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의 족쇄
한마을에는 우리 집 외에도 제일 큰집과 아버지의 의붓형의 어머니인 서조모가 살고 있었다.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오래전, 아버지가 열세 살이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호적에 오르지 못한 서조모가 호적에 오르고 집안의 어른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1895년 태어나셔서 1987년 돌아가실 당시에 92세였으니 할아버지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등 2세기에 걸친 삶을 사셨다.
할아버지의 생에 대해서는 어른들에 의해 전해 들었을 뿐 자세한 일화까지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었으니 바로 큰엄마다. 할아버지가 친할머니나 서조모와 지낸 시간보다 며느리인 큰엄마와 보낸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1950년 아버지 나이 열세 살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할아버지는 잠만 바로 옆의 커다란 기와집 사랑방에서 주무셨을 뿐, 모든 생활을 큰집에서 하셨다. 서조모와는 큰 정이 없던 할아버지는 서조모를 마주할 때면 데면데면했던 기억이 있다.
18세에 동갑내기 큰아버지와 결혼한 큰엄마의 삶은 회한 그 자체다. 단 한 번도 평범한 아낙네의 삶을 산 적이 없는 여인. 결혼한 지 몇 년 안 돼 홀연히 자취도 없이 출가한 큰아버지 때문에 독수공방 과부 아닌 생과부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지금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1940년대였다. 아직까지 봉건주의 잔재가 또렷이 남아 있던 시절, 더군다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여인네들의 삶은 개화의 물결 속에 더욱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휘둘리는 가벼운 낙엽에 불과할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직접적으로 큰엄마의 속내를 들은 적은 없지만, 겉으로 말하지 못한 여인으로의 삶은 억울함, 서러움, 분노, 좌절, 체념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의 집합체였을 것이다. 큰엄마가 시집올 당시에는 일대에서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부유했기에 큰엄마도 부푼 꿈을 안고 시집왔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 시작은 두려움도 있지만 설렘도 크기 때문이다. 시집와서 한참 동안은 집안에 부리는 노비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의 손재주가 좋은 친할머니 성깔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하니 큰엄마 인생에는 단 한 번도 홀가분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몇 년 안 있어 한국전쟁이 터졌으니 세상의 축이 흔들릴 만큼 큰 소용돌이 속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기란 누구인들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 형제는 서조모가 낳은 1남 1녀를 포함해 5남 4녀가 되었으니 거기에서 맏며느리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아도 숨이 막힐 정도다. 지금도 그럴진대 남존여비 의식이 만연했던 당시에 며느리, 그것도 맏며느리, 더해 종갓집 며느리의 역할이란 버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큰집에 큰오빠와 작은아버지와의 나이 차이가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시동생과 아들을 같이 키우느라 무척 고달팠다고 한다. 게다가 시어머니인 친할머니 성깔이 보통이 넘는지라 마음 놓고 당신 자식 한 번 보듬지 못했다고 하니 그것이 한으로 남고도 남을 일이다. 시어머니가 살아서는 시집살이에 시달리고 돌아가시고는 아직 어린 시동생들 건사에 시아버지인 할아버지를 모시느라 큰엄마 손에서는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일 년에 제사만도 열 번이 넘으니 그 제사를 단출하게 식구들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집안 남자들이 참여했으니 큰엄마는 커다란 행사를 일 년에 열 번도 넘게 치러내야 했다.
남편이라도 곁에 있으면 푸념이나 하소연도 하고 바가지라도 긁겠지만 큰아버지가 속세를 떠나 도를 닦고 어느 암자에 기거한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십 년 넘게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생 때 큰아버지가 찾아왔다. 당시 난 스님은 속세를 떠나 가족이 없이 혼자 산다고 알고 있다가 큰아버지가 '스님'이라는 데에 혼란이 왔다. 큰집에는 떠났던 가장이 돌아온다니 잔칫집처럼 들뜬 분위기였고 나는 그 의문을 풀지 못한 채였다. 큰엄마는 무를 어슷 썰어 동탯국을 끓였고 장삼을 입은 큰아버지가 동탯국이 시원하다며 먹을 때 나는 당돌하게도 "스님은 고기 먹으면 안 되는 것 아녜요?"라고 말해 주변에 있던 큰엄마들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소식이 끊겼던 큰아버지가 찾아왔으나 스님이 되었기에 곧 강원도에 있는 암자로 돌아가셨다. 이후엔 간간히 연중행사처럼 찾아올 뿐, 큰엄마는 여전히 과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삼시 세끼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렸는데 매번 가마솥에 밥을 지었으며 할아버지 밥상은 온갖 정성을 다해 차렸다. 다른 식구들 밥상에는 올리지도 않는 들기름으로 구운 고소한 김이 매번 빠지지 않았고, 조기 등 생선은 할아버지 밥상에만 올랐다. 할아버지가 며느리에게 평생 따뜻하고 진귀한 밥상을 받았지만 정작 큰엄마는 할아버지 밥상 물리고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봐왔기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살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 줄 알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한 마을에 작은집이 둘, 재 너머 또 작은집이 하나 있었으니 명절이나 제사 때 동서들이 와서 거드는 것은 좋았지만 그 많은 조카들 밥까지 차리느라 큰집은 늘 친척들로 북적거렸다. 굳이 행사가 아니어도 우린 자주 큰집에 가서 놀곤 했다. 그럴 때면 질녀인 우리들 밥상까지 차리면서도 싫은 내색하지 않은 큰엄마는 집안의 주장이면서 모든 식솔들을 거둬야 하는 운명의 족쇄를 찬 채 숙명처럼 고난의 길을 걸었다.
큰엄마와 큰아버지는 평생을 떨어져 살다가 일흔이 넘어 큰아버지가 더 이상 스님으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합가 했다. 당신을 떠나 스님으로의 삶을 산 남편이 미울 만도 하건만 큰엄마는 평생 남편이라는 큰아버지만 기다렸던 것인지 노후의 몇 년간 큰엄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오십 년 넘는 시집살이에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만 큰엄마는 수많은 사연을 속으로만 삭인 채 묵묵하고 의연하게 종부로서의 역할을 다한 후 세상을 하직했다.
자기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기도 버거운데 남편도 없이 홀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자식에 조카들까지 챙겨야 했던 큰엄마를 지켜줬던 건 침묵이 아닌가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잠시도 집안일에서 손을 놓지 않던 큰엄마가 점점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