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아기처럼 의지하는 엄마
내가 아플 때 나는 엄마에게 아프다는 표현을 잘 안 했다.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건 '왜 아프냐?'는 질타와 힐난이 이어졌기에 속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늘 아팠다. 특별한 병명도 없이 자리보전하기 일쑤였고 '아픔'은 엄마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때도 몸조리에 대해 "너 시집에 가라."라며 선을 그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심리적이든 물질적이든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에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그런 낌새가 보일 때면 미리 벽을 쳤기에 내 의식에는 엄마는 들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큰 병에 걸리지 않아도 아플 때면 자연히 '엄마'가 떠오르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감기몸살로 아무리 아파도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말해도 들은 둥 마는 둥 무관심했기에 포기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고비가 있을 때나 같은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애환을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도 무조건 비난하고 화부터 냈기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친구들을 보면 엄마와 친구처럼 허물없이 사소한 것부터 심도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게 엄마로서 나를 품어주지 않았지만 반대로 내가 엄마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으며 실제로도 많이 의지했다. 결혼 전에도 아프다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SOS를 보냈고, 나는 내 힘이 닿는 한 해결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혼 후, 자영업에 매달리느라 밤잠 못 자고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엄마는 감기만 걸려도 내게 전화해 아이처럼 울먹였다.
"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흑흑흑..."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울부짖음에 놀란 나는 왜 우냐고 물었고 엄마는 더욱 흐느끼며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다. 죽을 것 같다는 그 말도 입버릇처럼 계속 되어 못 들어도 만 번은 넘게 들은 것 같았기에 나중에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동화가 연상되었다. 처음에 화들짝 놀라던 것이 반복되며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 한숨 못 자고 고향으로 달려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고, 엄마가 응급실에 가 있으면 달려가서 다른 병원으로 모시기도 했다. 아프거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나만 찾았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아버지가 당신 죽고 나면 둘째에게 가."라고 말했다며 엄마가 나를 찾는 핑계와 정당성을 부여했다. 나는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었더라도 엄마의 도움을 거절한 적이 없다. 오 남매 중 엄마가 그토록 위하던 아들은 바쁘다는 걱정으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맏딸은 엄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도 여러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년 뭔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내가 감당해야 되었고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도 당연시하게 되었다.
잠 한숨 못 자고 엄마를 병원에 모시느라 몹시 피곤했지만 내가 그런 내색을 하면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하지 않았는데, 정작 엄마는 그런 내게 잠 못 자서 어떡하느냐는 걱정의 말이나 미안해하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 일반병원보다 한방병원을 선호하는 엄마의 기호에 맞춰 한의원에 일주일씩 입원을 시킨 적도 있다. 단순한 감기 때문이었는데 한방병원에 입원하면 뜸을 떠주고, 물리치료, 침 시술, 한약이 제공되었기에 엄마는 아주 만족한 듯 보였다.
일주일 내내 나는 피곤함을 무릅쓰고 엄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병원에 방문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을 사서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땐 나도 젊었기에 그게 가능했던 것 같다. 언니나 동생들이 전화 한 통 없고 병문안 한 번 오지 않아도 어려운 사정이 있겠거니 여기며 나라도 엄마를 보살필 수 있어서 안도했다.
엄마의 상태가 호전되어 일주일이 지난 후 퇴원하려고 절차를 밟는데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활발하던 엄마가 갑자기 병상에 픽 쓰러지듯 누웠다. 왜 그러냐니까 갑자기 아프다면서 퇴원하기 싫어하는 게 역력했지만, 큰 병이 있는 게 아니기에 병원에서도 퇴원을 여러 차례 권유한 터였다. 갑자기 돌변한 엄마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퇴원해 집에 모셨다. 죽을 끓여드리고 안방을 내어주고 약까지 일일이 챙겼지만 퇴원한 엄마는 계속 환자 코스프레하는 듯 비쳤다.
이후에도 여러 번 아프면 내게 전화해 언제나 아이처럼 울었고 그런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아이를 읽었다. 엄마는 나를 자식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마치 엄마에게 하듯 어린아이가 되었다. 조금만 아프면 어리광하듯 울어대는 통에 나는 울지 말라고 달랬고 어른이 아이처럼 우는 게 괴이쩍게 여겨졌지만 아프다니 보살피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나 맏딸은 단 한 번 엄마를 책임진 적이 없었기에 가장 바쁜 내가 뒤처리를 도맡다 보니 정작 내 아이를 잘 보살피지도 못했고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시댁은 시댁대로 형님이 있어도 제사나 명절에 오지 않았기에 그 담당 역시도 혼자 다 도맡아야 했다. 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다는 푸념을 혼자 하며 나는 양쪽 집안에 맏이 아닌 맏이 노릇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몸살이 나고 부족한 수면과 과로에 시달렸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피곤하지 않느냐는 배려조차 받지 못했다. 몸살이 나 아파도 혼자서 제사음식을 도맡았고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그런 고달픔 속에서도 나는 왜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는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지, 힘들어도 참는 게 여성의 삶이자 내 역할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참을성이 부족하고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채찍질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중에도 억울함은 자연스레 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 참을성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지만 그땐 젊어서인지 견디는 것이 능사인 줄 알았다.
쓰러지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해내야 한다고 여겼다. 그나마 시어머니는 시댁 행사를 도맡아 하는 내게 가끔 미안해하는 말씀이라도 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워야 할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원망만 돌아왔다. 언니와 동생들에게 잘살면서 돈 쓰지 않는다는 험담이 메아리가 되어 내게 돌아왔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의가 당연시되고, 배려가 권리가 되는 아이러니에 나도 실망스럽고 배신감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에 내 한숨은 짙어갔다.
동생들은 나중에 내게 노골적으로 엄마의 주문을 다 들어주지 말라는 조언을 해줬다. 아무리 해줘도 몰라주고 욕만 먹는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바로 밑에 여동생은 "나는 언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하며 내가 엄마에게 잘하는 것은 바보밖에 되지 않는다고 일침 했다. 그 말에 어떻게 부모를 모른 척할 수 있느냐, 그러면 내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다고 했으나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동생들이 내게 했던 말이 공연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는 그런 말하는 동생이 참 냉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판단했을 것이다.
동생들은 내게 말했다. 언니가 희생하다시피 엄마에게 잘하는 것이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발로라고. 엄마에게 사랑 받지 못한 결핍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잘해줌으로 감동받은 엄마가 언니에게 사랑을 약간이라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심리가 내재되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라고. 엄마는 바뀌지 않을 거니 더 이상 상처받지 말고 나의 삶을 살라고 한다. 그런 말에 나는 대가를 바라서 엄마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섭섭할 때도 있지만 늙은 엄마를 보면 안 된 마음이 커서 도저히 외면 못하겠노라고. 그런 말이 오랜 시간 반복되었고 나도 이제는 예전처럼 엄마에게 올인만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난처한 것은 내가 어릴 때든, 성인이 되어서든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기대지 못했는데 아프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가 따뜻함을 받지 못했기에 아주 살갑게 엄마를 달래지는 못해도 외면한다든지, 나무라지는 않지만 그 모습을 보는 건 '난감함'이다. 꼭 저렇게 아이처럼 울어야만 하나, 울면서 아이처럼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어릴 때 부모에게 사랑받아보지 못한 결핍이 엄마를 어린아이로 만든 것인지 의아함. 내가 안긴 적이 없기에 엄마를 포근히 안아줄 수 없는 그 어색한 분위기. 그 시간이 불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자식인 나를 한 번도 따뜻하게 보듬지 않았는데 당신에게는 따뜻하게 위로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지난번 코피 사건으로 알게 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엄마를 귀해하고 아끼고 따뜻하게 품어주기까지 바라는데, 내가 그렇게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실행하는 게 어색해 그런 순간이 적응하기 어렵다. 그런 감정을 다 넘어서서 품어줄 수 있는 너른 마음을 가지기에는 아직 소양을 덜 갖춘 것인가. 내게는 여전히 잔재처럼 남아 있는 죄책감이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