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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Apr 01. 2024

당나라 장군 소정방을 김유신이 죽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의 군사지원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총사령관이었던 소정방의 사망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가 우리 땅에 전해진다. 중국의 기록과 달리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신라 땅에서 그것도 김유신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삼국통일의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통일 전, 신라와 백제는 서로의 가슴과 등에 칼을 꽂고 꽂히는 라이벌 관계였다. 30년간 왕위에 있으며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백제의 26대 성왕은 신라군에 의해서 전사(554년)하였고, 31대 의자왕에 이르러 백제의 복수가 이루어진다. 의자왕이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대야성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신라의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게 된다. 이 전투로 김춘추와 신라는 많은 것을 잃었고,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를 급히 방문한다.

642년, 고구려에서 당시 실권자인 연개소문을 만난 김춘추는 크게 당황하고 만다.

 “이곳을 우리에게 내어준다면, 우리 고구려가 너희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칠 것이다.”

 연개소문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경북과 충북의 경계인 죽령 이북지역이었다. 김춘추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김유신의 도움으로 목숨만 건져 귀국하게 된다. 

 김춘추는 5년 뒤인 647년에는 바다를 건너 왜를 방문한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국의 이해관계는 맞지 않았고,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했을 때,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을 맞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대업을 이루려면 실력뿐만 아니라 하늘이 내린 운과 시기가 맞아야 한다. 김춘추는 당태종뿐만 아니라 그의 후궁인 측천무후에게도 외교술을 펼치며 당나라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방문을 시작으로 긴밀한 외교관계를 이어가던 신라와 당나라는 마침내 군사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660년 3월, 당나라가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무려 13만의 대규모 병력을 출정시킨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다. 외교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오직 자국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본심을 드러냈다.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고 한 것이다. 신라는 무려 당나라와 7년간의 전쟁 끝에 그 들을 몰아내고 통일신라의 문을 열게 된다는 것이 삼국통일의 간단한 개요이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소정방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으며, 그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당나라 명장이다.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서안)이었다. 장안의 화제란 말이 현대 한국 사회에도 이어질 정도로 당시 장안과 당나라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태종은 돌궐을 제압하고, 페르시아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이다.

 소정방은 늦은 나이인 당 태종 때에 장수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657년 서돌궐 정복과정에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고, 669년 돌궐 정복 후 왕을 생포하며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각인시킨다. 백제 의자왕 또한 소정방에 의해서 당나라로 끌려가고 만다. 이러한 공로로 소정방은 당나라에서 형국공에 봉해지는데, 공은 당나라 황실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작위이다. 

 소정방은 당나라 역사의 위대한 장군이자, 우리 역사와 설화, 문화유적에도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옛 백제 지역인 부여 인근을 흐르는 백마강에는 소정방에 얽힌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소정방은 사비강을 지키던 용을 죽여야만 백제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강을 지키는 용은 백제의 의자왕이 변신하였던 것이다. 소정방은 그 용이 백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백마를 낚싯대에 꿰어 용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 강을 백마강, 용을 낚은 무릎 자국이 남아 있는 바위는 조룡대라고 하며 그 지명이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이 외에도 용이 날아갔다는 용전리, 낚인 용이 떨어지자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는 거문내 등 이 있다.

 소정방은 설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적에도 남아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서 유일하게 제자리에 서있는 유물은 정림사지 석탑이다. 소정방은 오 층 석탑의 1층 몸돌에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 이란 글씨를 선명하게 새겼다.

 우리의 설화뿐만 아니라 유적에도 각인되어 있는 소정방이 신라군에 의해 살해된 후 비밀리에 매장까지 되었다고 하는 말은 점점 믿기 어렵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일까? 경상북도 문경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하자. 


<당교(뙤다리)가 소정방의 무덤이다?>

 경상북도 문경시청에는 당교사적비가 있다. 여기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문경시 모전동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의 경계가 되는 모전천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의 군사들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다리가 당교라는 것이다. 

 소정방의 죽음에 관한 비슷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더 구체적이다.

 '신라 옛 전기에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물고 있으므로, 유신공이 그 꾀를 알고 당병을 대접하면서 짐주를 먹여 죽여 쓸어 묻었다. 상주 경내에 있는 당교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살해동기, 살해에 쓰인 독의 종류, 시체 유기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역사서에는 소정방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고려의 문신 이규보가 지은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서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경주 지방 민란을 진압하면서 소정방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며 쓴 제문이다. 

 '소정방 장군은 불행히도 우리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수레가 서쪽으로(당나라) 돌아가지 못해 떠도는 영혼이 되었으므로 사당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소정방의 사당이 대흥군 대잠도 (지금의 충남 예산)에 있고,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왜 고려인들은 소정방의 사당까지 만들어 제까지 지냈을까? 비록 적군이었지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이의 한을 달래주려는 것이었을까? 신라시대 이후 세월이 흘러 왕조까지 바뀌었음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정방의 죽음에 관한 중국 측 기록을 살펴보자.

중국의 기록에는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병사했다는 간략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공로에 비해 지나치게 간략하다. 소정방 급의 장군이 죽게 되면 장례절차, 예우, 식읍을 내린 내역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최소한 사망 원인이라도 기록되어야 하나. 소정방은 예외이다. 더군다나 중국 현지 어디에서도 소정방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 

 혹시 소정방이 동맹군인 신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소정방의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는 천년도 넘게 지난 오늘날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신라는 무려 7년간이나 당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고, 당 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한 676년에야 통일신라의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당 나라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까지 자신들의 통치기관인 계림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검은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혹시 김유신과 김춘추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형님! 당나라 놈들이 무슨 속셈으로 이 땅에 들어왔는지 아시지요? 일단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고 나면 저 것들과 단판을 내야 합니데이. 소정방을 살려 보내서는 안 됩니다."

"걱정 마라. 나 신라의 화랑 출신 김유신이다. 건방진 소정방은 반드시 내가 쥑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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