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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빈자리에서 서성이다

by 글마루

아버지가 위암수술할 당시 병원에서는 6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수술 경과도 나쁘지 않고 항암치료까지 굳건하게 견디는 아버지가 암을 물리치고 예전처럼 일어설 줄 알았다. 평소에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아버지였기에 그 판정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항암치료 때 몽땅 빠진다는 머리카락이 아버지는 온전했고 통증에 대한 내색을 크게 하지 않았기에 별일 없으리라 여겼다. 마지막 항암치료 때 담당 교수도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어도 된다고 했다니 다 나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일 년 남짓 항암치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자 아버지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병원에 다시 갔지만 병원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이젠 없다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건 통증을 완화시키는 조치이고 비용이 너무 높아 우리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나서서 책임지고 할 사람도 없었다.


"맛있는 것 실컷 드세요."라는 담당 교수의 말을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인 가족들은 한마디로 망연자실했다. 병세도 병세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돈만 있으면 병원에도 더 모실 수 있고 몸에 좋은 보양식도 해드리련만 남동생은 대학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동안 남동생 건사하고 친정에 돕느라 여유가 없었다. 친정은 친정대로 금융기관 대출에 마을 사람들에게 빌린 돈까지 더 빌릴 데도 없었다.


뒤늦게 나타난 언니도 방 얻을 돈이 없어 시어머니 전셋집에 얹혀사는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안타까움만 가득 안은 채 아버지가 통증과 싸우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친정집 분위기는 더욱 음산하고 도무지 웃음기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모두 시무룩한 표정만 지은 채 무기력하게 아버지를 지켜봤다. 사형선고받은 사형수의 심정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무능력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명치가 조여왔다.


먹는 진통제도 붙이는 패치도 소용이 없자 병원에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했다. 주사 맞을 때는 약간의 효과가 있는 듯했으나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밀려드는 통증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맞았다. 극한의 통증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에 우린 외줄 타기 하는 어름사니처럼 조마조마한 가슴만 부여잡을 뿐이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먹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미음조차 삼키지 못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었고 암세포가 온몸에 퍼졌음인지 허리의 극심한 통증으로 바닥에 눕지도 못한 채 이불을 부여잡고 앉은 채 자야 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앓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건 형벌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시지프스가 연상되었다. 끊임없이 바윗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면 아래로 떨어져 다시 굴려야 하는 끝나지 않은 반복. 아버지의 가난이 그랬고, 아버지의 통증이 그랬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 암이라는 놈이 이를 갈 만큼 저주스러웠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자못 들뜬 모습이었다. 상태가 호전되었기에 아마 아버지는 다 나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까. 내가 아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대구 병원에 동행하던 날, 차 멀리로 고생하는 나를 걱정하고 딸과 동행해서인지 유달리 표정이 밝은 아버지를 보며 나 역시도 마음이 놓였었다. 항암주사기를 여러 대 몸에 꽂고 몇 시간 맞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고통에 신음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건만 아버지는 고요하고 의연하게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다 맞고 남들은 해파리처럼 늘어져 걸음도 못 옮겨 보호자의 부축을 받았는데도 아버지는 밝은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치료 후 언니와 만나 우리는 커피가 위에 안 좋은데 죽을 사드릴까 권했으나 아버지는 커피 마시는 게 소원이라고 했고 우린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켰는데 아버지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연신 싱글벙글하며 커피가 아주 맛있고 딸들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내니 인생 최고로 행복하다고 했다. 평소 자식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아버지답게 이런저런 당부를 아끼지 않았는데 나중에라도 아버지가 떠나면 엄마에게 잘하고 형제들끼리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다음에도 또 딸들과 커피 마시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최후의 만찬처럼 딸들과 커피를 마셨고 다음은 없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얼마 안 있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는 여러 날 검은 변을 봤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무슨 변을 볼까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장기가 다 썩어서 나온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변이라고 하기엔 냄새가 너무 고약하고 썩은 냄새가 났으며 살점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하니 그걸 지켜보고 마무리한 엄마의 심정과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잠시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모심기가 한창일 때여서 집 바로 앞 논에는 물이 흥건했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여러 개 돋아나고 개구리가 무엇이 서러운지 극성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밤바람이 알맞게 나를 훑고 지나갔고 논 아래쪽에서 아버지가 논둑을 깎고 있었다.

"학교 갔다 이제 오냐?"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라고 나지막이 외쳤다. 아버지는 여전히 내 곁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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