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장은 남의 묘 자리에 자신의 조상무덤을 쓰는 것이고, 산송은 무덤과 관련된 송사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조선 중 후기에 이르러서 산송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선의 3대 송사로는 노비와 관련된 (노비송) 토지와 관련된 전답송 이 있는데, 이중 최다를 차지하는 산송은 조선 초기만 해도 심각하지 않았다. 이는 효를 강조하는 성리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18세기 절정에 달하며, 양반들 사이에서 문중과 선산이라는 개념도 조선사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에 한때 시대정신이었던 풍수지리까지 합쳐지며 묘 자리는 조상에 대한 효의 차원을 넘어 당대의 부귀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신분상승을 꿈꾸는 각계각층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노비로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 내 자식새끼는 양반으로 살게 해야겠다.”
노비들이 양반집 무덤을 파헤쳐 자신의 조상을 묻기도 했고, 권력을 가진 관리들은 더 높은, 탐해서는 안 될 왕권까지 넘보며 왕실의 무덤까지 침범하게 된다. 산 자가 죽은 자에 의지해 신분상승을 꿈꾸고, 죽은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산 자가 밤잠을 설치며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되었다.
산송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보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아래와 같이 개탄하였다.
‘묘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송사가 이제 폐 속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살인 사건의 절반이 이에서 비롯된다.’
영조는 ‘요사이 상언한 것을 보건대 산송이 10의 8,9에 달한다.’ 라며 한탄하였다.
묏자리를 놓고 투장, 파묘가 끓이질 않으니 송사로 이어지고, 관리는 물론이고 왕조차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영화 명당을 보면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 위해 살림까지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마련한 거금을 들고 그가 찾아간 곳은 절이었다.
“주지스님! 여기 이 돈이면 되겠지요?”
그는 이 절이 길지라는 풍수지리를 믿었고, 전 재산을 걸었다. 스님에게 돈을 건넨 그는 절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전소된 절터에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무려 400여 년간 묘 자리를 두고 분쟁을 이어간 두 가문도 있다. 윤 씨와 심 씨 두 집안의 기묘한 이야기를 듣고 각자 판결을 내려 보기 바란다.
사건의 발단은 고려시대의 재상이자 명 장군이었던 윤관 장군의 묘가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윤관장군은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창설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한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영조임금 대에 이르러, 윤 씨 집안에서는 잃어버린 자신들의 조상인 윤관 장군의 묘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우리 문중을 대표하는 윤관 장군(1111년 사망)의 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반드시 장군의 묘를 찾아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비록 윤관 장군 사후 600년이 지났고, 그간 왕조까지 바뀌었지만 윤관장군 급 인물의 묘를 후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가든다’ ‘장가간다’라는 말이 우리의 생활에 여전히 남아 있듯이 조선시대 이전에는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을 떠나 처가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다 보니 조상의 묘를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동안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윤관 장군의 묘의 위치를 아는 후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윤 씨 집안은 600년이 지나서 어떻게 조상의 묘를 찾겠다는 것일까? 그들은 역사 사료를 뒤적이다 한 줄기 희망을 보게 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그 힌트가 있었다.
‘윤관 장군의 묘는 경기도 파주 분수원 북쪽에 있다.‘
가문의 명을 받은 윤동규란 이가 650년 전 사망한 조상의 묘를 찾기 위해 파주로 떠났다. 그가 의지할 것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 단 한 줄이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 동안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윤관 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장소를 마침내 발견한다.
“어허!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구나. 그나저나 이거 참으로 난감하구나.”
그 자리에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부친 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윤동규는 물증을 찾기 위해 은밀히 심 씨 집안의 묘 자리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나. 심 씨 문중 묘역에 어째서 이 씨의 묘가 있단 말인가?”
‘선략장군 이호문 묘’라는 비석을 발견한 그는 마을로 내려가 수수문 끝에 이호문의 손자인 이형진이라는 노인을 어렵게 찾아낸다.
“이보시오. 암장이나 투장, 파묘는 나라에서도 엄히 다스리는 일이오.”
윤동규의 끈질긴 추궁에 노인은 심 씨 집안에서 암장을 감추기 위해 세운 허묘라고 실토한다.
“옳거니! 역시 그랬구나.”
자신의 추론에 확신을 얻은 윤동규는 주변의 땅을 판 끝에 깨어진 윤관 장군묘의 비석을 발견한다.
“드디어 찾았구나! 이제 조상님 볼 낯이 생겼다. 어서 서두르자. 문중 어른들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자.”
윤 씨 가문은 부사직으로 재직 중이던 윤면교를 내세워 위의 내용이 포함된 상소를 영조에게 올린다. 당대의 명문가인 심 씨 집안에서도 윤 씨 집안의 산송에 당연히 맞대응했다. 심지원은 1614년에 이 자리에 부친의 묘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658년 영의정에 오르자 효종이 이 땅을 하사하였고, 심 씨 집안에서 문중 묘역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이미 백 년 넘게 우리 집안의 선산이었는데, 650년이 지나 자신들의 조상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두 가문의 상소가 이어지자 영조는 두 집안의 대표를 불러 원만한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임금 앞에서도 절대 자신들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주상전하! 저희 집안의 억울함을 다시..”
“전하! 저 자의 말은 앞뒤의 이치가 전혀 맞지 않는..”
“어허! 이런 답답한 자들을 보았나?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내 요즘 산송 문제로 골치가 여간 아픈 것이 아니다. 두 집안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짐의 왕명을 따르도록 하라. 윤관 장군의 묘도 심 씨 집안의 묘도 그대로 유지하고, 이희문의 묘만 파묘하도록 하라.”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엔 몹시 애매한 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왕비를 많이 배출한 윤 씨 집안은 내심 영조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했었다.
“전하.... 아리옵기 황공하나오 전하께서도 윤 씨 집안의 핏줄이......”
“무엇이라!! ”
대로한 영조는 윤희복에게 곤장형을 내렸고, 윤희복이 형 집행 도중 그만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아이고! 이렇게 원통할 수가! 네 심 씨 집안 것들을 가만 두고는 분해서 살 수가 없다.”
두 집안의 원한과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으며, 산송문제는 왕조의 몰락에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두 집안은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진정서를 냈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상대 집안 묘비를 부수기도 했으며, 해방 후에는 파묘를 시도하다 옥살이를 하는 일까지 발생하며 해방을 맞이한다.
윤관 장군의 묘 바로 위쪽으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 심 씨 집안의 묘가 위치해 있다. 그러다 보니 윤 씨 집안에서 절을 하다 보면, 심 씨 조상에게 절을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윤 씨 집안에서 윤관 장군의 묘역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10단에 이르는 담장을 올린다. 그러자 심 씨 집안 조상의 묘가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도대체 산송 분쟁을 누가 해결해주어야 할까? 두 집안에게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만큼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던 2006년 4월, 두 집안이 마침내 극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심 씨 집안이 자신들의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윤 씨 집안에서는 심 씨 집안 조상들의 새로운 묏자리를 위한 부지를 마련해 주기로 합의했다. 드디어 400년 넘게 이어진 산송이 마무리 되었고, 이 일은 2007년 로이터 통신에 보도되며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다음 편에는 송사에서 그치지 않고, 파묘와는 물론이고 살인사건에 정치문제로까지 번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두 집안의 묘지분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