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맞서 싸우다
친할머니가 한국전쟁 당시 간암(추측)으로 아버지 나이 13세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바로 밑에 고모 한 분이 계셨고 9남매 중 가장 막내인 작은아버지는 4세였다.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작은아버지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울타리가 될 엄마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상실감과 공허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형수인 큰엄마에 의해 길러졌다.
작은아버지는 매우 영특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를 찾으며 울던 아이는 인물도 좋았고 명석해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로 일 등을 놓치지 않았다. 친엄마가 부재한 상황에서 세 살 어린 조카와 다투고 큰형수 눈치를 봐가며 작은아버지는 성장했다. 거기엔 누나인 작은 고모와 형인 아버지의 보살핌도 있었다. 아버지 역시 13세의 소년 티를 벗지 못했지만, 형제의 정은 매우 도타웠다.
형수가 잘 건사한다고 해도 이미 큰집에는 사촌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큰엄마는 시아버지인 할아버지 수발에 자식 같은 시동생까지 건사하느라 그 삶도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일대에 쩌렁쩌렁하던 집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쫄딱 망하고 말았으니 먹을 것 귀한 시절에 자기 자식과 시동생들, 시누이들까지 이끌어 가느라 무엇보다 큰엄마의 노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외로운 소년은 큰엄마의 눈칫밥과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조카들에게 가끔 맞기도 하면서 외롭고 서러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어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버릇없는 조카들을 대신 때려주고 혼내며 아버지 역시 큰엄마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아홉 살 많은 형인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여린 속내까지 다 보듬기에는 아버지 역시 어렸다. 외롭고 불안하고 막막한 소년들의 혈육의 정은 모친의 부재로 더 진해진다. 성인이 되어 기반을 잡은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에겐 평생 아픈 새끼손가락이었다. 작은아버지를 마치 자식이라도 된 듯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눈빛은 습기를 머금었다. 동생을 지켜주지 못하고 어엿하게 자라도록 지원해주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을 나는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서책을 가까이하고 붓글씨를 쓰며 학자의 삶을 살아간 덕분에 자녀들에게는 자연스레 산교육이 되긴 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생존하신다면 100세 가까운 큰아버지들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보내셨으니 교육에 대해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양반'이라는 인습이 남아있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호미 들고 밭에 가기라도 하면 "양반이 무슨 농사를 짓느냐?"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나무랐다고 하는데 할아버지 역시 현실 인식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몰락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첫째, 셋째 큰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 둘째는 대학까지 보냈으나, 그나마 기대에 부응한 건 이복인 아버지보다 한 살 많은 큰아버지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군청에서 근무하다가 돌아가셔서 자식들이 아주 풍족하진 않아도 살림을 꾸려갈 정도는 되었다. 고모들도 중학교까지 보낸 걸 보면 할아버지의 교육열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였다. 큰아버지들, 고모들을 땅 마지기 팔아 가르쳤지만 나중에는 양식으로 할 논 서 마지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어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살림 돌아가는 상황을 어찌 알았으며 어떤 힘이 있어 공부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이미 가세는 기울어 보리밥조차 귀할 만큼 몰락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만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민학교만 졸업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 아버지는 동생인 작은아버지를 건사하고 집안일을 돕고 성인이 되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광산에 광부로 취업까지 해서 큰집에 조카들 옷가지도 사주며 큰엄마가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어린 동생인 작은아버지가 몹시 가여웠노라며 강인한 구릿빛 얼굴 속에 감춰진 눈빛만은 쓸쓸하고 슬펐다. 당신의 일처럼 속상하고 분개했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에게 작은아버지는 평생 아픈 손가락이었다.
언제나 백 점을 맞고 일 등을 놓치지 않던 작은아버지에게 큰 사건이 생겼다. 작은아버지의 통지표(성적표)가 조작된 사건. 아버지가 동생의 공부를 가르치고 챙겼기에 그 실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편없는 통지표를 받아와서 온 식구가 놀란 경험이다. 납득할 수 없는 통지표에 모두 조작을 의심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따지지 못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십 대 청년인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의 담임교사를 찾아가 성적에 대해 따지자 얼버무려 크게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 속이 조바심이 났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다 가난에서 비롯된 억울함이 빚어진 사건이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비빌언덕이 없던 작은아버지는 어느덧 자라 청년이 되었고 군대를 일찍 다녀왔다. 시골에 남아 농사지으려고 해도 지을 땅조차 없고 망한 집 자식들 누구 하나 제대로 사는 집이 없었기에 작은아버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혼자 일어설 궁리를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월남전 파병이었다. 국가에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미국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그것은 국가적 사명일 뿐, 입에 풀칠하기 힘든 작은아버지에겐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베트남 정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을 자처하고 나설 때는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까.
포탄이 쏟아지는 월남전에서 적과 싸우며 살아남은 작은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약간의 돈을 쥐었고 그 돈을 밑천으로 서울로 상경한다. 작은아버지의 세세한 삶의 여정을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들은 기억에 의존하면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작은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결혼한다고 집안에는 한 푼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방을 얻고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제 아무리 명석한 두뇌를 가졌어도 국민학교 졸업으로는 공장밖에 갈 수 없는 현실을 깨닫고 새 신랑인 작은아버지는 또다시 제2의 모험을 하는데 바로 독일 광부로 지원한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빈국에 속했다. 당시 대통령이 고민 끝에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거였다. 그 시류에 작은아버지가 합류한 것이다. 어린 신부와 뱃속의 아이를 두고 홀로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는 작은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광부'라는 직업은 지하 몇백 미터 갱도에서 언제 매몰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아야 한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함을 안고 컴컴한 갱도에 들어갈 땐 죽은 목숨이고 나올 땐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을까. 운명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외나무다리. 게다가 그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이다. 또한 지원한다고 모두가 갈 수 없는 소정의 심사를 거치고 절차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것이다. 20대 후반의 작은아버지는 독일로 떠난다.
독일에 간 작은아버지가 당연히 지하 갱도에서 목숨과 맞바꾸는 힘든 일을 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 고난의 시간은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렸기에 독일에 광부로 간 작은아버지가 그저 위대해 보였고 시골 바닥에서 자란 작은아버지가 그나마 똑똑해서 자기 살 궁리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무사귀환을 빌었다. 자라면서 누구보다 똑똑한 작은아버지였기에 집안에서 거는 기대도 높았다. 다행히 작은아버지는 독일에서 광부 일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다. 그것을 밑천 삼아 귀국한 작은아버지는 당시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신정동에 방앗간을 얻는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 말이 서울이지 서울의 가장 변방인 허름한 동네에서 작은아버지의 자그마한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몇 년을 독일에서 지내다가 귀국했을 때 작은어머니는 친정에 의탁해 살았는데 사촌동생이 벌써 자라 네 살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아버지를 보고 처음 본 사촌동생은 작은어머니에게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라고 했다는데 웃음 뒤엔 누구도 말하지 못한 가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이렇듯 1970년대는 누구나 살기 어려웠다.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아갈 방법이 묘연한 때 일어설 기회를 잡기란 복권 당첨되는 것만큼 확률이 낮았다.
작은아버지는 월남전 파병, 독일 광부 파견을 밑천 삼아 조그만 고추방앗간을 운영했다. 아들 둘을 키우며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온 청춘을 다 바쳐 매케한 기름 내와 더 매운 고추 냄새에 시달리며 푼돈을 모아 살림을 일으켰다. 부지런하고 인물 좋고 장사 수완까지 좋은 작은아버지의 가게는 커져가는 주변 개발에 따라 더욱 번창했는데 손님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나자 허허벌판이던 신정동은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로 붐볐고 그에 비례해 작은아버지의 재산도 나날이 늘어갔다.
고등학교 대학까지 나온 큰아버지들은 한 분만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다 마흔 초반에 일찍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한 분은 스님, 한 분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기에 집안은 말 그대로 다 망한 집이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밥그릇 두 벌, 수저 두 벌만 가지고 분가했고, 작은아버지는 이 악물고 노력해 자수성가한 것이다. 방앗간을 경영하며 고향에 다녀갈 때면 고추기름 묻은 손으로 조카들의 교복값을 내고, 제사상에 빠짐없는 쌀과 술을 보태던 작은아버지가 조카들을 다 건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재벌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순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목숨까지 내걸며 도전한 덕분으로 서울 시내에 건물도 사고 윗세대에서는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삼십 년 넘게 운영하던 방앗간은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고 좀 여유가 생길 때쯤 위암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되어 예후가 좋아 지금은 제주도에서 큰아들네와 이주해 건물 임대수익으로 생활하신다. 젊을 때 잘생겼던 외모도 이젠 쇠락해 여든이 다 된 노인이 된 작은아버지지만 젊었을 때의 그 도전정신은 내게도 귀감이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가 된 인물인 작은아버지가 어느 날 인터뷰한 기사 링크를 보내주었다. 젊은 날 청춘의 혼을 바쳐 도전한 그들이 있었기에 그 원동력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했고 어렵다, 어렵다고 하지만 그나마 풍족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것도 기성세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으로 남은 배움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세상과 맞서 싸워 당당히 승리한 작은아버지를 나는 마음 깊이 존경한다.
제주도에 놀러 오라는데 조만간 기회를 내어 꼭 방문하고 그동안 작은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가까이에서 듣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단순히 자수성가한 어른으로만 기억하기는 작은아버지의 지난했던 삶의 여정이 아깝다. 고비고비마다 절망감과 낭패감, 외로움과 싸워 이겼을 작은아버지께 나는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