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선조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있었음에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못했고, 사지에 몰린 백성을 남겨두고 피란길에 올랐다. 애민정신은 물론이고 뛰어난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들을 죽였으며, 전란 중에 민심을 얻은 자신의 아들마저 경계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였기에 민족의 영웅이 되었지, 살았더라면 선조에 의해서 역적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염치도 없는데 권력에 대한 집착은 어떤 왕보다 강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을 불과 3년 앞둔 1589년, 무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4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이라면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특검으로 사형을 당한 꼴이다. 이는 조선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희생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다. 기축옥사를 기점으로 17세기 서인, 18세기 노론,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지기 되는데, 기축옥사의 발화점이 된 정여립의 난은 정치 공작의 그림자와 조작의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 먼저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선조 대에 이르러 정권을 잡은 사림은 한양의 동쪽인 동대문 인근에 거주하던 동인과 서쪽인 정릉에서 활동하던 서인으로 다시 나뉘게 된다. 율곡이이는 양 당의 중재를 위해 애쓴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궁 밖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고, 일본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았다. 농사로 먹고사는 백성들의 삶은 각종 폐단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조헌의 상소문에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요괴를 일으키는 것이 모두 전대 말세의 변괴입니다. 군사와 백성의 고충이 끝이 없으니 나라가 위태로운데 고치려 해도 때가 늦은 듯싶습니다."
선조 22년인, 1589년 10월 1일, 황해감사가 올린 비밀장계가 조정에 때마침 도착했다. 호남지방의 정여립이 이끄는 대동계가 한강이 얼어붙는 정월에 도강하여, 난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었다. 호남지방에서 계획 중이라는 난을 황해도에서 보고하자,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은 이를 잘못된 고변이라고 생각했다. 정여립을 한양으로 부를 것도 없이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확인을 해 보는 선에서 충분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는 즉각적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혹시 역모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이가 정여립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한 조선시대에 태어난 공화주의자였다.
전주의 명문가인 동래 정 씨 집안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조선시대 평균 과거 급제 나이인 30세 훨씬 이전인 20대 초반의 나이에 급제하였다. 호남 제일의 학자라는 율곡 이이의 지지를 업고 예조 좌랑과 홍문관 수찬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성리학의 세상에 도무지 부합되지 않는 삐딱한 세계관이 늘 문제였다. 정여립은 생각이 다르다면 스승이자 대학자인 이이마저도 비판하였고, 노장사상과 천문, 역법 등에도 관심을 가지는 동인계열과도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공화주의자가 조선의 조정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38세의 나이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정여립이 부귀영화를 버리자 그에 대한 명망은 더 높아졌다. 인근의 고을 수령들은 물론이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여립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여립은 자신을 찾은 사람들과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 서적이나 풍수지리 등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여립의 사랑채는 새로운 지식을 교환하는 플랫폼이자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거대한 장터였다.
정여립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산속의 섬이라 불리던 죽도에 사당을 지었다. 그곳에서 매달 15일 대동계원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무술훈련도 직접 시켰다. 대동계는 양반뿐만 아니라 서얼이나 승려 등 조선에서 외면받던 계층의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전주부윤의 남연경은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정여립은 하루 만에 수 백의 군사를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여립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명성은 부풀려져 팔도로 퍼져나갔다. 조선의 비기이자 금서인 정감록에서 지칭하는 정도령이 정여립이라는 의심은 기대로 바뀌고 있었다.
“뽕나무에서 말갈기가 나면 정팔룡이 왕이 된다.”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한다”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정여립을 지칭하는 듯한 참요가 나돌기 시작했다. 당대는 물론이고 정여립보다 더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은 조선사를 통틀어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정여립은 대동계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지도 않았고, 역모를 꾀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었다. 선조가 손에 쥔 것은 황해감사가 보낸 서찰 한 통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왕명을 받은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이끄는 군대가 정여립을 잡기 위해 호남으로 내려갔다.
역모를 준비한다는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에 다녀오겠다는 말까지 남기고 집을 나선 터였다. 그리고 한양에서 들이닥친 군대에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작은 굴에서 자결을 하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실록이 아닌 다른 기록에는 죽도에서 놀고 있던 정여립을 왕의 군사들이 때려죽였다고도 한다. 자결을 하였건 자결을 당한 것이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랴! 그저 지엄한 왕명이 지켜진 것을!
역모의 주모자로 추정되는 자가 덜컥 죽어버렸으니, 그는 더 이상 죄를 부인할 수도 없었다. 군사들은 역모의 증거를 찾기 위해 정여립의 집과 죽도를 비롯한 곳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문서는 물론이고 무기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역모 조작이 의심되는 점들은 정여립의 난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여립의 난으로 명명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지며 동인선비 천 명이 처형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기축옥사로 마무리된다. 단지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정여립이 역적이 되자 서인들은 기뻐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연려실기술-
정여립의 난을 조사하기로 내정되었던 동인출신의 정언신은 애초에 잘못된 고변이라고 주장하였었다. 단지 오비이락이었을까? 선조는 정언신 대신 서인의 영수 정철을 위관으로 전격 교체한다. 김장생의 송강행록에 따르면 정여립이 죽던 날 송강 정철은 아들의 초상을 치르고 있었으나, 입궐을 서두르며 정여립의 도주를 예견했다고 한다. 그는 한양에서 수백리가 떨어진 전라도의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정철은 정여립의 죽음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선후기인 1740년, 남하정이라는 처사가 쓴 동소만록에는 기축옥사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기축옥사는 송익필에 의해 기획되고 정철에 의해 이뤄졌다.'
송익필은 서얼출신으로 벼슬에 나서지 못했으나, 탁월한 정치 감각과 뛰어난 책략으로 서인의 제갈공명으로 불리던 자이다.
그는 특히 심의겸, 정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기축옥사 당시 기막힌 사연으로 2년째 도피 생활 중이었다. 사연인 즉 슨, 송익필의 아버지가 안 씨 집안을 역모죄로 고발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송 씨 집안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역모가 무고로 밝혀지며 대반전이 일어난다. 신원이 회복된 안 씨 집안에서 송익필의 집안을 상대로 송사를 하는 과정에서 송익필의 할머니가 노비출신임이 밝혀지며, 송익필은 52세의 나이에 느닷없이 노비로 환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부가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것은 근현대의 대한민국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등 그 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각될 경우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정적을 제거하는데 효과적이다. 조선시대에도 충분히 일어났을 법한 일이며 아래와 같은 소설도 가능하다.
서인의 제갈공명이라 불리는 재야의 실력자 송익필은 쉰이 넘은 나이에 노비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나라 전체를 뒤흔들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2살 아래지만 자신의 유비였던 송강정철을 찾아갔다.
"대감! 언제까지 이리 방구석만 지키고 계실 것이오. 다시 주상의 곁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연락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거늘 이리 불쑥 찾아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쯧쯧"
"대감! 나 한때는 서인의 제갈공명이라 불리던 송익필이요. 대감을 다시 정승 자리에 올려드릴 비책을 가지고 왔소이다. 우리 주상께서도 나 같은 서자 출신이라 내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주상이 영원히 동인 놈들과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하시오?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명분만 던져주면 주상은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그 명분이란 것이 그럴싸해야겠지요?"
송익필의 말을 흘려듣던 정철의 눈이 가늘어지며 몸을 그의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무슨 좋은 수라도 떠올랐소? 지체하지 말고 말해보시오."
잠시 뜸을 들이던 송익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사화! 사화를 일으켜 동인 놈들을 내쳐야지요."
문 밖을 한 번 쳐다본 정철도 목소리를 내리깔고 묻는다.
"명분이 있어야 사화를 만들 것인데......"
"역모만 한 것이 있겠소이까, 없는 화살도 만드는 것이 제갈량 아니겠습니까. 명분도 없으면 만들면 되지요. 호남에 낙향해 있는 정여립을 기억하시지요?"
"옳거니! 내 어찌 그 생각을 못 했을꼬! "
서인의 영수와 그의 책사 송익필은 왕의 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였다.
선조에 의해 정여립의 난 조사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정철은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 심지어 서신을 주고받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무려 5백 명의 제자를 거느린 호남의 대학자 정개청의 집에 관군이 들이닥쳤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들이 찾아낸 것은 인근에 살고 있던 정여립과 주고받은 단 두통의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풍수지리에 능한 정개청이 정여립이 집을 지을 때 건넨 조언이었고, 특검에서 문제 삼은 내용은 "당신은 도를 아는 사림이요"라는 단 한 문장이었다. 정개청은 정여립과 역모를 도모하지도 않았고, 그 말은 그저 예의상 쓴 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정철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개청은 유배 두 달 만에 사망하였으나, 정철은 그가 뿌린 씨앗마저 거두어버렸다. 정개청의 제자 500명 중 50명이 죽임을 당하고, 20명이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400명이 과거 자격을 박탈당했다. 현대사회에서 상대 당 정적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수법과 유사하다. 정개청의 제자들이 사라지자 하루아침에 고을 하나가 증발해 버렸다.
정여립의 시신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저작거리에서 다시 찢겼다. 그의 집은 모조리 불태워졌고, 집터를 숯불로 지진 것도 모자라, 연못으로 만들어 수장시켜 버렸다.
눈병이 있던 김빙이란 자는 정여립의 시신이 압송되는 거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눈을 비비다 눈물이 났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전라도사 조대중은 관기와 이별하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정여립을 위한 눈물이라 여겨져 죽음을 당했다.
누구도 감히 정여립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고, 눈물과 울음은 삼켜야 했다. 1950년대 미국의 정치인들을 떨게 했던 메카시즘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정치가 조선 팔도를 뒤덮었다. 감옥에 죄인 아닌 죄인이 넘쳐났고, 추국청에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진 고문으로 귀신의 꼴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모든 죄에 대해 삼심제도를 시행했지만 역모죄만은 단심제로 진행되었다. 참나무로 만든 신장이라는 고문도구는 서른 대 이상을 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정철은 조선의 법과 왕명 사이에 있었다.
동인의 영수이자 정철의 최대 라이벌 이발은 유배지로 끌려가던 도중 압송되어 죽임을 당했다. 두 사람은 과거 이이의 주선으로 만난 적이 있으나,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영수회담은 산산이 부서진 바 있다.
이발의 삼 형제를 비롯한 모든 가족이 추국청에 끌려왔다. 정철은 여든이 넘은 이발의 노모와 10살과 5살 두 아들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발의 장남은 겨우 열 살이었지만 이미 선비였고, 그 고매한 정신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께 배운 것은 오직 충과 효뿐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찌 역모를 꾀했단 말이요."
두 아이는 매질을 견디지 못했고, 여든이 넘은 여인의 몸 위에 깨진 사기그릇이 올려졌다. 그 위에 돌을 얹자 기력이 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돌 위에 다시 사람이 올라서는 압슬형이 내려졌다. 고매한 나리들의 지시에 따라 고문을 가하던 포졸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추국청에서 벌어지던 모든 과정을 기록하던 오성 이항복이 남긴 글을 통해 그 참혹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입이 있으되 말할 수 없고 ,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가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 숨죽여 운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주리.
선조가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을 친국하는 과정에서 베일에 싸인 길삼봉이라는 인물이 언급되었다.
"길삼봉! 길삼봉이 잡히지 않았다. 역도의 무리가 남아있으니 찾아서 그 씨를 말리도록 하라."
길삼봉에 대한 사람들의 진술은 제 각각이었다. 타고난 장사에 무예가 출중하여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그의 나이는 30대에서 60대까지 이르며, 신분도 노비에서 정여립의 최측근이라는 말이 피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정철은 길삼봉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와, 더 심한 고문을 가했다. 지리산 인근에 그가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관군을 보냈으나, 쥐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과연 길상봉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으나 왕명은 멈추질 않았다.
마침내 길삼봉으로 추정되는 이가 압송되어 왔다.
"주상전하! 드디어 길삼봉을 잡아들였습니다."
정철이 잡아들인 이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60대의 학자 최영경이었다.
"어이가 없구나. 네 놈이 권력에 눈이 멀어 무고한 이들을 잡아 죽인다더니 기어이 나에게까지 왔구나. 그래! 그저 내 호가 삼봉이라고 하여 내가 길삼봉이란 말이냐?"
"시끄럽다. 네 놈이 아무리 잡아떼도, 네 놈은 길삼봉이 맞다. 아니 길삼봉이어야 한다."
최영경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다.
삼 년간 이어지던 기축옥사의 피바람이 마침내 멈추었지만 피 냄새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선조는 기축옥사의 희생자에 대해 모두의 예상을 깨는 명을 내린다. 길삼봉으로 몰렸던 최영경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추증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여립을 제외한 대부분 희생자들의 신원을 복권해 주었다. 기축옥사를 통해 정권은 동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갔고, 죽은 이의 명예를 왕이 회복시켜 주니 오직 선조의 꼬리인 정철만이 잔혹한 악인으로 실록에 그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얼마 후, 정철이 무고한 최영경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선조는 정철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는 것을 빌미로 호남지방으로 귀양 보내버린다. 그렇게 기축옥사의 꼬리가 잘려 나갔다. 모든 것이 다 잘 마무리되어 선조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수많은 의병과 백성이 죽어나간 임진왜란에도 그는 천수를 누렸다.
국문장에서 아버지 이발의 무고를 외치다 맞아 죽은 장남의 옆에 있던 5살 차남은 사실 노비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종의 아들과 바꿔치기되어 살아남은 그는 본관을 바꾸어 살아남았다고 한다.
기축옥사 당시 9살이었던 이발의 조카 이원경 또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처형 직전 도주하였다. 그러나 양반집 규수였던 어머니는 얼마못가 죽고 말았고, 어린 이원경은 본관을 버리고 이름을 고친 채 나주에서 살아남았다. 천민과 결혼하여 갖은 고생을 하다 살던 그는 서른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직전 집안의 비밀이 담긴 유서 한 장을 아들에게 남긴다. 그리고 유서는 기축옥사로부터 200년이 훌쩍 지나 후손의 다락방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발견된다.
마을에 역병이 돌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로 한다. 무당은 굿을 시작하기 전 서책을 포함하여 집안 구석에 있는 오래된 물건을 모두 꺼내 태우라는 의학적인 지시를 내린다.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던 사람들이 마침내 그 유서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뿌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