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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May 13. 2024

왕건의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나?

943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하 박술희를 내전으로 은밀히 불러 열 가지 유훈을 구슬로 남겼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대를 이을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의 주요 내용은 왕위 계승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불교나 풍수지리, 외교 등 당시의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그런데 제8조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과 땅이 모두 배반하니 그곳 사람 또한 배반한다. 조정에 들어오면 변란을 꾀하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키니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벼슬을 주지 말라.’

 삼국을 통일한 왕의 입에서는 나왔다고 믿기 힘든 내용이다. 지방 호족과의 연대를 위하여 스무 명이 넘는 부인과 혼인을 하며, 나라의 통합을 위해 애쓴 왕건이 왜 특정 지역을 배척하는 유언을 남겼을까? 왕건은 옛 백제 지역이자 오늘날의 전라도에 해당하는 지역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을까? 혹시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다한들 삼국을 통일한 인물이 할 법한 말은 아니다. 조작설까지 나오고 있는 왕건의 훈요십조 중 제8조의 감춰진 진실은 무엇일까? 

 학계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왕건의 건국이념과 인생 행적을 들어 왕건이 이런 유훈을 남겼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훈요십조의 조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8조의 내용에 배치되는 내용들을 살펴보며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보자.


<풍수지리와 지리적 관점>

 차령이남과 공주강 밖은 지정학적으로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며, 산과 땅이 모두 배반하니 는 풍수지리에 기반을 둔 해석이다. 

 풍수지리 관점에서 보면 후백제 지역인 금강(공주강) 일대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형세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경상도지역인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또한 이런 형세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보면 왕건과 고려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의 인재도 등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두 지역의 인재는 중용되어 왔다. 

 전라도 나주는 삼국시대 당시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의 견훤과 왕건은 나주지역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양측의 탈환이 반복된 지역이다. 나주를 통해 왕건이 얻은 것은 고려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태조께서는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한 뒤, 그 바다와 섬에 이익을 모두 얻었고, 그 힘으로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다”

 삼국 통일 전, 궁예의 관심법을 피해 왕건이 스스로 내려와 훗날을 도모한 지역도 나주이며, 이곳을 기점으로 제4국의 건국을 고려할 정도였다. 나주는 왕건이 자신의 울타리 같은 곳이라고 회상을 한 지역이다.

 훈요십조 8조는 전라도 출신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왕건은 과연 자신의 말을 지켰을까? 

 조선건국에서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정도전을 빼놓을 수 없듯이, 고려 건국에 왕건과 더불어 도선대사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 말부터 불기 시작한 풍수지리사상은 태풍을 넘어 고려 건국의 주요 사상이 되었다. 한국사 최초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사상가이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고 왕건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고려 백성들에게 국사로 추앙받은 도선대사의 고향은 전라도 영암이다.

 고려판 노스트라다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 최지몽이다. 그의 본명은 최총진인데, 어려서부터 모든 학문에 능통하였다. 특히 천문과, 주역, 점복에 매우 능하였다. 이 천재 술사는 동네의 대소사를 미리 예측하며 그 명성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왕건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내 며칠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꾸고 있다. 네가 이 꿈을 풀이할 수 있겠느냐?”

 왕건 앞에선 18살의 최총진은 장차 삼한을 통일할 길몽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너의 해몽이 반드시 맞기를 나도 바란다. 내 너에게 지몽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내 곁에 머물도록 하라.”

 최지몽은 삼국통일 이후에도 태조 왕건의 곁에 머물렀고, 2대 왕 혜종 대에도 그 비범함으로 왕의 목숨을 구한다.

 “오늘 밤 급히 처소를 옮기셔야 하옵니다. 역모의 무리가 급습할 것입니다.”

최지몽의 말을 들은 혜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최지몽 역시 전라도 영암출신이다. 

 왕건에게 전략적 조언, 심리적 도움을 준 이들이 많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를 구한 이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이다. 후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왕건은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대구의 팔공산에 이르렀다. 50대의 왕건과 60대의 견훤은 서로를 꺾어야만 통일왕국의 주인이 될 거라는 것도, 그 꿈이 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팔공산 전투의 승자는 견훤이었고, 왕건은 백제군의 매복에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 백제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왕건은 죽음을 예감했고,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그때 신숭겸 장군이 왕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마지막으로 형님이라고 한 번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몸은 고되었지만 복되었습니다. 저는 먼저 가지만 형님은 반드시 살아남아 삼한을 통일하십시오. 저승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형님 옷을 입고 죽고 싶습니다.”

 신숭겸은 왕건과 비슷한 용모였다고 한다. 왕건은 신숭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 살아남았고, 끝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팔공산에는 이 날의 여운이 지명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지묘동은 신숭겸의 지혜로운 묘책을 뜻하는 지명이다. )

 왕건은 신숭겸에게 장절이란 시효를 내리고, 그를 기리기 위한 절까지 지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묏자리까지 내주었다. 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은 목이 잘렸고, 목이 없는 시신만 겨우 수습한 왕건은 금으로 그의 얼굴을 만들게 했고 도굴을 염려하여 무려 세 개의 봉분을 만들게 했다.

 형제가 없던 왕건은 신숭겸을 잊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슴에 품고 살았다. 문무백관이 모두 모였을 때 허수아비 신숭겸을 자신의 곁에 세워놓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아우님! 내가 해냈네! 이 못난 형이 해냈단 말이네. 자네도 한 잔 받게나.”

평산 신 씨의 시조가 된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출신이다. 

 왕건의 구슬을 글로 옮겼다고 알려진 신하 박술희는 2대 왕 혜종의 최측근이며, 혜종의 외가는 전라도 나주이다.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면 박술희는 왕건에게도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신하에게 나의 스승 도선대사와, 나의 형제 신숭겸, 나의 아들의 외가 지역 인물을 절대 등용하지 말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 의문으로 가득한 훈요십조의 발견 당시로 돌아가 보자.

 1110년, 거란의 침략으로 훈요십조를 포함한 고려의 많은 역사자료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현종은 고려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정 전체가 매달린 대 편찬 작업이 막 시작 될 무렵, 사라졌던 훈요십조만(?)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 최승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라진 훈요십조는 최재안이 최항의 집에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 왕께 바쳤다. 그럼으로써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의아한 부분이 있다.

첫째, 고려 태조의 유훈이 어찌하여 궁이 아닌 신하의 집에서 발견되었는가? 둘째, 최승로는 신라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최항은 최승로의 손자이다. 발견자 최재안 또한 신라계 인물이며 최항과 함께 새 역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정치적 목적으로 훈요십조의 제8조가 조작되었다는 명백한 물증은 없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보시다시피 너무나 많다. 왕건이 평생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다 죽음을 앞두고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훈요십조 8조와 왕건의 인생 발자취는 너무나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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