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담긴 밥상
엄마는 마흔도 되기 전부터 자주 아프고 자리보전하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능력도 부족하고 일머리가 부족해 고생을 많이 시켜서 엄마가 고생했다는 사연을 듣고 어린 나는 엄마가 몹시 가여웠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는 농사일도 하지 않고 허구한 날 낮잠만 잤다고 한다. 전적으로 엄마의 말만 신뢰한 나는 그때부터 무조건적으로 엄마 말이 진리였다. 엄마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이기에 꼭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반면 아버지는 엄마를 힘들게 한 미운 대상이 되었다.
세 살 무렵엔 아버지와 다툰 엄마가 가출한 적이 있다. 우리 세 자매만 남겨지자 아버지는 배고프다는 우리에게 밥을 해줬다. 반찬은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어 끓인 감잣국 한 가지. 밥은 뜸이 덜 들어 반만 익었고 감잣국은 매웠다. 뜸이 덜 든 밥을 내놓으며 우리에게 겸연쩍게 웃음 지으며 맛없어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우린 아버지의 정성을 반찬으로 먹었다. 설 익은 밥, 매운 감잣국이지만 그 밥을 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설 익은 밥을 내놓으며 우리에게 미안해하는 모습과 정성을 느껴서인지 내겐 그리움으로 기억된다. 나중에 감잣국을 끓여보았지만 맛이 없었고 그때 아버지가 해준 감잣국이 가장 맛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늘 웃어줬기에.
엄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립지만 돌이켜보면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큰 것은 사실이다. 중학교 때부터 워낙 들일과 살림을 많이 하다 보니 그 고생스러움이 크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예전의 일은 멀고 최근의 일은 가까워서 더 선명할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1~2학년 때는 감자를 볶아서 도시락을 싸주기도 하고 잔멸치를 볶아서 반찬으로 싸주기도 했다. 몇몇 섭섭했던 기억 때문에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고 여겼고 눈치를 본 기억으로 인해 보살핌을 못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찹쌀 새알을 빚어 미역국에 넣으면 '생떡국'이라는 음식으로 불렸는데 겨울에 그걸 먹은 기억이 있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고 엄마는 부엌에서 가마솥에 생떡국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강했는데 많이 먹고 싶은 욕심에 엄마에게 많이 달라고 했다가 눈 흘김 받고 '망할 년' 소리를 들었는데 맛있는 것을 먹을 기대로 설레다가 엄마의 꾸중을 듣고 눈치 보며 속상했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많이 달라고 했을 때 "그래, 많이 줄 테니 많이 먹어라."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생떡국을 먹으며 서러움까지 같이 먹은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면 괜찮은데 "가만히 있으면 더 줄 것을 욕심을 부리냐?"라며 먹는 내게 또다시 핀잔이 쏟아졌고 나는 울음과 분노와 서러움을 함께 꾸역꾸역 삼키며 나도 똑같이 엄마를 쏘아보았다.
그런 내 눈빛을 본 엄마가 또다시 나를 야단쳤고 보다 못한 아버지가 "거 왜 애한테 그래?"라고 화를 낸 다음에 엄마 표정도 시무룩해졌다. 우린 늘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나무라면 아버지가 나를 감싸줬고 엄마는 그런 나를 더욱 미워하는 악순환. 그래서 어릴 때는 아버지는 친아버지이고 다른 데서 나를 낳아 데리고 온 줄 알았다. 그래서 그토록 엄마가 나만 미워하는 것은 아닌지 수많은 고민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도 속상함과 서러움은 잠깐이고 나는 농사일로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을 많이 했다.
어느 해인가는 칼질도 잘 못하면서 친척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무를 채 썰어 무생채를 무쳐놓기도 했다. 칼질하는 게 무섭고 다칠까 봐 두려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 밑바닥에는 농사일로 고생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기 위함이 컸다. 어쩌면 나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니 잘하는 내게 일을 더 시켰을 수도 있다. 성인이 되어 속상한 마음에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건 아닌지 의심을 했었다고 하자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악을 쓰며 "그래 나는 못된 계모다!"라며 어디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며 그런 생각이 들면 앞으로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고 오지도 말라고 했다. 그 뒤 우리는 침묵에 휩싸였고 그 한마디로 엄마에게 수도 없는 잔소리와 일장연설을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나를 위한 따뜻한 밥상을 받은 기억이 적을 뿐, 우리 가족을 위해서 엄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여름이면 애호박을 채쳐 들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쳐줬는데 그 고소한 맛을 잊을 수 없다. 또 소풍날이면 김밥 싸는 것을 빼놓지 않았는데 그 가난한 집에서도 다른 건 몰라도 김밥은 빼놓지 않고 싸줬다. 내 기억에 김밥은 엄마가 해준 김밥이 가장 맛있었던 것 같다. 우리보다 잘 사는 집 아이들도 김밥 대신에 양은 도시락에 맨밥을 싸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소풍 때 김밥을 가져오지 않은 그 아이를 나는 무척 안 됐게 여겼다. 달걀지단에 단무지, 시금치, 분홍소시지를 구워 속에 넣고 쌀밥에 소금과 들기름으로 양념한 밥을 펴 김밥을 말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 되었다.
또 맛있는 음식을 꼽으라면 칼국수이다. 칼국수는 엄마가 밀가루를 손수 반죽해 밀었는데 둥글넓적하던 밀가루 반죽이 밀대로 한 번 밀 때마다 반죽은 쭉쭉 늘어났다. 몇 번을 밀고 당기고 나면 얄팍한 반죽이 되었고 그걸 돌돌 말아 썰어 주섬주섬 흩트리면 칼국수 가락이 되는 것이다. 칼국수 자르면서 양 귀퉁이 남은 꽁다리는 우리 차지였는데 우린 그 꽁다리를 늘 기다렸다. 숯불에 구우면 빵처럼 된 것을 맛있게 뜯어먹었다. 국숫발이 완성되면 맹물을 넣어 끓였는데 감자를 채치거나 애호박을 채치기도 하고 호박잎을 북북 뜯어 넣기도 했다. 한여름 저녁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먹는 칼국수는 매우 맛있었다.
그건 어릴 때 일이고 자라면서는 점점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이 담긴 따뜻한 밥을 나는 큰엄마에게서 더 받았는지 모른다. 신경질과 화를 잘 내는 엄마보다 늘 근엄하지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큰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평생 우리 집안을 이끌었다. 할아버지를 모시며 지극정성을 다했고 정작 당신은 정구지(부추)만 넣은 멀건 된장국으로 부엌에 쪼그리고 드셨다. 내가 큰집에 무슨 심부름이라도 가게 되면 큰엄마는 꼭 나를 곁에 앉히고 밥을 권했는데 불 때고 남은 숯불에 삼발이를 걸쳐놓고 끓인 된장찌개와 밥 먹던 모습은 지금도 아련하다.
엄마가 자주 아파서인지 내가 커가면서는 엄마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기보다 내가 거들거나 손수 밥상을 차린 기억이 많아서인지 나는 늘 엄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립다. 고기를 크게 좋아하지 않고 푸성귀만 좋아하는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끓인 된장찌개와 상추쌈만으로도 무척 행복할 것 같다. 내가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상다리 부러지도록 진귀한 음식이 아니라 가장 소박하지만 엄마의 손길과 마음이 녹은 된장찌개 한 냄비이면 족한 것이다. 아직도 엄마가 차린 밥을 먹는 친구가 있는데 가장 부럽다. 어떤 불편함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엄마가 해준 밥을 먹어보는 것. 이젠 죽을 때 다 돼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엄마에게 무얼 기대할까. 늙은 어미의 무리한 수고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한 마음과 정성이 그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