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가여움으로 남는 엄마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졌던 가장 가까운 엄마와의 일화와 감정을 글로 풀어보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나를 계속해서 붙잡는 죄책감 때문에 계속 주저하다가 글로 풀어놓으니 한편 후련하다. 뭔가 부당하게 여겨지고 납득되지 않은 상황과 맞닥뜨릴 때면 나 역시 의식이나 감정이 미성숙했기에 무조건 참거나 그것이 힘들면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말로 뱉기도 했다. 엄마와 경쟁이라도 하듯 엄마가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나도 비슷하게 돌려주는 감정의 소모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모녀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닌가 한다.
전후를 기점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느라 부모님 세대뿐 아니라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은 개인적인 이상이나 성취보다는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에만 천착했다. 국가가 가난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내느라 지적인 욕구는 눌러둔 채 되는 대로 일차적인 욕구 채우기에도 버거운 삶이었다. 그러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배려를 한다든지 상대방의 인격이나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아제와 비고츠키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르면 아동의 발달은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며 주위의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했을 때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살아오면서 나는 뭔가 허전하고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유년기 때는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는 아버지 말씀에 나는 액면 그대로 내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공주라도 된 양 우쭐댄 적도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우주보다 크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보호와 안정감을 받지 못한 엄마의 유년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피붙이가 없어 속내를 나눌 수 없는 공허함. 기본예절이나 사람과의 관계 형성을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했으니 그 결핍이 자식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바로 결핍의 대물림이다. 어쩌면 엄마는 나보다 훨씬 학대받으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도 여유로울 수 있듯 엄마가 인자하고 여유롭지 못한 정서를 가진 원인은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게 가장 클 것이다. 의지할 대상도 믿어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공허함.
엄마에게 다른 섭섭함보다도 세 살 때 밀침을 당한 이후로 가장 오래된 안 좋은 기억이 어쩌면 내 성장발달은 물론이고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했다는 당혹감과 절망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게 아니라 더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어쩌면 내 생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불쾌한 좌절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엄마와의 혈연까지 의심한 것도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내 나이가 먹을 만큼 먹어도 혼란스러운데 나보다 더한 환경에서 자란 엄마는 어땠을까.
내가 엄마에게 모질게 밀침을 당한 나이도 세 살이었고, 엄마가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진 나이도 세 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한 번의 안 좋은 경험으로도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세상 전부인 부모와 갑자기 헤어진 엄마는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했을까. 자기 목숨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 거두어주었기에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나, 이후의 삶은 울타리가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내던져진 심정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또한 가장 의문인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내 정체는 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은 혼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엄마가 어릴 때 풍족하게 살았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첫 번째 이유는 엄마이기에 자식에게 거짓말할 리 없다는 절대적인 신뢰였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엄마도 진실만 말할 것이다는 믿음이었다. 세 번째는 어릴 때부터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로 인한 객관화된 사실이다. 늘 대접받고 풍족하게 자랐다는 이야기의 반복은 구체적인 사실이 굳어져 객관화가 된 것이다. 어느 순간 엄마가 자식에게 대하는 표현과 태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젠 엄마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으로 귀결되었다.
엄마를 거짓말쟁이로 몰려는 것도 아니고 엄마의 말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도 아니다. 전체의 이야기를 한 줄로 엮어보면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군 장성 집에 수양딸로 길러졌는데 왜 학교는 문턱에도 못 가본 건지, 그토록 대접받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왜 도망치다시피 산골로 시집왔는지. 엄마는 부모가 없다는 콤플렉스를 엄마의 성 씨가 명문가의 성 씨인 '광산 김 씨'라고 했는데 그 역시도 신빙성이 부족하다. 뭐든 파고들기 좋아하는 나는 부모 이름을 기억 못 하는데 어떻게 김 씨인지는 아느냐고 묻고는 했다. 나이가 어리니 엄마가 말하는 모순점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단순함이 거기에 이른 것이다.
1980년 무렵 방송국에서는 '남북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었다. 엄마가 부모 없는 서러움을 뒤돌아 눈물 흘리는 장면을 목격한 나는 엄마에게도 방송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내가 초등 5학년 때였다.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티브이에서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며 처절하게 울부짖기만 한 것이다. 방송에 나가면 그토록 염원하던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은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부모님 이름을 기억해 보라고 했으나 그걸 몰라서 신청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엄마가 한없이 가엾고도 가여웠다. 그런 엄마를 보며 우리도 같이 통곡했다.
그 이유로 엄마는 내가 무조건 지켜주고 보상해 주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엄마는 눈물이 많았다. 감정의 기복도 심했는데 한 번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마음이 풀릴 때까지 두고두고 곱씹는 버릇도 있었다. 엄마의 속상함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엉엉 소리 내어 한참을 울고는 했기에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아픈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 되었다. 누군가 저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줘야 할 것만 같은 심정.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이 되었다. 그 가여움은 어떤 잘못으로도 상쇄가 될 만큼의 파급력이 있었다. 어린 나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누르며 두 주먹을 부르르 쥐고 엄마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엄마의 눈물과 가여움으로 인해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 순간이 내 발목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가여운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그렇기에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내 내면에 들어찼다. 글을 다 쓰고 돌아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 바라기'였다. 그랬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내 정성이 당연시되고 무시당하는데 대한 배신감이 크게 다가온 것이다. 엄마를 향한 무한한 마음도 누가 시킨 게 아닌 내가 시작한 것이었고 거리 두기도 내가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내 나이 쉰 중반, 내 인생은 엄마가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을 만큼 깊게 자리했다. 부모 잃은 엄마가 살아내느라 갖은 고생 다했듯, 나 역시 삶에 부침이 심했다. 엄마가 겨우 이름 자나 쓸 정도의 수준이라면 나는 뒤늦게나마 공부를 해 나름대로 깨달은 게 있고 내면을 갈고닦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환경에서 오는 영향력은 아직도 내게 끈적끈적하게 남아 말끔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만큼 자랄 때 '가정환경'이 인간의 전 생애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부모의 보살핌도 따뜻한 정도 받아보지 못한 엄마는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할 방법도 미숙했고 사랑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부모님의 불화를 목격하고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도 포용적이고 너그럽기보다는 배타적이고 메마를 때가 많았다. 이 인습의 고리를 끊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 역시 젊을 때는 살아가는 게 바빠 자식을 살뜰히 거두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미숙한 엄마였다. 이걸 집안 내력이라고도 한다. 아름답지도 자랑스럽지도 못한 삶의 단면.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나는 엄마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엄마는 그걸 학습하지 못해서 나누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섭섭함, 원망, 미움은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엄마에게 정성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삶에 정답이 없듯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이젠 자연스럽게 흐르고 싶다. 많은 이들의 조언대로 지금껏 살아내느라 애쓴 내게도 그동안 수고했다는 격려를 해본다.
※ 이상으로 <애증의 모녀> 연재를 마칩니다. 아픈 가족사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