참 만나지 못한 한 마을 친구와 연락이 닿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간 적이 있다.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빈 손으로 방문했는데 거실에 앉아 있던 엄마는 왔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이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손자도 본 척 만 척하는 태도에 당황했다. 남의 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 당연히 밥은 기대하지도 못했고 내가 스스로 했는데 밥을 하기 위해 뭐가 있는지 물어보면 귀찮다는 듯 짜증을 냈기에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엄마의 손과 발이 되어 성심을 다했건만 돌아온 건 '냉대'였다. 그렇다고 그런 속내를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내 자존심만 상했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나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바보같이도 엄마 바라기였다. 먹고살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자영업을 했는데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고된 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슨 날만 되면 엄마에게 용돈을 드렸고 군대 갔다 휴가 나온 남동생에게 용돈 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언니와 여동생은 줄 돈이 없다고 했고 나는 나라도 남동생에게 용돈을 줄 수 있어서 안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엄마에게 잘하라는 당부 때문이었는지 나는 내 선택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친정식구를 위하는 게 내 의무라고 여겼다. 나는 가족들에게 쓰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정작 우리 살림은 풍족하지도 않고 근검절약했으면서 말이다.


세월이 흘러 막내 여동생이 제 오빠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다. 집안의 경사인지라 며칠 전부터 떡을 맞추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바빴기에 나는 혼자 가서 음식 장만을 거들었다. 이틀을 머물며 장을 보고 맞춘 떡을 찾아오고 분주하게 일했다. 엄마가 떡을 찾아오라는데 마침 이웃 마을에 사는 사촌언니가 차를 태워달라고 했다. 떡을 찾고 오면서 잠시 들렸는데 많은 시간이 경과하지도 않았는데 엄마에게서 왜 아직 안 오냐는 전화가 왔다. 떡을 찾아서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엄마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떡 찾으러 가서 뭐 하다 이제 오냐?"라고 삿대질까지 해 나는 무안해졌다. 거실에는 전을 부쳐주러 온 마을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혔고 나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이다. 나도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십 분 정도 늦었다고 애처럼 혼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또 거기에서 엄마에게 대드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엄마는 내게 큰소리를 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고 싶었던가 보았다. 또 엄마가 미워하는 사촌언니에게 차를 태워준 것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큰일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일 도와준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줄 요량으로 사놓은 양말을 내게 내놓았다. 나는 그것조차도 미안해 사양했으나 엄마는 내게 양말을 선물이라며 쥐어줬다. 어쩌면 내가 엄마에게서 받은 첫 선물과도 같은 양말을 받고서도 미안해했다.


어느 해인가는 언니에게 보낼 김장을 해야 한다며 같이 하자고 해서 젓갈을 사서 갔는데 가기 전에 엄마가 김치 속에 넣을 미나리와 깐 쪽파를 사 오라고 했다. 마트에 갔는데 하필 깐 쪽파가 없어서 하는 수없이 흙쪽파를 사갈 수밖에 없었다. 장 본 물건을 들고 내리는데 엄마는 왔느냐는 인사 대신에 대뜸 "깐 쪽파 사 오랬더니 왜 흙쪽파를 사 왔냐?"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느닷없는 엄마의 고함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화가 났다. 자식이 왔는데 어떻게 왔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고함부터 지르느냐고 마트에 몇 군데를 가도 깐 쪽파가 없어서 그냥 사 온 거라며 말하고 속으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참고 김장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친구들에게 저녁 먹자는 전화가 왔고 잠시 나갔다 오려고 하니 엄마가 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성질을 있는 대로 냈다. 말인즉슨 아침도 안 먹고 배추 다듬느라고 고생했는데 엄마 혼자 두고 친구들과 밥 먹으러 나가려고 하느냐며 나를 나쁜 자식으로 내몰았다. 결국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하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함지박 가득한 마늘과 많은 양의 생강을 절구에 찧느라 밤늦도록 일해야 했다. 다음날 김장을 버무리는데 친구들이 들러 잠시 도와줬다. 김장을 해서 반 넘게 언니에게 택배 보내려는 광경을 보고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애써서 담은 김장을 언니에게 절반 넘게 보내는데 왜 이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나는 김장을 따로 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김장을 담가서 다른 자식들에게는 모두 택배로 보내고도 내게는 김치 한 포기 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엄마에게 바라는 게 없었지만 다른 자식들과 차별하는 게 섭섭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미워하도록 했는지 엄마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토록 나는 오직 엄마 생각을 하고 내가 가진 걸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건만 돌아온 것은 무관심과 냉대였다.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는 그토록 모질고 냉정하지 않았는데 내게만 유독 심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의 태도였기에 그 마음에 의문이 가면서 괴로웠다. 왜 날 그토록 미워했는지,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엄마를 대했건만 내게 돌아오는 마음은 없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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