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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버리고 키웠으면 되었지

또 다른 상처가 되다

by 글마루

이 년 만에 엄마와 화해하고 엄마는 이전보다 확실히 나를 대할 때 조심했다. 나 역시 그전처럼 무조건적인 지원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했다. 가끔 용돈을 드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는 점점 연로해 가는 엄마에게 먹는 것 위주로 챙겼다. 돈은 기초연금, 남동생이 다달이 보내주는 생활비, 토지 임대료, 농민수당 등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시골 노인들 특성상 돈이 있어도 아까워서 쓰지 않았다.


또한 나는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아들의 뒷바라지에 직장 생활하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진정한 효도는 많은 용돈도 좋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자그마한 손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 살아가기도 버거웠지만 늘 고생하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 언저리에서 맴돌았기에 내 형편에서는 언제나 엄마를 우선순위로 두었다. 직장이나 지인에게 홍삼이나 인삼선물을 받으면 나는 하나도 먹지 않고 모두 엄마에게 갖다 줬다. 좋고 귀한 것은 내가 먹기 아까웠기에 엄마를 드려야 마음이 편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 방과 후 강사로 일했는데 적성에는 맞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나 쪼들렸다. 게다가 방과 후 강사도 이미 기존의 강사가 미리 자리를 잡았는지라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웠다. 전교생이 많은 학교는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고 중간 규모의 학교도 면접을 5명이나 봤기에 많은 나이에 무경력인 나는 어렵사리 일을 잡았다. 나는 현실보다 이상이 더 높았던 것 같다. 뭐든 해 봐야 알 수 있는 그 세계의 속성을 경험하지 않고 알기란 어렵다. 직업적인 만족감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족한 수입으로 내 통장 잔고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경제적인 불안감에 답답하고 초조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학교에서 방과 후 강사를 하고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마트에서 아동복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두 가지 일을 하려니 그 스케줄에 맞춰야 하고 최저시급을 받았기에 두 가지 일을 해도 일반 직장인 한 달 급여가 되지 않았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마트에 6시에 출근해 11시까지 서서 일하면서 아이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행사 매대를 정리하고 잠시 쉴 새도 없이 헝클어진 옷을 접어서 정리해야 했기에 그 일도 쉽지는 않았다. 요령이 없어서 다음 해 학교를 두 곳밖에 계약 못하자 마트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참히 날아가버렸다.


월급쟁이는 4대 보험에 퇴직금이 있지만 강사는 4대 보험의 혜택도 못 받을 때라 건강보험료도 따로 납부해야 하고 국민연금도 따로 납부해야 했기에 실속이 없었다. 고민고민 하다가 우연히 상주교차로를 검색하고 영농조합에 사람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게다가 조건이 좋았다.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하다는 문구에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정보를 알아봤다. 아는 형님이 영농조합 대표로 있다기에 연락해 면접을 보기로 했다. 이미 몇 명의 지원자가 면접을 보고 간 후인데 맨 마지막에 면접 본 내가 채용되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과 후 강사를 돈 때문에 그만두게 되어 속상함에 나는 펑펑 울었다. 생계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접어야 한다는 현실감에 너무 서러웠다. 학교에는 알고 지내던 강사를 소개하고 일 년 몇 개월을 근무하고 그만두었다. 영농조합에 출근해 생소한 업무를 다시 배우고 보조사업 신청과 검역 업무를 익히며 봄, 여름은 별 바쁘지 않게 흘러갔다. 혼자 근무했고 고향 사람들이라 시골 정서만 믿고 있던 나는 급여만 책정하고 근무했는데 중식이 제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친정이 지척에 있으니 친정 가서 점심 먹으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껏 엄마가 내게 밥을 차려주거나 하지 않았기에 그걸 말하기도 자존심 상했다. 엄마는 늙어서 밥도 해 먹기 힘들다며 오히려 내가 해주기를 바랐다.


시골이라 어디 가서 점심 사 먹기도 애매해 도시락을 싸갔다. 가끔 영농조합 관계자나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지나는 길에 친정에 들르기도 했다. 영농조합 출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된장찌개로 점심 한 번 먹고는 점심때가 되어 친정에 가면 밥이 없다거나 엄마는 먹었다는 말로 잘랐다. 남들처럼 아무 때나 가서 편하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엄마는 내가 점심 먹어야 한다고 전화하면 집에 아무것도 없다며 밖에 나가서 먹자고 하거나 먹을 게 없다며 귀찮은 내색을 했기에 눈치가 보여 가지 않았다. 시내에서 엄마 드실 것을 사서 갖다 드릴 때만 들렸다. 남들은 쉽게 엄마에게 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겨울에 수출하면서 엄청 바쁘게 새벽부터 출근하던 영농조합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가 지나자 나를 해고했다. 예전의 시골 정서가 이미 사라지고 샤인머스캣으로 목돈을 쥔 농부들은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다. 자신들이 수출하면서 공제하는 수수료로 내가 월급을 받고 있었으니 온갖 개인적인 잡무까지 시켰다. 돈 주니 노예처럼 부려도 된다는 습성을 알아챌 만큼 지독했다. 혼자서 일 인 삼역을 하며 최선을 다했건만 단칼에 해고하는 영농조합 관계자들을 보며 한동안 그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을 만큼 정이 떨어졌다. 근로계약서 쓰지 않은 것을 노동부에 신고할까도 했지만 고향인지라 그 또한 뒷말이 무서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구미에서 살다가 상주로 이사 간 나는 친정이 가까우니 더욱 자주 방문했다. 무슨 날이거나 명절이나 엄마 생신 외에도 먹을거리가 생기거나 엄마가 좋아하는 고기, 과일을 사서 자주 들렸다. 집에 가도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 가져간 음식만 놓고 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현관에서 택배기사처럼 물품만 갖다 놨는데 밥때가 되어도 여전히 엄마는 내가 밥 먹었는지는 물어보지 않고 언제나 엄마 기준이었다. 점심을 안 먹었다고 말하면 밥 줄까 묻는 대신 당신은 밥을 늦게 먹어서 배가 안 고프다며 딱 한 번 밥 먹은 이후 한 번도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내가 엄마에게 자주 챙기면 챙길수록 엄마는 다시 예전처럼 도돌이표로 돌아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밤 10시에도 아프다고 전화가 와서 모시고 병원으로 가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을 텐데도 엄마는 만나기만 하면 돈 얘기만 했다. 돈 쓸 데가 많고 돈이 없다는 레퍼토리에 나는 기본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가난하지 않으니 너무 아끼지 말고 엄마를 위해 쓸 것을 권했으나 엄마는 자신의 돈은 쓰기 싫고 자식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게 비쳤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간제교사와 시간강사를 하다가 다음 해에는 구하지 못해 시골 고등학교에 사감으로 취업했다. 한두 달 기다리면 기간제교사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하루라도 쉬면 생계가 곤란했기에 내 꿈을 접을 수박에 없었다. 밤낮이 바뀌는 고된 업무였지만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며 나름대로 보람을 찾으려고 했다. 시내까지 왔다 가려면 시간도 많이 걸렸기에 가까운 친정에 가서 쉬고 싶어도 내가 그냥 방문하는 걸 싫은 내색을 했기에 가서 편하게 쉬지 못했다. 엄마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도와야 하거나 모시고 가까운데 여행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목적으로만 방문했고 단 한 번도 그냥 편하게 찾아가서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기에 눈치가 보였고 마음이 편치 않으니 멀어도 집에 갔다가 다시 먼 길을 출근해야 했다.


엄마는 전보다 더 연로해져 나만 보면 아픈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나도 밤낮이 거꾸로 되는 생활에 무릎이 아프고 늘 피로했지만 내가 피로한 건 안중에도 없고 늘 엄마가 중심이 되어 본인 아픈 이야기만 계속해서 듣는 것이 거북하고 불편했다. 한 번이라도 편히 쉬는 게 아니라 마음의 짐만 잔뜩 짊어진 채 친정에서 나와야 했다. 언젠가는 장화 신고 마당에서 다니다가 못에 찔렸다는데 표현이 리얼했다. "오 남매를 키울 때는 엄마를 자식들이 책임질 줄 알았지. 자식이라면 당연히 부모 책임져야 하는 것 아냐? 못에 발이 찔려도 자식이 오 남매나 있는데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두 무릎을 꿇고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밥 해 먹으면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아냐? 죽을 고생 하며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어."라고 내가 미안함 마음이 들도록 했다. 다른 자식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연을 나는 볼 때마다 수십 번 들어야 했다.


다른 자식들에게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안 해서 아픈지도 모르는데 나만 보면 누구네 딸은 부모 모시고 산다, 주말마다 온갖 음식 다 해다 준다, 어느 부모고 자식 고생시키고 싶어 하는 부모는 없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라며 일장연설을 하는데 어쩐지 그 말조차 내겐 부담이었다. 내가 여전히 가장 자주 찾아가고 가장 아픈 데를 긁어드리고 있건만 한 번도 뭘 갖다먹으라는 말은 없었다. 남동생과 같이 만날 때 준비한 음식을 뻔히 보이니 조금 나눠주는 정도였다. 나는 여전히 좋은 음식만 있으면 엄마에게로 향했고 엄마는 당연한 듯이 받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프다면서도 아들이 온다면 김치를 여러 가지 담고 며느리에게 보내기 위해 바리바리 준비했는데 내게는 조금 줄까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들 집에 예전만큼 못해주는 것만 안타까워했다. 엄마에게 나는 관심밖이었다. 이젠 나도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를 보며 아들만 챙겨줘서 섭섭하다는 말을 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체념했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에는 과연 '엄마 마음에 나는 자식이긴 한 건가'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는데 내가 이렇게 변치 않는 마음으로 엄마를 위하면 언젠가는 알아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 엄마 안중에 나는 없는 듯했다.


마음의 짐과 한을 풀고 싶어 고민 끝에 전화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나는 어릴 때부터 관심받고 챙겨받은 기억이 없어 늘 의문이었고 속상했노라며,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며 정말 내가 그리 미웠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엄마는 잠시 망설이더니

"정말 미웠으면 안 키우고 버렸겠지. 안 버리고 키웠으면 된 것 아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야. 그건 오해야. 옛날에는 하도 먹고살기 힘들어서 너를 힘들게 했지. 정말 미워한 건 아냐. 나도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라는 대답이었지만 그것 역시 희망사항이었고 엄마의 대답으로 인해 나는 또 상처받았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의 의문을 풀고 싶었던 나는 점점 엄마가 나를 미워했기에 그토록 냉정하고 쌀쌀맞게 대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반응은 미워하니까 나오는 거라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엄마와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 걸까? 나는 하나라도 위하고 싶은데 엄마의 마음이 내게로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마음이 있다면, 진심이라면 그 마음이 어떻게든 내게 전달되지 않을까?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미움받았다는 확신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유없이 내가 미웠노라는 말이라도 듣는다면 속이라도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도 엄마를 마음에서 지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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