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정한론의 창시자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뿌리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일본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의 정신적 지주이다. 3세기에 일본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이미 정벌하였다는 전설을 진실로 믿는 망상가요, 허튼소리를 외치다 서른에 처형당한 무모한 행동가였다.
어린 그의 말은 확신에 찼지만, 망령된 것이었고, 목소리는 강경했지만 생각은 빈약했다. 좁은 열도 내에서도 소수의 것이었고, 넓은 세상의 다수에게 해를 끼치는 악성 종양이었다. 그러나 헛되지만 이른 그의 죽음은 어긋난 신화가 되었고, 좀약을 먹고 자라는 기괴한 벌레들을 낳았다.
이토 히로부미, 아베 신조에 앞선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며, 쇼인이 그린 죽음의 바둑판에 놓인 대마이자, 욕망의 제국을 꿈꾸는 일본의 총리대신이다. 이토는 오이소 해변의 저택에서 바다 건너 조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바다를 보며 조선의 바다와 청과 러시아의 땅을 욕망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벅찬 것이었고, 전리품은 찬란했다. 2억 냥에 달하는 배상금과 대만을 비롯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특히 뤼순항을 품고 있는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만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 줄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부터 이십 년째 공을 들여온 조선이라는 고지에 깃발을 꽂을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토가 공들여 놓은 한 수는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밀린 러시아가 동쪽으로 눈을 돌리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 하나의 시간에 여러 개의 계절을 품은 나라 러시아의 황제가 뜨겁게 열망하는 것은 얼지 않는 바다였다. 유럽과 접해있는 러시아의 바다는 일 년에 절반이 얼어있었다. 부동항을 갖지 못하면 바다로 나아갈 수 없었고, 하늘이 전장이 되지 못한 시대에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면 제국이 될 수 없었다. 크림반도를 얻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것은 그곳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얼지 않는 바다의 항구를 차지하기 위한 피 부림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사활을 걸었다. 지구 둘레 1/4에 이르는 9천 킬로의 동쪽 종착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바다로 뛰어들려는 러시아와 땅으로 기어오르려는 일본 사이에 병든 청나라와 병들어가고 있는 조선이 놓여 있었다.
1895년 4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을 등에 업은 러시아가 일본의 외무성을 항의 방문했다.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이 노쇠한 청과 병약한 조선의 독립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고양이 입에 물린 쥐를 걱정하는 꼴이며 악의가 또 다른 악의를 힘으로 억누르는 형국이었다. 야망이 컸던 이토는 며칠간 고민했지만, 약삭빠르게 현실을 인지하고 비굴하게 물러났다. 일본이 채 씹기도 전에 토해낸 요동반도의 항구와 만주 철도부설권은 러시아의 차지가 되었다.
조선의 왕과 그의 정치 동조자인 왕비는 빠른 선택이 절실했고, 표면적 힘의 우위를 보인 러시아를 택했다. 청일전쟁 이전 해 경복궁을 점령한 바 있는 일본의 저의는 분명해 보였고, 먼 나라인 러시아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예시를 지워버린 것이다. 왕비 살해 음모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주한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신하들의 자리가 친러 인사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왕과 왕비는 러시아의 주요 인사를 빈번하게 만나며 이토에게 자신들의 속내를 확연히 드러냈다.
이토는 요동반도를 토해낸 것보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쪼그라드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조선을 잃는 것은 모든 시작의 종말을 의미했다. 혈기가 남아있던 오십 대의 이토는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조선에 나가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본국으로 불러들인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예리하고도 강한 조치가 필요하오.”
“단검 같은 사내가 있습니다.”
“상징은 상징으로 남겨두어야 하오. 다만 그와 가까운 자여야 하오. 수족이 잘린 고통과 닥쳐올 두려움이 극에 달해 감히 우리에게 다시는 맞서지 못할 마음조차 품지 못하게 할 충격적인 것 이어야 하오.”
1895년 을미년,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군인 출신인 단검 같은 사내 미우라 고로가 조선의 새로운 영사로 부임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에서 기르던 수염까지 자르고 조선에 발을 디뎠다. 자신의 발령 이유를 인지하고 결심까지 세운 미우라 고로의 행보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경복궁을 들러 왕과 왕비를 알현한 그는 얼마 후, 한성 신보 사장 아다지 겐조를 은밀히 불렀다.
한성신보는 일본 수뇌부의 철저한 계획 하에 창간된 신문으로, 일본 외무성에서 창립금과 운영자금을 지원하였다. 조선인의 눈을 속이고 귀를 현혹시켜, 자신들이 행하려는 불법적인 일에 합법성을 부여하는데 신문만 한 것이 없었다.
구마모토 출신의 아다치 겐조는 이미 제국주의 사상에 완전히 경도된 인물로 미천한 언론사 경험과 30세라는 나이와 상관없이 한성신보의 사장으로 제격인 인물이었다.
1895년 10월 한성의 술집에 두 명의 일본인과 한 명의 조선인이 자리를 함께 했다.
“신문사에는 마음이 준비된 자가 몇 명이나 있나?”
“일을 행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입니다.”
한성신보의 사람들은 양손에 칼과 펜을 쥔 무뢰배이며 기자였다. 미우라 고로의 시선이 조선인 우범선에게 닿자 주저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조선을 위해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입니다.”
우범선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경복궁의 훈련대 대장이었다. 왕과 왕비는 훈련대 대신 자신들의 관할에 친위대를 따로 두었다. 신사유람단으로 짧은 시간 일본을 둘러본 우범선은 조선을 위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로 했다. 입 밖으로 나온 허망한 말은 결의가 되었고, 스스로의 마음까지 속이는 다짐이 되었다. 경복궁은 왕실의 존엄을 베려는 일본과 왕조를 지키던 군사에 의해 이중으로 포위되었다.
우범선을 자리에서 물린 미우라는 범행이 세상에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다시 설명했다. 좁게는 훈련대와 친위대의 싸움 이어야 하고, 크게는 유약한 조선왕실의 권력다툼으로 보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무능하지만 탐욕스럽고 그래서 죽어 마땅한 악인이 일본도에 베어지는 것이고, 죽음은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겨져야 했다. 혹시라도 일본의 저의가 드러나더라도 제국의 뜻이 아니어야 했다. 조선의 왕비를 해한 자들은 일본의 낭인이거나 조선인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범선과 훈련대가 필요했지만, 범행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는 거물이 필요했다.
1885년 10월 8일 새벽 2시, 대원군이 은거 중이던 아소정에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어린 군사의 위협에도 대원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끝내 늙은 육신은 가마에 던져지고 말았다. 군인들은 대원군읕 태운 가마를 경복궁으로 몰아갔다. 대원군은 영문도 모른 채 범죄의 주모자이자 목격자가 되었다. 많은 일을 겪은 대원군은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직감했으나, 그 일은 대원군의 짐작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대원군이 궁궐에 강제로 끌려가 감금된 상태였다고 보도한다.
새벽 5시, 한 발의 총성을 신호로 일본군과 조선 훈련대, 그리고 아다치 겐조를 행동대장으로 하는 48인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진입했다. 후문인 추성문과 춘생문 또한 즉시 봉쇄되었다. 저항하는 병사가 있었으나 금세 진압되었고, 살아남은 자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과 기모노를 입고 칼을 든 기자와 양복을 입은 하버드 출신의 일본인들이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목을 베며 왕비의 행방을 물었다. 살의를 띠고 묻는 남의 나라 말을 헤아렸으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무리들은 왕의 침실인 장안당에 신을 신은 채로 들어갔다. 항의하는 왕의 곤룡포가 찢어졌고, 저항하는 세자의 머리를 칼자루로 내리쳤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조선의 병사들은 그저 허공을 향해 총을 쏘거나, 아예 총을 내려놓고 어떤 일이건 서둘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리는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의 문을 열어젖혔다. 왕비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짐작으로 침전의 여인들을 베었다. 임오년 이후로 궁은 다시 아비규환이 되었다. 왕은 무력감에 주저앉았고, 왕비는 두려움에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죽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달렸다.
왕비는 임오년에 이미 조선의 군대와 자신의 백성에 쫓긴 적이 있었으나, 일본인에 의해 쫓기게 되자 사십여 년의 기억이 두서없이 뒤섞였다. 숨이 차 발걸음이 느려지던 순간 왕비의 몸이 허공으로 잠시 떠올랐다. 아다치가 왕비의 머리채를 뒤에서 잡아 올렸다. 왕비가 곤녕합 마당에 던져지자, 무리 중의 용기를 얻은 자들이 왕비의 몸을 밟았다. 그중에는 아직 골격이 채 완성도 되지 않은 마른 몸의 십 대도 있었다. 왕비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자 후쿠오카 출신의 가쓰아키가 일 미터가 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날이 날카롭게 선 에도시대 장인이 만든 히젠도였다. 가쓰아키는 사람을 베는 칼을 뽑았으나, 단칼에 왕비를 베기는 어려웠다. 그저 쓰러져있는 힘없는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운이 전해졌다. 오백 년 왕조의 왕비였다.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고, 감히 명령하거나 채근하는 이도 없었다.
잘못된 장소에서 그릇된 목적으로, 덜 여물어진 인간에 의해 사용된 이 칼은 ‘여우를 베다‘ 는 글이 새겨진 채 후쿠오카에 있는 구시다 신사에 여전히 보관 중이다.
아다치는 망을 보고 있던 우범선을 불러 죽은 왕비의 얼굴을 가리켰다. 우범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본인들은 서둘러 궁을 빠져나갔다. 단발의 총성이 울리고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가을의 아침 해는 더디게 떠올랐다. 왕비의 시신은 문짝으로 옮겨져 옥후로 뒷산의 장작 위에서 태워졌다. 꽃은 때가 되면 피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서둘러 핀 꽃은 반갑지만, 괘오한 생각에서 촉발된 이른 죽음은 분통하다.
아다치는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나 잠들지 못했다. 마침내 대일본 제국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는 흥분과 자신도 모르게 스민 두려움에 숨이 찼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다치는 물 대신 술을 들이켜고, 책상에 앉아 기사의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한성신보에는 지난밤 대원군 전하께서 입궐하시어, 왕궁 안에서 작은 싸움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성신보의 설립목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기사이다. 아다치는 자신이 선이라고 믿는 일을 분주히 수행했다.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 친일인사로 채워진 김홍집 내각을 발 빠르게 수립했다.
조선 공사관 영사보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기사를 확인하고 고향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기에 서랍 속 일기 같은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이 편지는 2021년 한 고물상에서 발견되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이것이 역사라는 대형퍼즐이 맞춰지는 과정이다.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궁의 안쪽에 이르러 왕비를 죽였다. 생각보다 쉬워서 오히려 놀랐다.”
훈련군 참위 윤석우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불에 탄 시신을 처리라는 우범선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사건 현장에 있지는 않았으나 직감적으로 왕비임을 느꼈다. 윤석우는 흩어진 뼈를 모았으나 그저 하반신뿐이었다. 시간은 촉박했고 보는 눈은 많았다. 그는 훗날 청와대가 들어서는 궁의 인근 야산에 재와 유골이 구분이 되지 않는 왕비를 모셨다.
사건 발생 닷새 후, 왕비가 왕의 총명을 막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의 죄를 지어 궁을 떠났기에 폐서인이 되었다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일본은 왕을 겁박하여 자신들이 이미 죽인 왕비를 살아있는 산 자로 여기며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사건 당일 궁의 짙은 어둠을 바라보는 푸른 눈의 부엉이들이 있었다. 왕과 왕비의 공간 뒤쪽에 위치한 서양관의 목격자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옮겨 자국에 전했다. 말과 글은 시계보다 빠르게 퍼져나갔고, 날카로운 칼이 되어 일본을 겨냥했다.
주한공사 미우라는 풍설을 퍼트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는 일본인의 말이 신임할 만하다고 지껄였으나,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그날의 목격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도 있었다고 응수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본의 반인륜적이고 야만적인 왕비시해 사건을 보도했다. 미우라와 아다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서구 열강의 짖음은 이해가 되었으나, 나라의 돌봄을 받지 못한 조선 백성들의 분노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왕비가 죽고 55일이 지나서야 왕비의 죽음이 죽음으로 인정받았다. 야산에 묻혀있던 뼈와 재가 빈전으로 모셔졌다. 왕비가 죽은 그 마당에서 왕과 신하들이 모여 뒤늦은 곡을 했다. 슬픔이 상기되었고, 분통함이 용솟음치니 산 자의 거친 통곡이 궁 안을 가득 채웠다.
일본은 국제여론에 밀려 시해 가담자 중, 군인은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민간인은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재판과정에서 얻은 수확이라면 시해 가담자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20대에서 40대가 주를 이룬 이들의 직업은 기자, 외무성 직원, 교수, 작가, 의사, 승려, 통역관 등이며, 하버드와 동경대를 졸업한 몽매한 자들이었다. 얄팍한 지식을 지혜로움으로 여기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식자가 세상을 어떻게 위태로움에 빠트리는지 역사는 반복해서 알려준다.
특이한 점은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를 포함하여 무려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구마모토와 조선의 인연은 길고, 일방적인 악연이다. 구마모토의 초대 성주는 임진왜란 중 저지른 잔혹한 학살 행위로 조선 백성들에게 악귀라고 불린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다.
아다치는 가토를 현인으로 모시며 사당까지 세워 추앙했다. 소년 아다치가 생각하는 조선, 청년 아다치의 적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아다치의 뇌라는 염전에 가토와 제국이라는 바람이 불었고, 제국주의라는 소금이 그의 정신을 점령한 것이다. 조선왕비 시해사건은 야마구치현 출신의 조슈벌이 기획하고, 구마모토현 출신들이 행동에 나선 기획범죄였다.
재판은 반전 없는 연극처럼 정해진 식순에 따라 퇴폐적으로 종결되었다. 증거 불충분이라는 불충분한 설명으로 시해자들은 전원 석방되었다. 무죄로 풀려난 죄인들은 형무소 앞에서 서로를 안으며 동지라고 불렀다. 각자의 길로 떠나는 그들의 손에는 200엔의 여비가 쥐어져 있었다. 어리석은 식자들을 후원하는 우매한 부자들이 제국주의를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죽은 왕비의 자리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고,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졌다. 백성들의 저항은 의병운동으로 이어졌고, 백성들이 벌린 틈사이로 왕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왕은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등을 을미사적으로 명했고, 김홍집과 정병하는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유길준과 조희연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이들은 왕과 백성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며 일본으로 향했고, 그 무리에는 왕실과 민심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우범선도 끼여 있었다.
우범선의 망명생활은 순조로웠다. 일본 외무성에 활동을 보고해야 했지만, 넉넉한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민간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돈을 지원받았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타국에서 생활을 걱정했다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졌을 것이다.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몸의 안온함을 느꼈다. 그러자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후회 대신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조선은 침몰하는 배였고, 어차피 끝 마쳐야 하는 항해라면 미련을 버리고 탈출하는 자가 현명한 자라고 자위했다.
히로시마, 교토, 도쿄를 유랑했다. 바다를 넘어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일본의 힘이 느껴졌다. 생활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늘 차가웠다. 수시로 고향의 음식과 말이 그리웠다. 어떤 날은 걱정 없이 술에 취하고 싶었으나 흐트러져서는 안 되었다. 왕실에서 보냈거나 스스로 일어선 자객들이 해이해진 자신의 목을 노릴 것이다. 그들도 그들의 일을 하는 자들이기에 원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과 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불어 산다는 건 각자의 하기 싫은 일, 해야만 하는 일, 미뤄야 하는 일들이 겹치고 돌아가는 것이다. 자객의 칼이나 총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자신의 일을 끝까지 행해야 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조선인과의 만남은 피했고, 아는 이도 다시금 살폈다. 행동은 고요했고, 말은 삼갔다. 불편하지만 잠은 늘 이층에서 잤다. 자객 또한 번거로울 것이라 여기면 위안이 되었다.
도쿄에서 일본여인을 만났다. 조선으로 틀림없이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3년의 망명생활동안 삶은 늘어졌고, 심신은 지쳤다. 이듬해 아들이 태어나자 욕심과 불안이 함께 자랐다. 도쿄에는 사람도 많고, 조선인도 많았다. 히로시마현의 구레로 떠났다. 어느 곳이건 타향이었기에 어디를 가던 사는 것은 매 한지였다. 아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힘 있는 나라 일본에서 내 자식만큼은 나와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몇 년 만 더 버티면 먹고사는 것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을 잊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오르내리기 힘든 이층에 집을 구했고, 가구보다 창을 가릴 천을 먼저 샀다.
우범선이 포근한 요 위에서 불완전한 안락함을 쌓아가던 날, 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기 위해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고영근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민영익의 집에 위탁되어 재능을 주고 기회를 얻었다. 작은 일도 사력을 다해 완성하자 이윽고 큰일이 주어졌다. 무방비 상태로 맞은 불행을 행운으로 치환시키며 병마절도사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었다. 왕비의 죽음 앞에 우는 아들을 보며 사지가 뒤틀리는 무력감에 빠졌다.
고영근은 역적을 베어야겠다는 살의가 조선 땅에서 싹튼 것인지 일본에서 돋아나 자란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살의의 근원도 모르던 그를 우범선에게로 이끈 것은 숙명일까? 우연일까? 이 또한 알 수 없다.
일본의 여름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무더웠다. 구마모토, 고베, 등을 떠돌다 오사카에 이른 그는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던 윤효정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윤효정이 우범선 암살을 계획 중임을 알게 되었다. 살심이 결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고영근은 우범선이 사는 곳을 찾아 그의 일상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오사카로 돌아온 그는 윤효정에게 즉각적인 상의가 아닌 통보를 했다.
"일층에는 동서내외가 지내고, 자신은 이층에서 지내며 늘 경계하고 있소. 찾아오는 조선인도 드물지만 처음 보는 조선인은 만나주지도 않소이다. 이런 자를 압록강으로 유인하여 주살한다는 것은 너무 아득한 것이오. 언변이 좋은 내가 시간을 두고 접근하여 처단하겠소. 안면이 있는 선생이 처음 접근만 도와주시오. 선생은 다른 할 일도 많지 않소. 나에게 기회를 양보해 주시오"
우범선은 윤효정의 소개에도 고영근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짙고 느리게 다가갔다. 비가 오는 날은 가난한 처지의 동포가 되어 동정심을 유발했고, 맑은 날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 남자의 공감대를 건드렸다. 고영근은 살의를 숨기고 호의를 드러내며 우범선의 위로가 되었다.
"이래저래 자네 덕을 많이 보았어. 동네도 마음에 들고 이제 정착해서 살아보려고 하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신세를 더 져야겠는데, 인근에 집을 좀 알아봐 주겠나?"
"형님도 참! 같은 동포끼리 도우고 살아야지요. 마침 저희 집 인근에 한 채가 비었는데, 당장 같이 가보시지요."
조선의 왕비를 죽인 일본인의 길잡이가 되었던 우범선은, 자신을 노리는 자객의 안내자를 자처했다.
조선에서 고영근의 노복이었던 노윤명이 합류했다. 우범선에게도 그를 소개하고, 조선에 남아있는 모든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안심시켰다. 집들이를 빌미로 두 사람은 우범선을 집으로 초대했다. 범선은 조선에서 온 형님네 집에서 실로 오랜만에 술을 한잔하고 오겠다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같은 말을 쓰는 선한 사람과의 술자리에 범선은 금세 취기가 돌았다. 술이 취하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영근의 생각이 궁금하여 물었다. 노윤명의 표정은 노기를 드러냈고, 영근도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에게서 분노를 감지한 범선은 술을 깨기 위해 찬물을 거푸 마셨다. 정신을 집중하자 모든 우연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민을 자책했다. 늘 경계하던 죽음의 순간은 예상보다 짧았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늦었고, 안도감에 취해있었다. 고영근의 칼이 목에 닿고, 노윤명의 둔기가 쓰러진 우범선의 머리를 내려쳤다. 두 사람은 시체를 남겨두고 무덤이 된 집에 불을 지른 후, 경찰서로 향했다. 애초에 자신들의 일을 감출 의도가 없었다.
다음 날 일본 언론은 열사이자 지사인 우범선이 무도한 조선인 자객에게 살해당했으며, 이는 비문명의 오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인들은 우범선을 기리기 위해 돈을 모아 비석을 세웠고 그의 장례식에는 왕비를 함께 죽인 자들이 참석하여 동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판결이 정해진 형식적인 재판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사건 발생 한 달 만에 히로시마 재판소는 고영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죄는 응당 받겠으나, 자신의 죄명이 살인죄가 아닌 ’적괴참살보구모수‘ 라고 주장했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을 벤 것이다.”
왕은 기뻤으나 마음을 표할 수 없었고, 백성이 갸륵하였으나 치하할 수 없었다. 고영근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에는 청년 김구가 왕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순사를 죽인 일도 있었다. 왕은 가족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고, 자신이 돌보지 못한 백성에 경외감을 느꼈다.
왕은 고영근을 살리기 위해 하야시 공사에게 말을 전했고, 이토에게도 뜻을 청했다. 고영근을 차마 즉시 죽이지 못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감옥 너머의 세상은 경박스러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나, 안에서는 무겁고 더딘 시간이 흘렀다.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던 고영근은 투옥 8년 만인 1911년, 마침내 석방되어 고국에서 환갑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영근이 무언가를 바라고 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나라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늙어버린 그에게 나라가 내민 최소한의 염치는 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 자리였다. 고영근은 처지에 상관없이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능이 보이는 초가집에 앉아서도 스스로 무언가를 도모했다.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칠십을 넘긴 고영근이 다시 한번 자수를 했다. 그의 진술은 다음날인 1922년 12월 13일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잠든 홍릉에는 고종 사후 사 년이 지났음에도 묘비석이 세워지지 못하고 누워있었다. 총독부에서 고종의 묘비석에 대한과 황제를 새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가던 어느 날, 홍릉의 능지기인 고영근이 총독부의 눈을 피해 인부를 고용했다. 늙은 능참봉과 인부들은 닷새 동안 능 구석에 누워있던 비석을 세우고, 일으켜 세운 돌에 황제와 황후를 의미하는 태자를 새기고 어떤 처분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자수를 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근엄한 대신들이 총독부의 눈치를 보며 비석을 다시 눕혀야 할지, 새겨진 글자를 지워야 할지 옥신각신하는 와중에도 백발이 성성한 능지기는 그저 왕릉 앞의 비석을 지키고 있었다. 고영근은 결국 파직되었으나 자신이 세운 비석과 새긴 글자는 지켜냈다. 그리고 마치 이승에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한 달 후 저승으로 떠났다.
세월에 의해 퇴색되어 가던 고영근의 이름에 덧칠을 한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영화감독 장재현이다. 영화 장소 헌팅 차 지방으로 향하던 그는 고속도로에서 독립기념관 안내표지를 보고 핸들을 튼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억되어야 하지만 잊혀가는 이름들, 알아야 하지만 낯선 이름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 캐릭터를 통해 그 들의 이름이 단 한 번이라도 더 불리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영화 파묘의 이도현 배우의 극 중 명은 도시락 폭탄으로 유명한 윤봉길, 김고은 배우는 전사로 불려 마땅한 여성독립운동가 이화림, 최민식 배우는 친일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이고, 유해진 배우의 극 중 명은 고영근이다.
우범선은 일본에 머물며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살고 있었다. 고영근을 만나러 가는 날 장남 장춘을 안아 들고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마. 밥 잘 먹고 있어라.”
역사의 단죄가 후손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류의 슬픔이다.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은 창졸지간에 가장을 잃게 되었다. 장춘의 어머니는 장남을 절에 맡기고 돌아서야 했다. 어린 동생과 장춘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으나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범선은 고국의 왕비를 죽이는데 힘을 보탰으나,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버리지 않았다. 소년 장춘은 조선인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심한 차별 속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장춘은 아버지가 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알지 못했고, 사념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출세하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어머니의 나라는 아버지의 성을 이고 사는 장춘에게 혹독했고, 망해버린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것은 막막했다. 어린 장춘은 또래보다 빨리 철이 들어버렸지만, 응어리는 켜켜이 쌓아두었다.
이토가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지고 십 년이 지났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의 삶도 죽은 이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이토의 지시로 조선과 경성에 각 하나, 일본 본토에 7개의 제국대학이 세워졌다. 이토는 시정의 무뢰배와 구별되는 잔혹한 인간이다. 땅과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완전히 정복하려는 심산이었다. 제국대학은 어리고 가난한 조선인을 친일파로 양성하기 위한 미끼였으며, 나라를 팔아서라도 가문을 번영시키려는 영혼이 박약한 자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실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성씨를 안고 사는 장춘에게 선택지는 적었다.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한 장춘이 접한 것은 새로운 학문과 더 잔혹한 현실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한 일과 당한 일의 내막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다. 가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무거운 집안 분위기, 연민과 업보의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어른들의 눈빛까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 회피했었다.
망국에서조차 자신이 버려졌다는 완벽한 고립감과 죄책감이 혼재되어 장춘을 짓눌렀다. 아버지의 나라를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기대는 무너졌지만,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서 자신은 부서질 수 없었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며 자신이 태어난 타국 속에서 범연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장춘은 박사논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6년 5월 발표된 박사 논문 <종의 합성>에서 자연 상태에서도 다른 종인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새로운 종인 유채가 탄생한다는 것을 세계최초로 입증하였다. 훗날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장춘의 논문인 종의 합성 이론에 의해 수정보완 되었다.
장춘은 일본에서 부와 명예를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창출해 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어쩌면 노벨상에 근접했던 농학박사 장춘의 논문에 표기된 그의 성씨를 문제 삼았다. 장춘은 여전히 창시개명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씨인 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춘은 결국 일본에서 살아가야 할 자식들은 일본인 아내의 성씨를 따르게 했지만, 자신은 끝까지 우장춘으로 살기로 한다. 이 결정은 일체의 포용 없이 완전한 굴종만을 요구하는, 태어난 나라에 대한 도전이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류애를 품고 사는 한 명의 위대한 지식인으로써 자신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으나 백성이라 불리던 국민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차마 삶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굶주림을 남겨두고 일제는 꼴사납게 도망쳤다. 그러나 서둘러 떠나는 와중에도 일본은 참빗으로 이를 잡듯이 씨앗마저 쓸어갔다. 농사가 여전히 근본인 나라에서 씨앗마저 부족하니 아사자가 속출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적인 농학박사 우장춘의 영입을 고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친일파의 자손을 영입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이념과 철학을 논하기 전에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1950년, 한국 정부는 우장춘 환국 추진 위원회를 결성하고 우장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장춘의 나이는 이미 오십 대에 접어들었고, 그에게는 자신을 위해 온전한 삶을 희생한 일본인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가난한 한국 정부가 내민 금전적 제안은 일본의 생활과 맞바꿀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못했다. 가야 할 명분이 없지는 않았으나 가족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그가 일본에 남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장춘은 범인의 예상을 깨는 결정을 내린다. 마음을 굳힌 장춘은 나가사키 현의 수용소로 찾아갔다. 일본 정부가 세계적 농학박사의 출국을 막았기 때문이다. 제국대학의 관비유학생이 자신들이 점령했던 나라로 돌아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해지자, 장춘은 밀입국자와 불법체류자를 수용하여 한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수용소행을 선택한 것이다. 장춘의 의지를 확인한 한국정부는 사례금 백만 원을 보냈고, 장춘은 그 돈으로 씨앗을 사서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장춘의 인생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깊은 굴곡과 궤도를 함께했다. 고국 땅을 밟은 지 두 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고위관료들이 트럭에 피아노를 싣고 피난길에 올랐고, 미쳐 수도를 빠져나오지 못한 서민들은 끓어진 한강철교 앞에서 통곡했다. 일본으로 도망가는 한국의 사회지도층이 등장하는 판국에 장춘이 포화 속에 남아있을 거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전쟁 중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이 불러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거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은 채였다. 장춘은 굶어 죽는 사람이 실재하는 땅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이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하루라도 빨리 더 크고, 병충해에도 강한 우수한 품종의 작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장춘의 이념이고 당파였으며, 인류애라고 확신했다.
전쟁이 끝난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나 다름없었다. 장춘은 열 살이 된 막내가 눈에 밟혔으나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오직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홀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사망소식에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춘이 모친상을 위해 가방을 꾸리자 이번에는 한국정부가 그의 출국을 막았다. 떠날 사람이었다면 전쟁 중에 도망쳤을 것이다. 장춘은 한국 정부의 조치가 야속했으나, 직원들이 다친 그의 마음을 보듬어주었다. 연구소에 임시 빈소를 마련하고 진심을 다해 시신 없는 장례식을 함께 치러주었다. 장춘과 한 팀이었던 그들의 연구는 허허벌판이었던 한국 땅에 기적을 싹 틔우게 된다.
대한민국의 대표음식 김치는 우장춘의 배추 품종개량으로 완성되었다. 우장춘이 개발한 결구배추 이전의 조선배추는 그저 잎이 넓은 푸성귀에 불과할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 장춘이 개발한 배추는 반도체와 함께 한국인의 생활을 바꾼 과학기술로 선정되었다. 우장춘과 함께 일한 이들은 농학을 아는 사람만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천재인지 안다고 칭송했다. 21세기 한국의 현대인들이 먹고 있는 무, 감자, 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개량작물의 뿌리는 우장춘이다.
1959년 6월, 우장춘은 극심한 과로로 인해 위 십이지장 궤양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이번 기회에 쉬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스승은 1년 2 모작을 위해 연구 중이던 벼의 샘플을 병실로 가져오라고 극성을 부렸다.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지만 반가운 소식이 장춘에게 전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 이래 두 번째로 -병상에 누워있는- 우장춘의 목에 문화훈장을 걸어주었다. 왕비를 죽인 자의 아들에게 국민의 배고픔을 덜어준 노고를 치하하는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우장춘은 훈장을 바라보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범벅되었지만, 홀가분함이 몰려와 금세 잠이 들었다.
'훈장도 받았으니 빨리 퇴원해서 연구를 마무리 짓고, 짬이 나면 애들을 보러 일본에도 좀 다녀와야겠어.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61세를 일기로 그의 연구소가 있던 부산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