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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

14. 떠나고 싶을 때와 떠나야 할 때

by 글마루

아들이 오늘 떠났다. 머나먼 유럽 그것도 프랑스로 떠났다. 어떤 이들은 해외로 출장 자주 가는 아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내심 부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한 엄마이기에 부러운 건 눈곱만큼이고 마음은 아들의 좌석 곁으로 날아간다. 새벽 세 시 오십 분 경북 구미에서 인천공항 행 버스를 타고 아침 일곱 시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짐 싸느라 새벽까지 한숨도 못 잤을 테고 버스에서 정신없이 졸았을 테지. 티켓팅하고 출국 수속하고 길게 줄서서 기다리느라 얼마나 고단할까.


그 출국이 여행이라면 아들도 약간은 들떴을 터인데 여행이 아니라 일로 가게 되고, 게다가 비행 시간은 좀 긴가. 내가 가장 길게 비행기를 타본 것이 여섯 시간이라면 미국이나 유럽은 열두 시간은 걸려야 갈 수 있다. 거기까지면 그나마 낫겠지만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느라 기다리고, 다시 비행기 타고 내려서 목적지까지 또 이동해야 하는 그야말로 힘겹고 지루한 시간이다. 어떤 이는 비행기 타는 게 힘들어서 해외여행 안 간다는 말도 있으니 비행이 주는 답답함과 피곤함은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은 비지니스석은 꿈도 못 꾸고 이코노미석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짐짝처럼 묶여 있어야 한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안정되지 않은 두려움과 부담감을 안는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모험심과 탐험심으로 꽉 찬 사람이라도 설렘만 안고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마음 자루에 담겠지만 설렘이 더 크기에 실행하는 것이다. 사실 여행이 즐기는 것 같지만 여행은 고생을 동반한다. 이동을 해야 하고 해외라면 날씨도 다르고, 물맛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공기도 다르고, 사람이나 집 등이 다 다르기에 그 다름에 따르는 것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여행도 그러할진데 일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자주 하다 보면 주인에게 고삐 끌려가는 소 심정일 것이다. 장장 육 개월을 타국에서 지내야 하는 부담감, 최소 기간이고 일정에는 내년 사 월까지라는데 자칫하다가 일 년 동안 아들 얼굴도 못 볼지 모른다. 평소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는 아들이 타국에 가서 아프지는 않을지 무엇보다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잘 다녀오라고, 항상 응원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믿는 수밖에 없지만 어제 본 아들이 벌써 그립다.


아들의 지금 상황이 떠나야 할 때라면, 아들에게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풀잎처럼 빛나는 이십 대, 일본을 동경한 아들은 나와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혼자서도 많이 떠났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아들은 감정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지만 십여 년 전이나 올 일 월에 함께 일본에 갔을 때나 나는 설렜다. 무뚝뚝해서 살갑지도 않고 감정 표현도 잘 안 하지만 은근히 나를 챙기는 아들을 보면 큰 산처럼 든든하기도 했다. 어느새 아들은 내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 한 번 못 가 본 것을 나는 한처럼 여기다가 여행의 물꼬가 트이면서 비행기를 열 번 가까이 탄 것 같다. 처음 여행할 때는 설렜으나 비행시간이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몇 번 다녀오고나자 이젠 나도 슬금슬금 그 비행시간 때문에 슬며시 오금이 저린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떠나고 싶어서 간 여행이 어느 순간 여행은 하고 싶은데 비행은 하기 싫은 모순적인 상황이 생겼다. 예약하고 비행기 탈 날이 가까워지면 설렘보다 의무감처럼 떠나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는 피곤함과 즐거움이 반반이었지만.


인천공항까지 가는데 최소 서너 시간 걸리고 출국 수속과 탑승까지 최소 세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니 어느 한 곳에 여행을 하려면 가까운 일본이라도 비행 시간에 맞추려면 밤을 새어야 한다. 지방에 사는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지루한 일이다. 게다가 출국하기 위한 관문은 또 얼마나 많고 줄은 또 얼마나 긴지. 공항에 가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죄다 여행 가기 위해 모두 집합한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든다. 거기에 더해 비행기에서 몇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면 몸은 방전 직전의 배터리처럼 허느적거린다.


그렇지만 때로는 고생스럽기도 한 여행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 어색함을 깨뜨리고 대화하고, 사진 찍어주고, 같이 식사하고, 쇼핑하다 보면 그 짧은 시간에도 사람 사이의 정이 쌓인다. 그리고 또 하나 나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게 살아가고,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함을 발견하고 나면 사람을 대하는 데도 여유가 생긴다. 결국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곳에 한 발을 내딛는 최초의 감각이면서 새로운 풍경과 환경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마음에 얇게 흰 눈이 뿌려지는 것과 비슷하다.


떠나고 싶을 때나, 떠나야 할 때는 동기만 다를 뿐이다. 두 상황 다 어쩌면 미처 가보지 않은 오솔길을 헤치며 한 발, 한 발 궁금증과 호기심을 함께 내딛는 것이 아닐까. 아들도 미지의 오솔길을 잘 돌아보다가 돌아오기를 빌어보는 고요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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