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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언니

반복되는 악순환

by 글마루

내가 아들을 낳기 전 종적을 감췄던 언니가 다시 나타났다. 그토록 속을 썩인 언니건만 엄마에게는 소중한 자식이었기에 가장 기뻐한 건 엄마였다. 아들이 돌을 훌쩍 넘기고 두 돌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동생과 나는 달라지지 않는 언니의 태도에 안도감 반 걱정 반이었다. 언제 또 집안에 풍파를 일으킬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언니를 바라보는 게 불안했다. 그렇지만 다시 나타난 언니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큰소리쳤다. 맏딸이라는 그 자리는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 같았다. 때로는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언니의 모습에 부당함을 느꼈지만, 그래봤자 결론은 평지풍파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당당하고 한편 뻔뻔스럽기까지 한 언니와 작은 언쟁이라도 있을라치면 아프신 아버지의 난처한 모습에 내 감정은 꾹꾹 눌러둬야 했다.


핏줄이기에 앞서 우리 입장에서 뒤늦게 나타난 언니는 '굴러온 돌'이나 다름없었건만 그 굴러온 돌로 인해 우리가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훗날 막내 여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 어려운 형편에도 부모님은 언니에게 돈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을 것, 먹을 것 절제하고 친정에 도운 돈이 언니에게로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눈치를 채긴 했지만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말하지 못했다. 언니가 알뜰하게 생활하는데도 운이 안 좋아 나쁜 일을 당했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당연히 도와야겠지만 어릴 적부터 언니는 돈 쓰는 것 좋아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같이 자라 그 성향을 가장 잘 아는 나인지라 달라지지 않는 언니의 태도에 답답하기만 했다.


시골에 집을 짓고 아버지가 위암수술을 앞둘 무렵 언니가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당시엔 고급 세단에 속하는 '포텐샤'라는 멋진 차를 끌고 화려하게 귀환한 것이다. 우리는 언니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났거니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섬유회사에 영업하는데 요직이라 인센티브까지 받는다고 했으나, 그것이 언니의 허영심의 발로로 인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얼마 안 가 들통났다. 차는 렌터카였고 직장은 염색공장의 현장근로자였다. 직업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나중에 형부가 된 남자는 언니보다는 훨씬 성실했다. 인물도 좋았고 언니를 아껴주는 모습에 한 핏줄로서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언니가 과거는 다 잊고 정착해서 평범한 삶을 이어가길 빌었다.


뒤늦게나마 맏딸 노릇한다고 아버지 위암수술을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병원에서 했는데 가까우니 자주 들여다봤다. 어떻게 보면 첫 효도를 한 셈이다. 아버지가 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 다닐 때에도 가끔 동행하고는 했다. 어쩌면 그때가 집안에서 언니의 역할을 가장 잘했던 것 같다. 언니는 인사하러 온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가진 게 없으니 시어머니가 사는 전셋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언니는 몇 년 동안 아이 둘을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로의 삶을 살았다. 나중에는 따로 방을 얻어 분가했고 가보면 살림도 말끔하고 음식도 맛깔나게 했기에 안심이 되었다.


언니가 또다시 나타났을 때 다시 우리 집에 오게 되었고 나는 언니에게 지난 일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부모님이 모른 척하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있거니와 언니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이젠 자매로서의 우애를 다지고 싶었다. 그럭저럭 왕래도 하고 잘 지냈으나 엄마의 지나친 편애가 눈에 띄게 드러났기에 나는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입버릇처럼 '언니 해줘야 한다.'라고 하며 내게는 늘 돈 이야기하며 부담을 줬는데 언니에게는 엄마 돈으로 해줘도 부족한 듯 보였다. 이불도 비싼 것을 몇 채나 해주고 온갖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 너무 과할 정도로.


나는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해 거의 갖다 먹지도 않았고 뭐라도 가져가면 꼭 그에 해당하는 금액의 몇 배를 용돈으로 드리고는 했다. 언니에게는 고춧가루도 열 근씩 빻아주고 고추장, 김치까지 올 때마다 다 못 들고 갈 정도로 마련해 줬는데 정작 내가 고춧가루 좀 달라고 하면 비닐팩에 반을 담아주며 아까워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걸 보다 못한 동네 아주머니가 뭘 그렇게 주냐고 좀 더주라는 말을 해서 조금 더 받은 기억이 있다. 내가 먼저 결혼한 것도 있지만 언니에게 줄 음식도 엄마는 나를 시켰는데 나는 가능하면 도우려고 했다. 떨어져 있는 기간에 대한 엄마의 보상이려니 여기며 너무 비교되게 하는데도 이해하려고만 했다.


언니가 방을 얻어 분가할 때에 돈이 모자란다고 하자 엄마는 내게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 한다며 돈을 빌려주라고 했고 나는 알뜰하게 절약하며 모은 돈 400만 원을 빌려줬다. 언니가 마음 잡고 사는 게 고맙고 잘 살아야지 집안도 편안하기 때문에 그 역시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가 아이를 낳자 엄마는 내게 해주지 않는 보약에 호박소주를 내려서 갖다 주는 등 지극정성을 기울였다.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남동생이 같이 있으니 일주일 정도 지낸 적이 있는데 엄마 고생했다며 한약을 지어드렸으나 나중에 동생들에게 들은 말은 비싼 한약을 해주지 않아 섭섭했노라는 말이었다. 귀한 음식, 좋은 물건이 있으면 나는 무조건 엄마에게 드렸는데 늘 돌아오는 건 해도 해도 못마땅해했고 그걸 대놓고 내게 말했다.


언니가 둘째를 낳을 무렵 몸조리 문제로 고민하던 엄마가 내게 첫째를 맡아서 봐주라고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제대로 못해 고민하고 몸이 안 좋았기에 그 입장을 이해해서 첫째를 내가 데리고 와서 3주 동안 보살폈다. 조카의 잠시 엄마가 되어 돌봤는데 힘이 들면서도 조카가 사랑스럽고 귀했기에 정이 들었다. 조카는 내 아들의 여동생처럼 우리와 지내다가 언니의 품으로 데려다줬다. 조카는 내게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원래부터 누굴 돕는 걸 좋아하는지라 자발적으로 하긴 했지만, 엄마의 당연시하는 말이나 태도 때문에 섭섭했던 적이 많다. 심지어 언니조차도 그 역할이 바뀐 나를 향해


"네가 내 언니 하면 안 되겠냐? 그냥 네가 내 언니 해라."

라는 말을 하며 언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도록 했다. 나는 엄마에게 길들여져서인지 도움을 거절하면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고 도와줘야 마음이 편안했기에 늘 그랬던 것 같다. 가족행사에 쓰기 위해 자매끼리 곗돈을 모을 때도 돈이 없다고 하면 내가 대신 납부해 줬다. 나는 언니나 가족이 어렵다고 하면 준비된 실탄처럼 도울 준비를 하는 게 의무감처럼 길들여져 있었다. 끊임없이 일을 하고 번 돈은 나를 위해 쓰지 못했고 집안에 일 있을 때마다 일일이 셀 수도 없는 돈을 썼으나, 내가 받은 것은 없다고 봐야 한다. 더 돕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만 갖고 살았기에 섭섭한 줄도 모르고 살았다.


맨날 돈 없다며 나만 보면 노래 부르듯 한 언니는 내게 빌린 돈은 갚을 생각을 않고 소비하기를 즐겼다. 집에 살림살이도 갖고 싶은 것 다 갖추고 돈이 없다며 시장에 가면 옷을 사는 등 헤픈 씀씀이가 눈에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생신 때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목걸이, 팔찌를 여봐란듯이 두르고 나와 한껏 폼을 잡았기에 나와 여동생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맏딸이라는 이유로 큰소리를 쳤고 엄마는 언니 말 들으라며 언니만 감싸고돌았다. 여동생과 나는 너무 현격하게 비교되는 엄마의 편애에 가끔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섭섭한 표현을 할라치면 엄마는


"너는 왜 생각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 참 생각을 이상하게 하네."


라며 무조건 비난하고 윽박질렀다. 결론은 언제나 내 잘못으로 끝났다. 엄마를 어릴 때부터 절대적으로 신뢰한 나로서는 엄마의 지적에 정말 내가 속이 옹졸하고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인가 싶어 의기소침했지만 내 내면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억울함이 슬프게 울먹이고 있었다. 내가 느낀 감정을 전달했을 뿐인데 동생과 나는 번번이 성격과 생각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고 그 답답함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막막하고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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