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증의 실타래

끊을 수 없는 핏줄의 연결

by 글마루

또다시 몇 년을 섭섭함과 야속함을 느끼면서도 이미 마음에 들어찬 엄마에게로 나는 틈나는 대로 달려갔다.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면 허전함에 괜히 왔다는 생각으로 돌아오며 다음에는 가지 않아야지 다짐했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또 생각 나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고기를 사들곤 친정으로 향했다. 내가 사 가는 음식을 엄마는 한 번도 같이 먹은 적이 없었는데 나는 원래부터 그런 엄마를 봐왔는지라 별로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친구들이나 다른 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뭔가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엄마가 이가 안 좋다고 하면 토마토나 수박을 잘게 썰어 드시기 좋게 드렸고 친정 가면 해놓지 않은 설거지를 하고 밭일을 돕곤 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돕는 데도 엄마는 농작물 하나 챙겨주지 않았다. 동네에는 포도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우리 땅을 도조 주니 포도가 여러 상자 들어오고 다른 집에서도 포도가 넘치도록 들어왔지만 곯아서 못 먹고 버려도 나는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섭섭하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은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엄마는 원래 그렇다는 인식이 내 내면에 자리 잡았고 그럼에도 나는 자식이니 엄마를 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십 년 전에는 남동생이 비행기 표를 끊어주기는 했지만 내가 모든 경비를 부담해 엄마와 단둘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엄마는 엄마에게 도움이나 이득이 될 때 그 순간은 흐뭇한 모습이었으나 그때뿐 늘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식 중에서도 가장 많이 찾아가고, 가장 많이 엄마를 챙겼음에도 가장 무관심한 자식이 되었고 나를 너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게 눈에 띄자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끊었다. 게다가 동생들에게 고향 동창들과 어쩌다 연락하는 것을 불륜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고향에 찾아가는 친구들은 성격 좋은 남자 동창과 연락하고 가끔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데도 이상하게 보고 또 그런 말로 인해 나는 엄마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로 인해 이 년 정도 발길을 끊었다.


아래는 이 년 정도 지난 후 엄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글이다.


애증의 실타래

2018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런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무의미해질 정도로 나이가 들었음인지 나는 언제인가부터 그런 문자조차도 보내지 않는다. 긴히 꼭 인사를 차려야 될 어른이 아니면 모른 채 지나간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저 마음으로 인사를 건넬 뿐이다. 작년의 마지막 밤을 포도주와 단둘이 보내고 나니 생이 외롭고도 쓸쓸했다.


그전부터 다녀오마고 벼르고 별렀던 아버지께 가기로 했다. 급한 일도 없으니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사우나 가자는 친구의 문자에 다녀와서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새해도 바뀌었으니 이참에 몸과 마음에 켜켜로 쌓인 묵은 때를 벗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실로 몇 년 만에 아버지께 향하는 걸음이었지만, 열없는 속내를 들키기 싫어 일부러 미적대었는지 모른다. 빌미를 대기가 좀 좋을까. 새해 목욕재계라니.


1시간을 넘게 달려 고향에 도착하니 잿빛의 산그늘이 벌써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곳에서 내가 태어나서 자랐다. 산 아래에 마을을 끼고 가운데로 들이 펼쳐진 곳. 넓지 않은 들이건만 어린 내 눈에는 넓은 평야 같았던 들판이다. 지금도 어린 내가 신작로를 뛰어다니는 환영이 보이는 고향은 늘 그리움을 불렀다. 시골에서 태어나 흙에 뒹굴며 자랐어도 여전히 흙이 좋은 나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긋지긋할 법도 하건만 그 고생스럽던 고향을 나는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아무도 반기는 이 없지만 늘 달려가고 싶은 고향을 나는 짝사랑해 왔다. 평생 엄마를 짝사랑한 것처럼 고향도 엄마처럼 조건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내 어린 날의 추억이 담겨 있어서다. 낯선 집을 방문하듯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친정집 현관을 당기니 잠겨있다. 친정엄마께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마을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아버지 누워계신 자리로 걸어가는데 맵싸한 바람이 내 콧속을 할퀸다. 홀로 걸어가는 발자국에 쓸쓸함이 묻어 발치에 떨어진다. 나는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만 떠올린다. 한 걸음 두 걸음 산소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에는 야릇한 회한만이 맴돈다.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둘째 딸을 맞으실까. 이미 돌아가신 지 20년도 더 된 분의 심사까지 짐작한다는 것은 마음에 켕기는 무언가가 있다는 방증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반기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벌써 그림자는 온 마을을 삼키고도 남을 듯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겨울 해가 가파르다.


산소에 다 오르기 전, 몇 해나 방치되다시피 한 묘소에 봉분이 우뚝하다. 누군가 손을 본 모양이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희미했던 봉분의 흔적. 뉘 집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쓸쓸한 무덤이 번듯해 보이니 서글픔이 한결 덜하다. 별로 가파르지 않은 산비탈이 얼어붙어서인지 미끄러웠다. 나는 혹여 미끄러져 다치면 누가 와줄 것 같지도 않은지라 조심조심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가물가물 아버지 봉분이 보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밀물처럼 솟구친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이 화수분처럼 그칠 줄 모른다. 적막하기만 한 산 중턱에는 내 흐느끼는 소리뿐. 한참을 훌쩍거리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니 아버지는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신다.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드리고 오징어를 놓고 절을 했다. 슬픔은 다시 올올히 차올라 나를 서러움의 계곡으로 밀어 넣는다. 내 외로운 심사를 아버지가 알아주실까. 소주를 산소 둘레에 부어드리고, 잔을 채우고 다시 두 번 절을 올렸다.

“아버지, 저 왔어요. 정말 죄송해요. 못난 딸, 그렇지만 아버지 도와주세요. 아버지 저 이제 예쁘게 잘 살게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애써 누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모처럼 찾아뵌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직접 본다면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울음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웃음을 짓는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다행히 산소는 말끔했다. 바람은 시어미 시집살이보다 더 매워지고 앞산 중턱에서 바라본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처럼 휑했다. 겨울이라 풀잎도 누운 자리에 나뭇가지만 앙상했다. 나는 누가 쫓아내기라도 하듯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사 간 귤을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돌아섰다. 그간 통 기별이 없었으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남동생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 않는다. 몇 년 척이 진 모녀 사이는 오늘도 회복하기는 글러버린 모양이라고 속단했다. 아버지께라도 인사드렸으면 그만이라며 애써 자위하며 차를 돌려 용바위 재를 넘다 전화기를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친정엄마였다. 야속한 마음에 수신 거부를 한 상태라 전화벨이 울렸을 리 만무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돌아간다니 다시 돌아오라 신다. 마을 회관에 계시느라 이야기 소리에 전화 오는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핸들을 꺾어 가던 길을 되돌아갔다. 회관 앞에 차를 세우니 낯익은 모습의 노파가 나타난다. 전보다 크게 연로하지 않은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서신다. 늙은 엄마를 보는 마음에 물기가 서린다. 그 서슬 퍼렇던 성미도 세월 속에 무뎌졌던가. 엄마를 태우고 친정집으로 향한다. 20년 전에 지은 친정집은 관리가 안 되어 갈수록 엉성하다. 벽지는 말라가는 논바닥처럼 떡떡 갈라지고 높다란 천정에는 거미줄이 경쟁하듯 줄을 쳤다. 방바닥이 엄마의 쇠잔한 기운만큼이나 미적지근하다.


친정엄마는 곶감을 주겠다며 전지가위를 들고나가시더니 주섬주섬 비닐봉지에 채 덜 마른 곶감을 담아왔다. 하나를 집어서 맛보라고 내민다. 나는 즐기지도 않는 곶감을 받아 한 입 베어 문다. 맛있다는 내 말에 갑자기 엄마는 나를 감싸 안았다.

“엄마가 미안하다.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 해 정말 미안하다. 네가 내게 열 개를 해줬다면 나는 네게 하나도 해준 게 없어.”

라고 울먹인다. 나도 순간 핑하고 눈물이 돈다. 애정이 변해 애증으로 굳어진 시간. 돌덩이처럼 굳어진 내 마음은 나도 어쩌지 못했다. 서운함은 속상함을 넘어 원망으로, 원망에서 미움으로, 급기야 미움에서 증오로 탈바꿈했다. 눈덩이처럼 커진 서운함에 나는 주저앉았다. 다시는 엄마를 보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골은 너무나 깊었다. 핏줄이라는 명분만으로 엉킨 실을 풀어내기에는 지나온 강이 너무나 깊었다. 내가 친정을 위해 바친 시간과 정성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무시당했을 때의 심정. 내가 한 희생을 다 아시면서 내게 야멸차게 대하셨던 친정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멀어졌다. 그건 남에게 받은 상처에 비하면 너무나 폐부 깊숙이 새겨졌기에 나는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렸고, 사람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내게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서러움은 세상에 나 혼자 팽개쳐진 듯 나는 절규했다.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과 나를 꼭 안으며 어루만지는 손길로 인해서 그간의 증오는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엄마에게 안긴 것이다. 우리 엄마도 포옹할 줄 아는구나. 지나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엄마에게도 따뜻함이 있었다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내가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한 것도 따지고 보면 관심받고 싶은 심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엄마의 품과 정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맏딸과 외아들만 위하는 것 같은 엄마의 처사에 나는 속상하기만 했다. 내가 볼 때는 효도하는 자식 따로, 사랑받는 자식 따로인 것만 같았다. 나 같은 효녀가 어디 있다고 왜 엄마는 나를 몰라줄까 하는 야속함은 수십 년 도랑을 넘고 내를 넘어 거친 물살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미친 듯이 흘렀다.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 연락 끊기였다. 그건 투정이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냉정함에 똑같이 맞서기로 한 것이다. 결국 전에도 몇 번의 사과를 받아내기는 했다. 그렇지만 조금만 곁을 내주면 다시 도돌이표였기에 이번에는 공백기가 좀 길었다. 누가 엄마를 이겨 먹기 위해 그랬을까마는 나도 잘한 것은 없었다.


세대에서 오는 가치관의 차이는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배움까지 짧으니 기껏 표현한다는 것이 ‘다른 집 여자들은 두들겨 맞고도 잘만 참고 살더라.’였다. 도대체 나보고 어찌하라는 것인지. 왜 나를 가엾게 보지 않는 것인가. 그동안 내 고통을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상처 난 데 소금 뿌리는 저의는 뭘까? 내게 혈육의 정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나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넘어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만 같았다.

엄마도 속상했을 것이다. 별 탈 없이 잘살면 좋으련만 몸 고생 마음고생하며 결국 불행하게 마감된 내 20년 결혼생활.


“그렇게 착했던 네가 어쩌다가…….”

끝끝내 말을 잇지 못하신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야 말해 무엇할까. 삶 자체가 고통이라 여기며 고통 속에서 잠시 느끼는 기쁨이 행복이라고 스스로 자위하지 않았던가. 엄마의 삶도 고생으로 점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라는 속설 때문일까. 지나 보니 엄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칡넝쿨보다 더한 증오의 얽힘은 팽팽한 줄다리기였는지 모른다. 어느 한 사람이 잡았던 것을 놓는 순간 엉켰던 응어리가 탁하고 풀어진다. 꼬일 대로 꼬여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애증의 실타래. 내세울 게 없어서 모녀지간에 자존심을 내세웠는지. 이런저런 안부를 전하고 잠시지만 그간의 껄끄러움을 풀었다. 또한 끊는다고 끊을 수 없는 게 혈육의 정이다. 잘잘못을 떠나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니 묵은 때를 벗긴 듯 홀가분하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엄마 마주하는 게 껄끄러워 향하지 않았던 발걸음. 뒤엉킨 실타래를 풀었으니 이젠 자주자주 마음에 시동을 걸어줘야겠다. 엉킨 감정의 매듭을 풀어봤으니 다시 엉켜도 풀기는 한결 수월할 터. 마음의 무거운 짐을 조금 벗어놓았으니 봄눈이 녹듯 고향을 향하는 발걸음도 한결 사뿐하지 않겠는가.

keyword
이전 26화나를 가정부 취급하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