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해방이 된 조국으로 환국하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한국의 공식정부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아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나라를 되찾는다고 즉시 회복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임정의 인사들 중에는 김구와 이시영뿐만 아니라 훗날 반민특위위원장에 임명되는 문화부장 김상덕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상덕은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조선독립청년단을 이끌었고,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외쳤다. 이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변절 전의 이광수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며 한 인간의 항일, 친일 문장을 모두 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두 젊은이는 중년이 되어 만나고 싶지 않은 장소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이후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김상덕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비롯한 무장투쟁을 하다 1942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 후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친일 매국노를 응징하기에 떳떳한 이력과 담대함을 고루 갖춘 안성맞춤의 인물이었다.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그동안 네 놈들이 호위호식하고 있을 때 우리 백성들은 헐벗었고, 독립투사들은 네 놈들에게 쫓겨야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받은 만큼만 돌려주겠다. 그리해도 네 놈들은 한 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1947년 간행된 수도경찰 발달사의 기록을 보자. 친일 경찰이야말로 치안기술자라고 헛소리를 떠든 악질 고문 경찰 장택상이 경찰 서열 1위인 총감이었고, 뒤를 이어 고문관 최연과 관방장 노덕술까지 경찰 서열 탑 3가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위 이상의 간부 1150명 중 80%가 넘는 949명, 하급경찰의 30%가 친일경찰이었으며, 서울의 10개 경찰서장 중 무려 9명이 친일경찰이었다. 해방 직후 경찰은 21세기 대한민국 검찰의 힘을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조직이었다. 일제의 개가 되어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하여 죽인 대가로 악취가 진동하는 권력을 손에 쥔 집단이었다.
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주군 출신과의 원용덕이 초대 헌병사령관, 일본 육사 49기 채병덕이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 판국이니 광복군 출신 군인들은 진급은 물론이고 오히려 차별을 받아야 하는 웃을 수 없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어이없는 병폐는 광복 후 3년간 실시된 미군정에서 비롯되었는데, 미국의 하지 군정 장관의 말에서 의문이 풀린다.
“일본을 위해 일한 사람은 미국을 위해서도 일을 잘할 것입니다.”
미군정은 사적 복수로 치안이 어지러워질 수 있다며 친일파의 처벌을 단호히 거절했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우리 국민을 괴롭힌 놈들을 그냥 두는 것도 모자라 그 자들의 지배를 또다시 받으라는 것이 말이나 되오?”
“말이 안 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당신네 정부가 세워지면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우리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이 땅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 미루어졌다.
지옥문 앞에 일렬종대로 줄 세워져 있던 매국 친일파들은 미군정 덕분에 피 묻은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뜨거운 살기에 마주 서게 되었다.
1948년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 101조에 의거해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마침내 제정되었다.
'단기 4278년 (1945)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는 정치활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무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소장파로 분류되는 독립군 출신의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반민법 통과가 가능했다.
한편 한민당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전직 독립운동가 출신 이승만대통령은 거부할 수 없는 시류에 편승할 것인지 대의를 물리적인 힘으로 거부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1948년 10월 12일 반민특위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반민특위는 특별재판부, 특별 검찰부, 특별경찰대로 구성되었는데 행정부와 별도로 조사권, 기소권, 체포권, 판결권까지 가지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출범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위원장님! 이 정도면 충분히 싸울 만합니다. 여전히 고문경찰과 만주군 출신이 경검을 장악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국민들의 지지가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끼니도 못 먹어가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 정도면 너무 호사스럽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서 친일파 놈들을 하루속히 법정에 세우겠습니다.”
“다들 의욕은 높이 사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오.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조사위원의 자격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자로 정의하였다. 특별재판부에는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 검찰부에는 권승렬 검찰총장이 임명되었고, 김상덕 위원장의 직속으로 40명의 특경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친일파가 장악한 경찰 소속이 아닌 내무부에서 차출되었다.
또한 친일파는 서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9개도의 조사부에서 지역의 친일파를 검거하기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다. 드디어 독립군과 친일파간 제2라운드의 서막이 올랐다.
“위원장님! 우선 검거대상자는 친일파군상에 명시된 263명을 기초로 하여 작성했습니다.”
“좋소이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놈들도 있을 터이니 국민들의 적극적인 신고 접수도 받도록 하시오.”
반민특위 출범 전부터 시중에는 마치 시험 족보처럼 악질 친일파 명단이 돌았는데 이는 임시정부 국무의원이었던 김승학에 의해서 작성된 친일파 군상이었다. 또한 각 지역에 신고함을 설치하였는데, 목포에서는 한 친일파에 대한 진정서가 무려 6 천통이 접수되었다.
반민특위 전남 조사관이었던 백재호 선생의 증언은 짧지만 당시 민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절대적이었죠. 절대적이었습니다.”
반민특위 사무실로 먹을 것을 가져오고 박수를 치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언론까지 동참하니 반민특위는 웅대한 꿈을 꾸었다.
“여러분 마음 저희도 잘 압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잡아 처단하고 싶지만, 법 절차를 따라야겠지요. 저 들이 일제에 빌붙어 모은 재산도 환수하고, 죄가 있는 놈들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엄하게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의 주요 조항은 아래와 같다.
1조 한일합병 협력, 주권침해조약 조인 또는 모의한 자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과 재산몰수
2조 : 일본으로부터 작을 받거나 일본제국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과 재산몰수.
3조 : 일제 고등경찰로서 독립운동자와 가족을 살상, 박해,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과 재산몰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제정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파가 처단된다면 독립운동을 하다 죽어간 독립투사들과 죽지 못해 살아남은 국민들의 다친 마음을 조금은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다.
전 국민의 눈길이 반민특위에 쏠린 가운데 제1호로 반민특위에 끌려온 인물은 악질 순사가 아닌 조선 최고의 기업가 박흥식이었다.
박흥식은 종로 한가운데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 백화점의 소유주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든든한 돈줄이었다.
“총독 각하! 여기 약소하지만 제가 돈을 좀 마련했습니다. 대 일본제국의 병사들이 몸을 던져 싸우는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니! 이렇게나 많이? 대 일본제국은 공의 노고와 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가 다 대일본 제국의 번영을 위한 것인데요. 아 그리고 그 옆의 작은 가방은 총독님께 드리는 제 마음입니다.”
박흥식은 일제가 우리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동양척식회사의 감사를 역임한 것은 물론이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 공업을 설립하여 일본의 마지막 발악에 최선을 다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봐! 어떨 거 같나? 일본이 지면 큰일인데? 설마 지지 않겠지? 일본이 어떤 나라인데. 그럼 잘 될 거야! 엉! 내가 또 이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으니까 말이야! 전쟁이 길어지면 결국에는 우리 일본이 이길 거야.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박흥식은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일본으로 도주하기 위해 사라졌으나 며칠 후 발각되어 반민특위 특경대에 붙잡혔다. 그리고 논리에 맞지도 않는 궤변을 토해냈다.
“야! 이 손 안 치워? 내가 무슨 친일파야? 나는 그저 사업가라고 사업가. 그리고 감히 니들이 날 재판 할 수 있을 거 같나? 두고 보자고. 내 오늘은 일단 따라가 준다.”
1949년 1월, 최린이 검거되었다. 그가 특별재판장에 들어서자 장내가 술렁였다.
“저 사람은 어쩌다 여기에 왔데?”
“원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기려는 인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 쉽게 변절하는 법이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양반은 33인 중의 한 사람 아냐?”
친일파 최린이 들어선 재판장의 뒤에는 독립선언문이 걸려있었는데, 최린이 포함된 33인의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최린은 박흥식을 포함하여 줄줄이 소환되는 친일파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나를 여기서 재판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광화문 사거리로 끌고 가 황소 네 마리로 나의 사지를 찢어 죽이시오."
최린의 변절은 일제의 치밀한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1921년 12월, 수감되어 있던 민족대표 중 일부가 가석방되었다.
“최린 선생님? 날이 많이 춥습니다. 일단 저희와 함께 가서 잠시 몸을 녹이시지요.”
“당신 누구요?”
“선생을 해칠 작정이었으면 가석방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심하시고 가셔서 잠시 저희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1910년대 무단통치로 조선 백성을 억누르던 일제는 1919년 3.1 만세 운동으로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조선 2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방식은 온화해 보이지만 영속적인 지배를 위해서는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총통각하! 저 악질 33인을 갈아 마셔도 모자랄 판에 가석방이라니요? 이럴 때일수록 본때를 보여줘야 감히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을 못할 것입니다.”
“일단 거기 좀 앉게. 자네는 조선이 왜 망했다고 생각하나? 다수의 백성이 몽매해서? 아니야. 소수의 지도층이 부패했기 때문이야. 반도에 사는 민초들은 왕이 자기들을 버리고 강화도로, 의주로 줄행랑을 쳐도 자기들이 사는 땅을 스스로 지켜냈어. 임진년에 왜 우리가 실패한 줄 아나?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던 명나라 군 때문에? 전쟁을 예측하지도 못한 조선 조정이 느닷없이 각성해서? 이순신과 의병들 때문이지.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네. 조선을 대일본제국에게 갖다 바친 것이 누구인가? 소수의 조정 대신들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방도로?”
“조선인들은 천한 것들조차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묘한 족속이야. 장터에 나와 만세를 부르는 기생들을 보았나? 이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해. 스스로가 귀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오히려 포섭하기 쉽다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대 일본제국의 편에 선다면 이 땅의 백성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나? 지금 조선을 대표하는 자들이 33인 아닌가. 그 들 중에 우리에게 협조할 만한 자 대여섯을 데려오게. 한 명 정도만 넘어와도 우리는 남는 장사야.”
최린은 그렇게 유다가 되었고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자리에 올라 전국을 돌며 학도병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사장님! 오늘 연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라고 외치실 때는 마흔이 넘은 저마저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1926년 최린이 일본인 아베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의 변절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합니다.’
최린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자치권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린이 호위호식하며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순간에도 자신의 가정과 목숨은 버렸지만 독립은 포기하지 않은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독립투사들이 승산이 적은 싸움을 이어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독립이나 민주화 혹은 사회적 성공이건 무언가를 반드시 쟁취하거나 상대방과 싸워 꼭 이겨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리하다고 여기면 쉽게 포기하거나 심지어 변절한다. 만인의 행복이 아닌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
그러나 승리나 목표달성에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그저 마음이 불편해서 일어난 사람들은 더 단단하게 오래 버틴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전자에 속하는 자들은 소위 말하는 기득권층이 경우가 많다.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당시 1,005명의 친일파 중 무려 313명이 일체 치하 최고위 직인 중추원 참의였음이 밝혀졌다.
문인 이광수가 체포되기 전날 반민특위 사무실은 평소와 달리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정철용 조사관! 내일은 누구를 연행하기로 했소?”
“저.... 세금정 자택에 있는 작가 이광수 차례입니다.”
“...................”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한 살 아래였던 이광수에 대해서 복잡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혈기왕성한 20대 시절 조선독립이라는 꿈을 향해 함께 달려가던 친구이자 동료였다. 천재적인 글 솜씨로 적진의 심장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던 그가 어찌하여 반민특위의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 김상덕은 알 수 없었다.
“알겠소. 오늘도 수고들 하셨고, 내일도 수고들 하시오.”
이광수 체포에 참가했던 정철용 조사관은 이광수의 입에서 회한이나 후회의 말이 아니면 최소한 변명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광수가 자택에서 끌려 나오며 쏟아낸 말은 통탄이 서린 탄식이었다.
“아! 해방이 일 년만 늦었어도 우리는 모두 황국식민이 되었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화가 난 정철용 조사관이 창씨개명을 한 이광수를 향해 그의 일본 이름을 부르자 이광수는 ‘하이’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냈다.
"성전의 용사로 부름 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있으랴? “
-1943년 매일신보 이광수 사설 중-
고문귀신이라 불리던 노덕술이 체포되던 날에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선생님! 저 놈은 나에게 주시오. 저 놈은 내 손으로 쳐 죽여 될 놈입니다.”
“에라이! 일본 놈보다 더한 악귀 같은 놈아! 우리 아들 살려내라. 네가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냐!”
“이놈아! 이 개 만도 못한 놈아! 우리 누이 살려내라.”
당시 항간에는 일제 치하 독립군에 가한 고문기술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아닌 노덕술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한 생존자들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순서를 기다리거나 고문당하는 동료를 지켜보는 것이라며 당시를 고통스럽게 회고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노덕술은 3.1 운동 이듬해에 말단 순사가 된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모두가 노덕술처럼 살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노덕술은 현실을 부정하고 세상의 정의를 외면하며 자신만을 위해 타인의 삶을 갈취하며 승승장구했다.
1945년 당시 평양경찰서장이었던 노덕술은 명백한 친일행적으로 소련군에게 구금된 후 풀려나자 주저 없이 38선을 넘었다.
“빨갱이 새끼들하고는 같이 일을 못 하겠구먼.”
당시까지 희미했던 선아래 남한의 수도경찰청장은 고문기술자 노덕술을 두 손 벌려 환영했다.
“아이고! 이게 누군가!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소. 이제 여기서 자네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게. 해야 할 일이 많아.”
이념과 사상과 각자의 생각이 격돌하던 시절이었다. 권력자와 다른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던 암흑의 시기였다. 그래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꿈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 친일파 경찰이 해방된 나라에서 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망령된 일이 벌어졌다.
노덕술은 김원봉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체포 당시 화장실에 있던 김원봉에게 옷을 여밀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어이! 김원봉! 그 유명한 의열단의 김원봉 맞지? 낄낄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네.”
“네 이놈! 일제의 앞잡이로 살아온 놈이 감히 내가 누구라고.”
“이 양반이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보네. 나 여전히 경찰 노덕술이야. 해방이 된다고 세상이 휙 바뀌어서야 쓰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도망갈 이유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나갈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라.”
“지랄하고 있네. 뭐 하느냐! 당장 끌어내지 않고!”
화장실에서 끌려 나온 김원봉에게 수갑이 채워졌고, 일본군조차 떨게 하던 의열단의 김원봉이 해방된 나라의 친일 경찰 앞에 무릎이 끓여졌다. 의열단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친일경찰에 당한 수모에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김원봉 한 사람의 눈물이었겠는가!
“내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땅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네. 그런데 우리 땅에서 친일파 손에 수갑을 차고 뺨을 맞다니 이럴 수가 있나?”
친일파 특히 일제 순사에 대한 민심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순항할 것만 같던 민족의 염원을 가득 실은 반민특위호는 사실 출항 전부터 커다란 암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수 없다. 나 같은 애국자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밀정이 아니라 반공주의자다." 밀정혐의로 체포된 이종형이 목소리를 높인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반민특위 출범을 20여 일 앞둔 날,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반공 구국 총궐기 정권이양 대 축하 국민대회’라는 명칭도 이상한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시위대의 구호를 들어보자.
“친일청산은 나라를 분열시킨다!”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이는 모두 공산주의자다!”
이 대회는 과격 우익단체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었다. 내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고 국무총리와 대통령이 축사를 전달한 집회였다.
이런 식의 반공대회는 반민특위 출범 후에도 이어졌다.
“민족을 분열하는 반 민족 안을 철폐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
파고다 공원에서 펼쳐진 반공대회를 주도한 인물은 놀랍게도 서울시경의 사찰과장 최운하로 밝혀졌고 그는 즉시 구속되었다. 그러자 친일경찰들이 최운하 과장의 구속에 집단 사표를 제출하며 실력행사에 나섰다.
반민특위에 의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진 친일파들은 천인공노할 암살계획도 수립했다.
“박 사장님! 이대로 우리가 죽어서 되겠소? 좋은 생각이 있기는 한데.”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만 하시오. 그나저나 믿을만한 자는 있소? 아무래도 경찰 내부에서 움직이기는 부담스러울 텐데.”
“백민태라고 쓸 만한 자로 이미 준비 해났소.”
“어찌할 작정이오? 계획이나 들어봅시다.”
“역시 빨갱이로 모는 게 제일 쉽지 않겠소? 반민특위 간부 놈들을 싹 잡아다 38선 근처로 끌고 가 죽여 버리고, 월북하려던 빨갱이 놈들을 잡으려다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하면 될 것이오.”
“역시! 잘 알아서 하시오. 이런 일은 당신이 전문가이니.”
그러나 친일파들의 반민특위 위원 암살계획은 백민태의 자수로 물거품이 되었다. 백민태의 진술에 따르면 암살계획은 노덕술의 주도로 대한일보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 등이 계획했다고 한다.
반민특위를 향한 공세는 지지세력 제거로 이어졌다. 반민법을 앞장서 제정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긴급체포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에도 암약하고 있는 것이 최근 조사에서 발각되었습니다. 이 들은 남로당의 빨갱이 프락치들로서 엄중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비록 국회의원이지만 변호인의 접견을 금지하고 헌병사령부에 수감하여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반민법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을 고문한 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친일파들이었다. 3차례에 걸쳐 15명의 국회의원이 구속되었다.
1949년 6월 6일은 반민특위를 향한 총공세가 이루어진 현충일만큼이나 무겁고 슬픈 날이다.
대한민국의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특경 대원들의 총기를 압수하고, 반민특위 전원을 연행했다. 반민특위에서 검거한 반민족행위자 688명 중 1/3이 친일경찰이었다. 척결대상이 가장 큰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경찰 그 윗선의 비호가 없었다면 감히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을 움직여 반민특위라는 헌법기관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틀 후인 6월 8일, 반민특위의 해체를 자신이 지시했다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자백했다.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같은 달 26일 일명 6월 총공세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범김구가 안두희에 의해서 암살당한 것이다. 배후로 만주군 출신 장은산이 지목되었고, 친일파 일본헌병출신이자 특무대장 김창룡 등이 그의 뒤를 봐주었다고 하나 누구도 처벌되지 않았고, 진실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의 대한민국에서는 사건의 해결이 필요하지도 더러운 사실이 밝혀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를 쏜 자들은 세월이 지나면 미스터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신이 난 대한민국 정부는 반민특위법의 공소시효를 1950년에서 1949년 7월로 단축시키는 법 개정을 실시하였다. 한 달 동안 반민특위 위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49년 9월 5일, 반민특위는 기념 사진한 장을 남기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민재판부에 소환된 680여 명의 친일매국노 중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고작 41명이었고, 그 마저도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다. 치욕의 역사에 기여한 인간들의 완벽한 부활이었다.
매국 친일파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불렸던 박중양이다. 그는 3.1 운동 때 만세를 자제하자고 ‘자제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총독부의 훈장을 받았고, 일본이 벌이는 각종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 임전보국단에서 최선을 다하더니 마침내 단 7명의 조선인에게 그 자리를 허용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에 입성하였다.
그는 일제치하 높은 자리에 있으며 뇌물을 받지 않는 청백리로도 이름을 떨쳤는데 조선인의 몸에 일본인의 영혼이 인식된 완벽한 일본인이었다. 생전 그가 남긴 말을 통해 그의 생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존경하는 가쓰라 수상에게, 하루라도 빨리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여 이를 행할지라도, 한인은 이에 반항할 실력이 없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 “
"그렇소! 나 친일파요. 그러나 조선보다 문명국인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것이오.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백성을 구한 사람이오. 친일이 곧 애국이오."
일본의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신념이 곧지만 끝내 피는 바꿀 수 없는 조선이었다.
아래의 말 중 하나는 박중양의 회고록에서 나온 말이고, 다른 하나는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인의 말이다. 누구의 말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일제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헛소리이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
대한민국은 친일파에 대한 물리적 처벌에도 실패했고, 매국 친일파의 정신적 단절도 이루지 못했다.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독립 운동가들을 무슨 낯짝으로 대할 것인가? 이는 단순한 과거의 회한이 아니다. 독도가 지워지고 있고,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는 실재하는 위기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