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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Jun 10. 2024

택군과 간장게장

 조선의 19대 왕 숙종의 재위기간(1647~1720) 은 48년이고, 21대 왕 영조의 재위기간은 (1724~1776) 무려 52년이다. 그러나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형인 20대 왕 경종의 재위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는다. 33세에 왕위에 오른 경종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따르는데, 배후에 이복동생이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영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경종 독살을 주장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정황정거를 거론하는데, 당시 세제였던 영조의 정치적 입지와 경종 사망 당일에 영조가 취한 의학조치 때문이다. 먼저 당시의 정치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숙종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숙종은 조선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대표적인 왕이다. 그의 무기는 다름 아닌 환국이었다. 환국은 시국 또는 판국을 바꾼다는 뜻인데 숙종은 집권당을 일시에 바꾸어 버리는 환국을 재위기간 내내 단행하였다. 경신환국(1680)으로 서인을 등용하고, 기사환국(1689)으로 남인을 등용하고 다시 갑술환국(1694)으로 서인을 등용하는 식이었다. 집권 세력들이 안심할만하면 판을 뒤엎어버리니 신하들의 충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환국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궁에서 밀려나는 세력은 퇴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국이 반복되다 보니 양자 간 감정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고, 정권에서 밀려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가진 숙종의 유일한 고민은 후손이 없는 것이었고, 이를 해결한 준 이가 바로 장희빈이다. 숙종은 보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희빈 장 씨와의 사이에서 훗날 경종이 되는 이윤을 보게 되었다. 숙종은 이윤을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원자로 책봉한다. 조선에서 임금으로 가는 과정은 왕자-원자-세자를 거쳐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던 세자에게 첫 번째 위기가 닥쳐온다.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어린 세자의 친모인 장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장희빈 사망 당일을 잠시 살펴보자. 

장희빈이 죽기 전 행한 끔찍한 일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서운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어린 세자는 울며불며 신하들의 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제발 아바마마에게 내 어미를 살려주라고 말해주게. 그리하면 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네."

세자 이윤을 뿌리친 이들은 노론이고, 울고 있는 어린 세자를 일으킨 쪽은 소론이다. 한편 장희빈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숙종에게 청을 올린다.

 "전하! 마지막으로 세자를 한 번만 보고 싶습니다. "

 그렇게 죽음을 앞에 둔 어미와 그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 할 아들이 상봉하게 되었다. 세자는 서럽게 울며 장희빈에게 달려갔고, 그 순간 벌어진 충격적인 일에 궁이 발칵 뒤집히고 만다. 

 조선후기 문신 이문정은 장희빈 사건부터 경종재위 기간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수문록에서 이 찰나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희빈은 악독한 말을 쏟아내면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

 장희빈이 한 악독한 말은 "내 이 두 손으로 이 씨의 대를 끓어버리겠다."였다. 

 세자 이윤은 경종으로 등극하고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경종 즉위 후 청나라 측에서 경종의 병에 대해 묻자 조선의 사신은 '위'라고 대답했다. 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뜻이다.

 어린 세자가 받았을 충격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세자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노론과 강력한 군주이자 아버지인 숙종의 눈치도 보아야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민진원이 저술한 단암만록에 따르면 숙종은 세자가 뜻에 조금만 어긋나도 장희빈을 들먹거리며 꾸짖었다고 한다.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세자 이윤이 친모 장희빈 사후 버텨야 했던 이십 년은 그를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고, 육체적으로 탈진시켰다. 

 경종은 이런 세월을 버틴 대가로 33세에 반쪽짜리 왕위에 오른다. 노론이 육조와 비변사, 승정원은 물론이고 의정부와 삼사까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경종이 즉위한 해에 천재지변으로 궁의 문이 손상되고, 흉년이 들자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상의 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노론 유생 하나가 신사년 처분(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일)은 역사에 드문 옳은 행위라는 주장을 펼치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막 나가자는 거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노론은 선비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궤변으로 경종을 시험에 들게 한다. 경종이 대로는커녕 유생의 주장에 수긍하자 노론은 본격적으로 경종의 손발 묶기에 나선다. 

<경종실록, 경종 1년 8월>

 신하 김창집이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아직껏 저사가 없으시니, 신은 대신으로 있으면서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며 말문을 열자 조영복이 본색을 드러낸다.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니 청컨대 속히 윤종하소서."

 무엇을 허락하란 말인가? 노론 신하들이 주장한 것은 놀랍게도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당시 28세)을 왕세제로 봉하라는 것이었다. 왕의 나이 이제 막 서른을 넘었고, 즉위 한지 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동생을 세제로 정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왕을 능멸하는 것이다. 

 연잉군이 누구인가? 훗날 영조가 되는 그는 무수리 출신인 숙종의 후궁 최 씨의 아들이다.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와 무수리에서 후궁이 된 최 씨는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결정적 고변을 한 인물이다. 사가였다면 경종과 연잉군(영조) 두 사람은 원수라고 해도 무방하다. 

 노론 신하들의 요구에 경종이 말까지 더듬으며 그리하라고 대답하자, 노론은 대비의 허락까지 요구한다. 노론 자신들조차 이는 역모에 준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였기에, 여론 회피용과 역모 면피용으로 대비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론 신하들은 경종을 대비전으로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밖에서 기다리며 경종을 압박했다. 잠시 후, 경종이 대비가 합의한 교지를 들고 나와 신하들에게 넘겨주었다.

 "여기 있소!" 


 노론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연잉군을 세제로 올린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경종 1년 10월 10일. 야심한 시각을 틈타 네 명의 노론 핵심 신하가 궁으로 들이닥쳤다. 

 "전하께서 세제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면, 반드시 나랏일에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네 명의 신하들은 막 왕위에 오른 30대 초반의 왕에게 뒤로 물러나고, 동생에게 대리청정을 하라는 압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경종이 이것마저 허락한다면 이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경종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 대소의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하게 하라." 

 경종은 노론이 자신과 친모의 죽음을 능멸해도 참더니, 간과 쓸개까지 내어주며 정치적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종은 이미 세자시절 4년간의 대리청정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낸 준비된 왕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가 심신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 경험으로 정치 9단이 되었다. 또한 300년 넘게 이어진 왕가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노론에게 바짝 엎드린 척하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론이 행한 -신하의 도를 넘는 요구-는 소론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경종은 느리지만 정확한 자리에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의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하 김일경의 상소를 신호로 신축환국을 전격적으로 단행한다.

 "승정원과 삼사에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엄하게 군 죄도 징토를 더하시어 감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국세가 위태로움은 바로 김창집이 권세를 놓지 아니하는 데 있습니다. 그를 비롯한 사흉을 엄히 처벌하시어......." 

사흉이란 야밤에 궁에 들이닥쳐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요구한 네 명의 신하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 경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를 기회로 삼아 나라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노론은 소론의 공세는 예상했을 것이나, 경종의 돌변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종의 신축환국으로 사흉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는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신축환국 이듬해에는 경종에게 노론의 파직에 이어 그들의 목숨을 거두어갈 명분이 주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상전하! 목호룡의 고변이 있어 아래 옵니다."

목호룡!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 인물은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으로 왕실의 토지를 관리하던 인물이다. 그는 노론 대신들의 자제와 친분이 깊은 인물로 노론이 경종의 암살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목호룡의 고변은 구체적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노론은 경종을 살해하기 위한 세 가지의 긴급한 계획 즉 삼급수를 세웠다. 첫 번째 대급수는 자객을 보내는 것이고, 두 번째 소급수는 궁녀를 매수하여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이고, 마지막 평지수는 숙종의 유언을 조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신축환국으로 칼을 뽑아 들었던 경종이다. 더 이상 망설이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조선이 노론의 나라인가?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라.”

1772년 임인년에 일어난 이 일을 임인옥사라고 한다. 귀양 가 있던 사흉을 포함한 노론의 주요 가문이 멸문지화에 이르게 된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목호룡을 제거한다.)


 택군: 신하가 왕을 선택하다. 

임인옥사의 국문 과정 중 드러난 일이다. 노론이 연잉군(영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고, 대비 또한 노론의 뜻에 지지 내지는 최소한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었다. 

그러나 즉위 초기의 경종이 더 이상 아니었다. 위엄 있는 군주로 돌변한 이복형 경종의 처분을 기다리던 연잉군은 제 발로 경종을 찾아간다.

 “신이 어찌 이 이상 세제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연잉군이 흘린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었을까? 살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한 명의 인간으로 느낀 공포의 눈물이었을까? 

 정권을 잡은 소론 신하들은 폐세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경종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사로이는 어머니의 복수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고, 군주로써는 나라의 앞날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경종은 장고 끝에 연잉군을 살려두기로 할 뿐만 아니라 세제의 자리에서도 끌어내리지 않는다. 경종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왕이 되어야 했지만 심성 자체가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경종이 양자를 들이려고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새로운 분란과 환국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연잉군은 경종의 이 선택으로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연잉군(영조)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또는 경종이 죽기 전까지는 심리적으로 쫓길 수밖에 없었다.

 "형님이 나를 용서하셨구나. 이제 안심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 아니다. 형님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른다. 형님의 의중이 변하지 않더라도, 소론 신하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 수는 없다. 차라리.........."

 이제 이야기의 끝을 낼 시간이다. 경종 사망 당시인 1724년 8월로 가보자. 무더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간 쌓인 피로의 누적 때문이었을까? 경종은 입맛을 먼저 잃기 시작하더니 기력을 점차 잃어갔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임금의 병환이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셨는데, 이날은 한열의 징후까지 있어 약방에서 입진 하였다.'

 경종의 병세가 보름간 이어지던 8월 20일, 세제 연잉군이 생감과 간장게장을 경종에게 진상한다. 

 “게장이 아주 입에 잘 맞는구나.”

경종은 오랜만에 수라를 잘 먹고 잠시 기운을 차리는 듯했으나, 그날 밤 갑작스러운 복통과 극심한 설사에 시달리게 된다.

 '본초강목: 대개 게의 경우 감과 함께 먹으면 사람을 복통하게 하고 설사하게 한다. 감과 게는 모두 찬 음식이다.'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병세가 급격히 나빠진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쓰도록 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이에 어의 이공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경종이 먹고 있는 약과 상극인 인삼과 부자를 쓰면 왕이 죽을 수도 있다는 어의의 경고이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고 나선 이는 연잉군이었다.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세제의 불호령 앞에 어의는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인삼과 부자를 먹은 경종의 눈동자가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며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연잉군이 말했다.

 “보아라! 내 비록 의술을 잘 알지 못하나, 기력을 잃은 이에게 인삼이 특효인 것은 알고 있다.” 

 다음 날 새벽 3시, 경종은 곶감과 게장을 먹은 지 5일, 어의의 반대에도 인삼을 복용한 다음 날 승하한다. 이것은 교묘한 독살인가? 아니면 무지에 의한 사고사인가? 혹은 게장이나 인삼과 상관없이 경종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영조는 즉위하던 해부터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많은 소문에 시달린다. 영조 3년, 전주를 시작으로 팔도에 걸쳐 벽서가 붙여진다. 벽서의 내용은 실록에 전해지지 않지만, 영조는 이례적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현상금까지 내건다. 경종 독살설은 당대에는 현대의 우리가 체감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이슈였다.

 1728년 영조 즉위 4년. 

마침내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만다. 충청도 청주에서 장례식을 가장한 행렬이 청주 성으로 향한다. 누구의 장례식으로 위장한 것일까?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주성을 함락했고, 경상도 전라도에서 많은 이들이 거병하며 그 수가 7만에 이르게 된다.

 개화기 문신 이건창이 붕당 정치사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인 당의통략에 반란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군중에는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

이인좌의 난은 경기도 안성에서 진압되었으나, 영조와 노론이 받은 충격은 컸다. 

 영조 31년인 1755년. 

윤지가 주도한 나주 벽서 사건이 또 한 번 조정을 뒤흔든다. 영조가 즉위한 지 무려 30년이 지났는데도 경종 독살설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국문장에서 신치운은 영조를 향해 외친다.

"나는 갑신년(경종이 죽은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소이다. 이것이 바로 저의 역심입니다."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이 마무리되자 특별과거를 시행한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을 토벌한 것을 기념하여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이를 토역정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특별과거의 답안지에 영조를 비방하는 답안지가 제출되고, 또 한 번 피바람이 분다.

 "네 이놈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렇게 영조가 재위 내내 숙원으로 여겼던 탕평책은 완전히 무너진다. 영조의 탕평비를 살펴보자.

 '두루 사랑하고 편당 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당하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영조는 천의소감이라는 책까지 간행하며 자신과 게장의 관련성을 부인해야 했다.

 "그때 경종이 먹은 게장은 (내가 올린 것이 아니라) 왕의 수라를 만드는 어주에서 올린 것이다. 세간에서 하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 숙종이 단단하게 묶은 죽음의 고리를 끓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숙종의 환국은 당대에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자신의 장남 경종, 사도세자의 죽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경종 독살설의 진실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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