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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정부 취급하던 엄마

나도 귀한 사람이고 싶다

by 글마루

내가 엄마의 마음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은 내 아이가 자라면서이다. 시대적인 분위기나 세대 차이일 수도 있으나 나는 아무리 아파도 드러눕지 않았고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쉬는 날 하루 없이 일하면서도 너무 바빠 제대로 된 밥을 못 챙겨주고 살뜰히 못 보살피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 한쪽은 늘 아팠다. 자식에게 집안일 돕기를 원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잘 자라기만 바랐다.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에 취업해 엄마는 60세부터 농사일을 하지 않고 텃밭만 가꿨다. 없는 형편에 빚내어 대학 보냈고 남동생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엄마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주게 되었다. 남동생이 우리 집에서 학교 다닐 때 내가 애쓴 것은 괜찮은데 풍족하게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늘 내 마음속을 맴돌았다. 지금도 그때 남동생과 내가 핍박받으면서 울먹인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동생이지만 자식 같은 남동생이 연구원으로 취업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정작 고등학교는 내가 보냈건만 엄마는 자신이 죽을 고생 해서 대학 보냈고 당신 고생 덕분으로 아들이 잘된 거라며 스스로 공치사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남동생도 방 얻을 돈이 없어 pc가게 구석에서 한참을 기거하며 컵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했으니 어떻게 보면 모든 가족들이 고생을 했다고 봐야 한다. 술 담배도 안 하는 남동생이기에 금방 돈을 모아 오피스텔을 샀고 우리 가족은 오피스텔을 구경할 겸 대전에 방문했다. 복층으로 된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이만큼이라도 이루어 가는 남동생이 기특해 그리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는 늘 한쪽 가슴에서 슬픔이 소리 없이 묻어 나왔는데, 공부에 집중해야 할 나이에 누나 부부의 불화를 목격하고 매형의 구박과 눈치를 보며 불안했을 남동생 생각에 울컥해지곤 했다.


그런데 남동생을 대학까지 책임 못 졌다는 그 말을 엄마는 잊을만하면 꺼내며 나를 원망하듯 말했기에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불편했다. 수없는 비난의 말을 들으면서도 섭섭하기보다 미안함이 컸던지라 나는 죄인처럼 슬퍼해야 했다. 만약 남동생이 어엿한 직장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저릿한 것이 괴로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잘되길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또한 잘되니 무시당하지 않지, 직장을 못 구한다든지 수입이 변변찮으면 남편의 비아냥과 무시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 가슴 조마조마했던 지난날을 지나 남동생 덕분에 나는 좀 당당할 수 있었다. 최소한 무시는 덜 당했기에.


오피스텔을 구경하고 맛있는 일식집에서 남동생이 식사를 대접해 줬다. 그리고는 큰 조카인 아들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백화점에 가서 후드티셔츠를 한 벌 사줬다. 남동생은 원래도 순한 성품이었고 말은 안 했지만 누나가 고생해서 뒷바라지한 걸 알기에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옷을 한 벌 사고 신발을 사줄까 묻는데 뒤따라가던 엄마가 옷 샀으면 되었지 신발까지 사냐면서 자신의 돈을 쓰는 양 아까워했다. 그것도 여러 번 눈총을 주며 대놓고 돈 많이 썼다며 그만 사주라고 하는데 한눈에도 아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남동생도 자식이고 나도 자식이고 처음으로 큰 마음먹고 인심을 쓰는데 계속 구시렁거렸다. 나중에 신발 한 켤레를 더 사주긴 했지만 엄마의 아까워하는 내색을 보자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나도 남동생에게 뭘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엄마가 너무 대놓고 표현하니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한편 처음으로 조카인 아들에게 남동생이 정을 나눠주니 많이 흐뭇하긴 했다.


아버지의 첫제사는 언니 내외와 우리가 함께 지내고 그 이후부터는 언니가 한두 번 챙기다가 거의 내가 챙기게 되었다. 아버지의 제사를 챙기지 않으면 자식으로의 도리를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아버지의 제사음식을 내가 장만해 올려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만큼 나는 그걸 당연하다 여겼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남동생이 제사 지내러 오긴 했지만 음식 장만은 거의 내가 맡아서 했다. 나도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부랴부랴 장을 봐서 친정에 가서 전을 부치고 나물을 장만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내가 시댁 명절이나 제사를 혼자 들고 지낼 만큼 조리에 능숙한데도 옆에서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게 못마땅한 듯 눈총을 주기도 했다. 너무 힘들어 잠시 쉬고 있는데 5분이나 되었을까. 음식 준비는 내게 맡기고 밖에만 왔다 갔다 하던 엄마가 쉬고 있는 내게 남동생이 곧 있으면 온다며 빨리 준비하라고 눈총을 줬다. 나는 너무 힘들어 잠시 쉬었다가 할 거라고 하자 쉴 시간이 어디 있냐며 빨리 장만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 말투가 나를 배려하는 건 하나도 없고 부려 쓰는 파출부 대하듯 했기에 너무 섭섭해 어떻게 잠시 쉬지도 못하게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엄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왜 말을 듣지 않냐? 이러려고 집에 왔냐?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하다."

라고 노여워했다. 소리를 지른 것은 엄마인데 왜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하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고 엄마는 밖으로 나가더니 누군가에게 통화를 하고는 집에 들어와서 나를 본 척 만 척했다. 이미 탕국까지 다 끓여놓고 밥만 퍼면 되는지라 나는 엄마가 딸을 일하는 도구로만 여기는 것 같아 너무 서러워 눈물이 나왔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왔건만 자식이 아니라 가정부 취급을 당한 것 같았다.


끝까지 아버지 제사를 다 모시려고 했지만 한 번 폭발한 엄마가 그냥 있을 리 없는 줄 알기에 나는 남동생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하고는 울면서 차를 몰았다. 집에 간다는 내게 엄마는 가지 말라는 말도 가느냐는 말도 없이 못 본 척했다. 나는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너무 서러워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필요할 때만 써먹고 버리는 도구인가?라는 의문에 다시는 친정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중에 남동생이 전화가 왔고 내 아픈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영어책을 선물로 보내줬다. 엄마가 하는 말에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과 누나 마음 안다는 위로를 해줬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개인적 사정으로 형편이 아주 어려울 때였다. 어쨌거나 남동생 고등학교를 보냈으니 결혼할 때는 한복이라도 한 벌 해주겠거니 여겼다. 뭘 바라서가 아닌 내겐 아들 같은 남동생이기에 한복을 입고 싶었다. 결혼할 때 맞춘 한복은 너무 오래돼 입을 수 없었다. 올케에게 예단비를 많이 받은 엄마는 돈이 없다며 자매들에게 예단비로 십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올케가 예단비를 얼마 줬는지 알고 있는 나는 엄마의 처사에 어이가 없었다. 엄마도 돈이 없어 한복을 안 맞추고 빌려 입겠다고 했다.


이십만 원이면 좋지는 않지만 저렴한 한복 한 벌은 할 줄 기대한 나는 엄마에게 많이 섭섭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만은 고생했으니 고급은 아니라도 한 벌 해 입으라고 할 줄 알았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때만큼은 그래야 한다고 여겼는데 결혼식 준비로 통화할 때면 돈 없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아들 장가보내면서 목돈을 쥐겠다는 것인지, 장삿속이 다 보여 만정이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예단비 십만 원 받지 않고 부조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복을 빌려 입겠다는 엄마는 한복을 맞춰 입었다. 한 해 전 여동생이 결혼할 때 맞춘 한복이 있었는데도 새로 맞춘 것이다. 내게는 돈이 없어서 빌려 입는다고 했는데 그걸 보자 엄마가 미웠다.


그동안 내가 친정에 돈 보내준 게 얼마이고 나는 엄마 걱정, 친정 걱정으로 내가 가진 걸 다 내놓다시피 했고 남동생 데리고 있느라 시댁에 있는 구박 없는 구박, 조선시대 며느리처럼 시집살이를 했는데도 말이다. 같은 여자로서 나의 그런 난처함과 속앓이를 안다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엄마가 남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난 엄마에게 돈 갖다 바치는 기계였구나라는 배신감에 떨었다. 훗날 올케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 예단비 받았냐고 묻기에 받지 못했다고 하자 올케는 예단비를 넉넉하게 보냈는데 형님들에게 한 푼도 안 줄지 몰랐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임신한 올케는 금방 배가 불렀고 마침 혼자가 된 나는 명절에 며느리 대신 일하는 일꾼이 되었다. 시집간 딸은 손님 대접하던 시댁과는 달리 나는 시댁에서도 죽도록 종처럼 살았고, 친정에서도 종처럼 부엌데기가 되었다. 나는 몸이 무거운 올케를 돕고 싶은 마음에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 장만을 했지만 그런 딸을 가정부처럼 부리는 엄마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직접 산 싱싱한 포도를 세 상자 보내면서 내게는 엄마가 먹다가 시들어 쭈글쭈글한 포도 몇 송이를 가져가려면 가져가라고 했다. 너무 눈에 띄는 차별에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올케에게 못 볼 꼴을 보이는 것만 같아 속으로 삼켰다.


그런 섭섭함을 속으로 삭이느라 내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늘 고향이 그립고 엄마가 걱정돼서 자주 찾아갔다. 과일을 사가도, 나는 엄두가 안 나 사 먹지 못하는 소고기 구이를 사가도, 엄마는 같이 먹자는 말 한마디 없이 부엌에 넣고 문을 닫았다. 나는 어느새 택배기사가 되어 있었다. 혼자 있는 엄마를 외면하지 못해 자주 드실 것을 사서 갖다 드렸다. 나중에는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현관문만 열고 음식만 놓아두고 왔다. 엄마는 들어오라는 말도, 밥 먹었느냐는 말도 없이 내가 사다 주는 음식은 고맙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했고, 돌아오려고 차에 타면 언제 문을 닫고 들어갔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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