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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Jun 19. 2024

천릉

 조선 왕실은 42기의 능과 14기의 원, 64기의 묘를 남겼다. 이중 북한에 위치한 2개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 원은 왕의 사친(생모와 생부) 세자와 빈의 무덤이며, 묘는 왕족과 후궁이나 폐위된 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의 왕릉은 묵언하는 죽은 자의 것이 아닌 당대를 살아가던 인간의 말과 뜻을 품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 봉분이다. 이 이야기는 40기의 왕릉 중 하나이지만,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능에서 시작된다. 

 조선은 왕이 죽기 전 미리 능 자리를 결정했다. 지관과 신하들이 십여 곳을 추려 올리면, 왕이 그중 한 곳을 정하였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원경왕후가 함께 묻혀있는 헌릉(서울 내곡동) 인근을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다. 

 "수양대군, 안평대군, 예조판서 김종서, 도승지 등에게 명하니 헌릉을 두루  살피고 오라."

 조정의 요직에 있는 신하와 당대 최고의 지관 최양선, 세종의 아들들이 함께 헌릉에 도착했다.

"어떠한가? 할바마마가 계신 곳의 인근이니 틀림없는 명당이렸다?"

수양의 물음에 지관은 당황했지만, 대답은 명확했다. 

"대군마마! 혈자리가....... 곤방 물이 새 입처럼 갈라졌습니다."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말하라."

"절자손장자! 이곳에 묘를 쓰면 장자를 잃어 손이 끓어지게 될 것입니다."

"네 이놈! 그 요망한 입을 닫지 못할까! 내 일전에도 네 놈이 올린 상소를 들어 알고 있다. 이번에는 네 놈의 목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지관 최양선은 경복궁이 명당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인물이다.

 "대군마마. 전하께서 땅을 살피라 하셔서 그리하였고, 본 것을 사실대로 아뢰올뿐입니다."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네 놈 말대로라면 이곳에 능을 쓰면 세자께서 돌아가신다는 말이 아니냐?"

"대군!"

김종서의 제지에 수양이 겨우 말을 그쳤으나, 능 주변의 모든 시선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관 최양선을 엄벌에 처하고, 다른 명당을 찾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이어졌으나 세종의 뜻은 분명했다.

 "지관은 지관의 일을 한 것이다. 결정은 과인의 몫이다. 아무리 복된 자리를 구한다 해도 선영 곁만 하겠느냐? 더 이상 이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 살아서 할 일이 많다."

 세종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곳에 묻혔다. 세종의 뜻을 따른 적장자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사망했고, 문종의 유일한 혈육인 어린 단종은 죽음을 앞두고 있게 되었다. 지관의 말대로 그 무덤은 최악의 흉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수양에게는 최고의 명당이었다. 

 왕은 보위에 오르고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지만 취하는 것은 공신들뿐이었다. 그 자들은 누구의 공신인가? 백성의 공신이 아님은 분명하다. 왕을 위한 공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야망은 드높고, 때때로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허상을 찬탈하기 위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역모의 창업자이자 살아있는 왕을 함께 죽여야 하는 살인의 동조자들이다. 어쩌면 그들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계유정난의 무고한 죽음은 미리 설계되었고,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였으나, 대의가 없는 살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파도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민심의 힘은 어디서 나는지 쉽게 소실되지 않았고, 선비들의 반발은 노도와 같이 거세었다. 곤룡포에 묻은 피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고, 피 냄새를 맡은 또 다른 괴인이 밀려와 권좌를 덮칠 것이다. 괴인이 어린 조카나 동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왕은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왕의 마음을 더 건드리는 것은 두려움 보다 선왕의 당부였다.

 “수양이란 군호가 어떠하냐?”

세종은 장성한 둘째 아들의 군호를 수양으로 고치기로 결정했다. 

“어찌하여?.......”

“총명한 네가 뜻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

“수양대군은 들어라! 나의 선왕께서는 처남과 형제를 죽이며 조선의 안정을 꾀하셨다. 그런 연유로 내 이리 편하게 정사를 돌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인은 결단코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조선과 백성을 위해서도 절대 아니 될 일이다. 네 군호를 깊게 새기고 살아야 한다. 이는 아들을 위한 아비의 청이 아니라 왕이 내린 지엄한 어명이다.” 

“............”

 백이, 숙제가 절개를 지키다 죽은 곳이 수양산이다. 세종은 자신을 닮은 세자와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수양대군 모두를 걱정해야 하는 아버지이자 한 나라의 통치자였다. 세종은 영민한 군주였기에, 사후의 일은 산자의 의지로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걱정을 가슴에 묻어둘 수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세종의 걱정은 기우로 그치지 않았고, 계유정난은 창건 오십 년이 안 된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새겼다.

 왕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상념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침전의 한 구석을 차지한 자가 있다. 그자는 왕의 목숨을 노린 살아있는 자객이 아니라 이미 죽은 현덕왕후였다. 

“귀신이 어찌 산 자. 그것도 감히 왕의 침소를 찾았느냐?”

왕의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있었지만, 두려움은 방안에 울리지 않았다. 공간을 차지한 사람은 사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채 짐승을 사냥하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장년이 되어서는 천륜과 인륜을 배반하고 보위에 오른 자이다. 그런 사람을 마주한 귀신은 말이 없었으나 노려보는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사람은 말 없는 귀신을 곁에 두고 자리에 누웠고, 귀신은 천장에다 자리를 잡았다. 두 존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밤은 깊어갔다. 왕이 선잠이 들자 귀신이 입을 열었다.

“네 아들을 죽이면, 너의 자식들도 성치 못할 것이다. 내가 구천을 떠도는 유일한 이유이다.”

 왕은 잠에서 깨면 어린 상왕을 죽여야 한다는 공신들의 말에 쫓겼고, 잠이 들면 아들을 죽이지 말라는 귀신의 눈빛에 시달렸다. 전장에서 일생을 보낸 무사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왕위 찬탈자에게도 왕가의 피는 흐르고 있었다. 

‘낸들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때가 이르다. 때가 되면 사람이 말리건 귀신이 붙잡건 내 손으로 그리 할 것이다. 할바마마가 아바마마에게 물려준 조선을, 내 아들에게 이 두 손으로 물려줄 것이니. 제발 좀 닥치고들 있어라.’

 침전 밖에서는 집현전 학자들인 성상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승원과 무신 유응부 등이 왕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세종의 남다른 총애를 받은 그들은 왕위 찬탈자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것이 고역이었다. 성상문은 단종에게 옥쇄를 건네받아 수양에게 전달하며, 고개들 들지 않은 채 오랫동안 울었다. 왕은 그런 신하를 오랫동안 바라보아야만 했다. 신하가 새 왕에게 옥쇄를 건네지 않고, 서럽게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와 무사에게 조금 이른 기회가 찾아왔다. 명나라 사신이 떠나는 날, 성상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별운검으로 서게 된 것이다. 왕의 양쪽에서 왕의 목을 노리는 두 무사가 -구름이 승천하는 무늬가 새겨진- 칼을 차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마침맞은 복수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줄 것이다. 그 자의 목뿐만 아니라 그 밤의 주모자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베어버리고, 왕을 다시 모실 것이다."


 매사에 순조롭지 않은 것이 사람의 일이다. 왕이 별안간 별운검을 철회시켰다. 선비와 무사, 마음이 다급한 자와 신중한 자의 의견이 갈렸다.

"칼을 뽑은 이상 피를 보아야 하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란 일이오. 다음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떨어지는 잎이 생기기 마련이다. 김질은 늦은 밤 장인을 찾아갔다. 그는 다음 기회가 찾아와도 결코 거사가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긴 냉철한 분석가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에 발을 담근 연약한 잎사귀였을까?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의 한 마디는 그릇됨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낙태시키고, 역사에 사육신과 생육신을 출생시켰다. 왕은 국문장에 직접 나와 각각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성상문은 자신의 살가죽이 타는 냄새에 혼미해진 정신을 일깨워 답했다.

"나리.... 나리가 준 녹봉은 일일이 기록하여 우리 집 곳간에 그대로 있소이다. 내 죽거든 부디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주시오."

 왕은 박팽년의 재주를 아꼈다. 자신이 명한 고문으로 넋이 나간 그에게 함께하자 물었다. 박팽년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왕을 바라보았다. 형 집행을 앞두고 다시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그가 이번에는 무심히 대답했다.

"마음이... 그저 마음이 편치 않았소이다."

 박팽년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 여식이 울며 매달렸다.

 "괜찮다. 아비는 괜찮아. 다만 네가 걸리는구나. 사내아이들만 죽일 것이다. 너는 고될 것이나 세상을 버리지 말거라."

무관 유응부는 왕에게 대차게 소리를 질렀다. 

"나리! 쇠가 식었소이다. 더 뜨겁게 달궈서 오시오."

 왕은 차갑게 식은 자신의 공신들과 손이 델 듯 뜨거운 남의 신하들을 번갈아보았다. 인두와 칼로 그들의 몸은 뚫었지만, 정신의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살다 보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왕은 자신이 아니라 아들과 조정을 위한 명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사육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거열형을 당하고, 해체된 육신은 저작거리에 던져졌다. 남겨진 가족은 왕명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 돌을 지난 사내아이의 입에 소금을 채워 넣어 죽였고, 부녀자들은 관아의 노비와 공신들의 첩으로 보내졌다. 전란이 일어나지 않은 한양의 골목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누구도 시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먹구름 보다 검은 침묵과, 지엄한 왕명보다 무거운 분노가 골목마다 내려앉았다. 

 사흘 째 되는 날, 거지꼴을 한 사내 하나가 여기저기 뒹굴던 신하들의 사지를 바랑에 담기 시작했다. 왕에 의해 죽었지만, 역사에 의해 부활하는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이는 생육신으로 살아가게 되는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한시를 지은 신동이었다. 늙은 정승이 찾아와 시 한수를 청했다. 정승은 아이에게 늙을 노 한 글자를 내밀었다. 다섯 살 난 아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붓을 거침없이 놀렸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 

 늙은 신하의 감탄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다섯 살 난 아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신하들이 만류했다. 궁에 들어와 도승지 앞에서 써 내려간 시 또한 아름다웠다. 세종은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며, 장성하면 궁에서 다시 만나자 격려했다.

 과거를 준비하던 청년 김시습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붓을 꺾고 상투를 잘랐다. 유교의 나라에서 인과 예과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왕이 버린 예를 되살리기 위해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다. 한강 너머 노량진 언덕에 이른 김시습은 작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대들을 따르진 못했으나 편히 살지는 않을 것이오. 바람처럼 흐르다 마음이 이끌면 다시 들리겠소 “ 

 김시습은 삼은각이 있는 동학사로 향했다. 조선의 선비가 찾은 삼은각은 조선을 부정한 고려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를 모신 곳이다. 김시습은 그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의 제사를 지냈다. 상투를 자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머리를 깎은 시습은 수행을 위해 길 위로 떠났다. 스님이 되는 것은 유교의 이념이 무너진 조정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팔도를 돌며 백성들의 삶을 체득했다. 

 유랑의 끝자락에 경주의 금오산(남산)에 머물며, 필생의 역작이자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펼쳐낸 금오신화를 토해냈다. 최초의 한문단편소설이었지만, 당대에는 그 의미도 위대함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세계를 천박하다며 입으로는 폄하하고, 필사본이라도 구하기 위해 안달을 부렸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게 신화(神話)가 된 신화(新話)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27년 계명이라는 잡지를 통해서이다. 육당 최남선이 소장하고 있던 일본에서 제작된 판본을 공개한 것이다.

 시대가 담지 못해 흘러넘친 재능을 가진 김시습은 끝내 세상에 융화될 수 없었으나, 공신 중의 공신인 한명회는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며 늙어갔다. 압구정 정자 위에서 살생부를 만든 지난날을 미화하며 시 한수를 남긴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한명회>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던 김시습은 한자 두 글자만 바꾸고 가던 길을 갔다.

 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김시습>


 영월로 유배 보낸 어린 조카를 떠올리자 왕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으나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왕은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동이 틀 무렵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귀신이 다시 나타났으나, 말이 없었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체념한 눈빛은 아니었다. 천장에서 왕을 내려다보던 귀신은 바닥에 누운 왕에게 피를 토해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예감한 어미의 피는 짐승의 것과 같았다. 제 아무리 대담한 왕이라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피의 질감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놀란 티를 내지 않았는데 문 밖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들렸다. 

“주상전하!......... 세자 저하가.......”

 자신을 해치려는 귀신은 두렵지 않으나, 자식을 해코지하려는 미물도 두려운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왕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정신이 온전히 깨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리가 먼저 움직였으나, 말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왕의 장남인 의경세자는 세종의 첫 손자였다. 문종의 장남 단종은 삼 년 후에나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된 세종은 관례를 깨고 대군의 가족을 궁에 머물게 하였고, 틈만 나면 손자를 안은 채 궁 곳곳을 누볐다.

"어떠냐? 요 눈매가 나를 쏙 빼닮지 않았느냐?"

"그러하옵니다. 주상전하!"

"아니다. 자세히 보니 눈매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나를 닮았구나. 허허허 허"

 왕이 당도했을 때 세자의 육신은 이미 맥없이 널 부러져 있었다. 왕은 여느 아비처럼 달려가 세자를 안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선채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핏기가 사라진 세자의 얼굴에 자신이 배반한 아버지와 형님의 모습이 번갈아 스쳤다. 세자는 용모뿐만 아니라 성품도 자신이 아닌 두 사람을 닮았다. 그래서 왕은 세자를 더욱 아꼈었다. 왕은 아들의 늘어진 사지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무덤과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떠올렸다. 아들의 죽음은 그 지관의 말대로 묘 자리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저주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치러야 할 업보일까? 전자라면 능을 옮겨야 하고 후자라면 이것이 마지막이길 빌었다.

 왕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금부도사를 청령포로 보냈다. 소년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된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육지 안의 섬이자 천혜의 감옥이다. 벽촌에도 한양에서 일어난 도륙소식은 이미 전해졌다. 소년은 왕의 명이 곧 도달할 것이라 여겼다.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지 처절하게 생을 버텨야 할지 생각은 자주 바뀌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그릇된 일을 수긍해야 하는 처지가 갑갑했다. 

 “찾아 계시옵니까?”

 영월에 대대로 터를 잡고 살며 관아 일을 하는 호장 엄흥도가 좁은 마당에 들어서며 소년의 생각을 깨웠다.

 “어서 들어오시게.”

소년은 궁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건을 소담하게 담아 엄흥도에게 내주었다.

 “그간 고마웠네. 돈이 될 만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이니 받아주게. 그리고 오늘부로 발길은 끓게. 곧 한양에서 군사가 올 것이네.”

 “아니. 이 무슨 갑자기.....”

 “내 자네 덕에 짧은 생의 마지막이 적적치 않았네. 좋은 인연이었어. 혹여라도...... 내가 죽은 후에, 내게 일어난 일 때문에 자네의 몸이 나서면 큰 화를 입을 것이네. 혼자가 아니고 식솔이 있지 않나. 나 또한 줄 것이 마음뿐이니 자네도 그저 마음만.......”

 “전하...................”

 “어허!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만. 썩 물러가게.”

몇 년 사이 겪은 고초에도 소년의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말본새는 중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라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글과 다른 말들이 소실되지 않고 전해진다. 

 어떤 이는 소년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 하고, 다른 이는 종놈이 활시위로 소년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몇 되지도 않는 사람들의 말이 제 각각인 이유를 따져서 무엇하겠나! 지엄한 왕명이 무사히 당도하여 집행되었거늘.

 죽은 소년은 강에 던져졌다. 시신은 물에 가라앉지 못하고 자꾸 떠올랐다. 한양의 양반들도 멸문지화를 당했다. 벽지의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했으나 새어 나오는 울음까지는 가두지 못했다. 청령포에는 밤늦도록 숨죽인 곡소리가 끓이질 않았다. 

 잠들지 못한 엄흥도는 소년의 명을 어기기로 했다. 그저 눈감고 세월을 강물에 흘려보내면 천수를 누리고 살 것이나, 남은 생 동안 마음이 크게 쓰일 것이다. 엄흥도는 지게를 지고 아들과 집을 나섰다. 의를 행하기 전, 가까운 이들에게 뜻을 전했다. 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엄흥도의 마음은 단단했고, 강가로 하는 발걸음은 올곧았다.

 엄흥도는 온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년을 업은 채 산을 올랐다. 마음이 급하여 소년의 목에 감긴 줄을 풀 생각조차 못했다. 정신없이 땅을 팠고 작은 돌무덤을 만들어 예를 다했다.

“전하! 가까이서 모실 수 있어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다음 생애에는 여염집에서 태어나소서. 그때는 제가 꼭 금강산 유람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엄흥도는 동이 트기 전, 족보까지 태워버리고 왕의 나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산 자를 귀신으로 만든 왕은 귀신의 무덤에 파묘를 명했다. 소년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은 시동생에 의해 유린되었고, 초라한 묘 하나가 강가에 덩그러니 세워졌다. 아들을 지키지 못한 귀신은 더 이상 왕의 침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왕의 몸에 깊은 원한을 각인시켰다. 

 왕의 몸 곳곳에 종기가 돋기 시작했다. 온천욕을 위해 온양으로 행궁을 떠났으나 차도가 없었다. 팔도의 어떤 명의도 왕의 병을 다스리지 못했다. 유교의 근간 위에 세원진 나라의 왕이 부처에게 매달렸다. 공주와 사위는 불공을 올리고, 문수보살의 몸 안에 왕의 피고름이 배인 적삼을 의탁했다. 어떤 짓도 소용이 없었다. 왕의 피부병은 죽는 날까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작거리에서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피와 침이 왕의 피부를 썩게 한다고 수군거렸다. 

 왕의 장남이 죽고 조카가 죽임을 당해도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왕의 둘째 아들인 인성대군의 장남이 돌도 지나지 않아 풍질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주검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왕은 손자를 끌어안은 채 금수처럼 울었다. 왕이 외면하려던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번뇌 끝에 답을 얻었다. 왕은 오랜만에 단잠에 들었다. 어쩐 일인지 피부가 전혀 가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잠에서 깬 왕이 신하들에게 천릉을 논했다.

"주상전하, 천릉이라니요? 선왕의 능소가 파괴된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런 무리한 일을 명하시옵니까? 법도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백성의 원성이 더 높아질 것이옵니다."

"절사손장자! 그대들도 그날 지관이 한 말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세자와 세손을 잃었다." 

이를 모르지 않지만 개의치 않다고 말하는 공신들에게 왕이 물었다. 

"능소가 파괴되지 않더라도 흉지로 판명이 되면 천릉을 하는 것 또한 법도이다."

"전하! 선왕의 능은 전하를 보위에 오르게 하신 천하의 명당이옵니다."

꺼내서는 안 될 말이 공신의 목구멍에서 기어 나와 왕의 귀에 닿았다. 왕의 동조자이자 살해 공범인 공신들이 왕에게 되묻고 있었다.

'나리! 그 자리가 나리 혼자 힘으로 얻은 것이요? 그 자리는 나리의 형과 아들을 죽게 한 우리의 명당이요. 나리의 아들과 손자는 대업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소.' 

 왕은 자가당착에 빠졌다. 천릉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될 것이며, 하지 않으면 후손을 더 잃을 것이다. 

‘이 나라는 결국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가 되는 것인가’ 

왕은 스스로 자초한 기괴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

 "전하. 지금은 민심을 헤아려야 하오니, 천능은 추후에 다시 논하심이 합당한 줄 아뢰오.

 재위 14년, 죽음을 앞둔 왕은 대신들을 모두 물리고 세자만을 남겼다. 가질  수 없었던 권력을 품었으나, 아비의 묘도 옮기지 못한 허상을 손에 꼭 쥔 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숨만 거칠어졌다. 왕에게서 생명의 징후가 보이는 곳은 오직 피부의 고름뿐이었다. 왕은 사력을 다해 세자에게 말하려 했으나 끝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자는 그저 그 뜻을 미루어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왕이 계유정난을 후회했는지 아니면 더 모질지 못했다고 후회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얼굴은 죽어서도 몹시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인지 피부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인지 또한 알 수 없다. 왕의 죽음을 확인한 세자는 흉하게 상한 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자가 왕이 되었고, 그 왕이 죽음으로써 자신이 왕이 되었다. 

 모든 새 왕의 첫 임무는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옛 왕의 시신은 장례절차를 위해 궁에서 오 개월간 머무는데 이는 동빙고의 얼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왕의 장례는 삼년상을 기본으로 육십여 가지에 이르는 절차를 따랐다. 

 백성들은 덕 있던 왕이 승하하면 울었고, 그렇지 못한 군주가 죽으면 더 구슬프게 울었다. 왕릉을 조성하는데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은 ‘승정원에 산릉 (태종의 능)의 역사로 인한 폐해에 대해 이르다. 일만 오 천명을 사역시켜 죽은 사람이 백 명이나 된다.’ 고 전한다.

 세조는 풍수지리와 민심을 고려하여 자신의 묘역 조성을 간소화할 것을 명했다. 석실과 석관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새 왕이 처음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 것 또한 능에 관한 것이었다. 새 왕(예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천릉을 시행했다. 이는 죽은 왕의 염원이자, 왕가를 지키기 위한 가장의 본능이며,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임을 알리는 첫 날개 짓이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옮기는 천릉이 산 자의 정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왕은 할아버지의 새 무덤을 찾기 위해 지관 안효례에게 명하여 한양 인근 백리를 두루 살피게 했다. 안효례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무려 여섯 왕의 재위기간 동안 지관으로 일한 조선 최고의 지관 중 한 명이다. 세조의 능 선정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기에, 세종의 천릉에도 안효례가 나선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백리는 조선의 법도였다. 백리를 넘어가면 왕이 당일에 환궁하기가 어려우므로 정사를 돌보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양 백리 내에서 쓰이지 않은 명당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선 왕릉 최고의 명당이라는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 세조의 영릉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관은 한양 백리 너머까지 살펴야 했고, 운명처럼 큰 비를 만나게 되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지관이 들어간 곳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재실이었다. 비가 그치고 밖으로 나온 지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누군가의 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당이었다. 천릉을 위해서는 세조 때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이계전과 이인손의 묘를 이장해야 했다. 왕은 두 집안에 보상을 내리며 어르고, 왕가의 존엄을 내세워 달랬다. 신숙주 등이 천릉할 여주 땅은 백리가 넘는다고 돌려 묻자, 왕은 물길로는 백리 안쪽이라고 짧게 답하였다. 


 한편,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 이인손의 집안에서는 지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였다.

 “산소에 봉분은 물론이고 어떤 비석도 절대로 세우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묘지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유족들 누구도 지관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건방진 자로구나. 지관이 땅만 보면 될 것이지. 집안의 체통이 있거늘! 어찌 묘를 그리 허술하게 쓴단 말인가.”


 세종대왕릉은 여주로 옮겨져 영릉으로 조성되었다. 두 명의 왕이 바라던 천릉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천릉은 새 왕의 처음이자 마지막 업무였다. 문종부터 이어지던 조선 왕가의 장자 사망의 고리는 끓어졌지만, 새 왕은 재위 13개월 만에 승하한다. 한 시대와 한 무덤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수장된 줄 여겼던 돌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수면으로 부상했다.


 소년이 사사된 지 240여 년이 흘러, 숙종은 소년의 무덤을 왕릉으로 추존하였다. 엄흥도가 만든 돌무덤 자리에 장릉이 조성되었다. 다시금 왕이 된 소년과 왕릉이 된 그의 묘에 제를 올리는 날, 제문을 읽기 위해 한 사내가 도착했다. 축문을 읽는 이의 입매는 박팽년을 닮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의 후손이 어찌 살아남아 그 들이 지키려던 왕의 무덤 앞에 나타난 것인가? 

 박팽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남자라면 갓난아기도 죽음을 면치 못하던 날,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다. 이 씨 부인에게 산달 기간의 자유가 유예되었다. 부인은 출산을 위해 친정이 있는 대구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아이를 낳고 나면 어미는 대구의 관기로 보내질 것이고, 사내아이는 죽음이 약조되었다. 

 어린 시절 이 씨 부인과 함께 자란 종이 같은 달에 딸을 낳았다. 노비의 딸은 이 씨 부인의 딸이 되었고, 박팽년의 손자는 노비의 아들이 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다 성종 대에 이르러 신원이 복원되었다. 그렇게 사육신의 후손이 축문을 읽게 되는 복된 날이 온 것이다. 사육신은 왕에게 충절을 지켰고, 박팽년의 후손은 나머지 사육신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신의를 지켰다.


 장릉에는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배식단이 있다. 이는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바친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모신 위패의 수가 260 여기에 이른다. 권력을 잃은 어린 왕의 곁을 죽음으로 지키던 이들이 다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장릉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정려비도 세워져 있다. 죽은 이를 위해 자신의 안전한 삶을 등진 엄흥도는 조선의 시각에서는 충절을, 현대의 관점에서는 인류애를 행한 것이다. 

 엄흥도가 충신으로 복권이 되고, 왕조가 무너지고도 세월이 흐른 2005년, 그의 후손 엄홍길이 또 다른 인류애를 발현하기 위해 산으로 떠난다.


 그와 후배 박무택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험준한 산을 여러 차례 함께 올랐었다. 2004년, 두 사람은 오랜만에 카트만두에서 만났다. 둘은 다른 봉우리로 오르기 전이었고, 엄홍길은 무사히 내려와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후배의 손을 잡아주었다. 

 무택은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원정대에 참가했고, 개교기념일인 5월 20일에 정상 등극을 목표로 하였다. 사고 당일도 처음은 순조로웠다. 정상에 학교 깃발을 꽂은 무택은 격양된 목소리로 정상에 도착했음을 베이스캠프에 전했다.

 산을 내려오며 오랜만에 아들을 볼 생각에 무택의 가슴은 설렘으로 찢어질 듯이 팽팽해졌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지 않으며 불길함을 느꼈다. 이 눈물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닌 설맹의 전조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생각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결막이 부어오르며 통증이 시작되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불운은 다각도로 찾아왔다. 심리적으로 쫓기자 탈진증상까지 발생했다. 무택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빠른 결단을 내렸다. 

 "먼저 내려가라."

 후배는 고집을 피웠지만, 무택도 단호했다. 무택이 사람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얼마 후,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무전을 마지막으로 무택의 목소리는 소멸됐다. 베이스캠프 인근의 외국 원정대에 구조 요청을 했지만, 악천후 앞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무택의 눈은 하늘과 땅 사이 해발 8700미터 구간에서 자꾸 감겼다.


 엄홍길이 무택의 집을 찾은 날은 시신 없는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무택의 영정 사진은 다섯 살 아들의 가슴을 가득 채웠고, 아이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빠를 보며 웃고 있었다. 엄홍길의 손에도 사진 한 장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무택의 아내에게 무택의 주검을 설명해야 했다. 무택의 아내가 넋이 나간 채 울었지만, 홍길의 말은 이어졌다. 눈에 묻히지도 못하고, 설산에 홀로 남겨진 남편을 본 아내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넋두리를 했다.

 "머리카락도, 손톱도 필요 없어요. 그저 눈에라도 이 사람을 묻어주면 좋겠어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엄홍길의 마음은 퍽 먹먹했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 산을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얼어붙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위험이 배가되는 것이며, 세상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그 산에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각처에 남겨져 있는 이유다. 차라리 실종되었다면 모두의 마음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택의 시신은 눈 속에 가라앉지 못하고 영혼은 설산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시신과 산에 매달려 있는 시신을 보고도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다. 삶을 위해 본 것을 못 본체 해야 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엄홍길은 500년 전 자신의 조상이 맞대한 질문과 마주했다. 그러나 시간이 깊어질수록 고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명료해졌다.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 원정대'가 꾸려졌다. 세계 등반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함께 죽을 것이라고 했다. 2005년 1월, 휴먼원정대는 한라산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훈련을 시작했고, 3월 히말라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은 강처럼 잔잔했다. 그동안 바라본 하늘과 달랐다.


 뜻은 숭고했고, 마음은 더없이 맑았으나 산을 오르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산증과 추위가 원정대를 괴롭혔고, 엄홍길 또한 극심한 기관지염으로 호흡곤란 증상까지 겪었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면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정대는 한발 한발 더디지만 정확하게 무택을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그와 닿았다. 

 무택의 주검은 마치 원래 산의 일부였던 것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무택아! 어서 일어나야지. 어머니랑 제수씨랑 아들이 기다린다.”

엄홍길의 채근에 무택이 금세라도 대답할 것 같았다. 그 산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쉬이 구별되지 않았다. 

 시신을 얼음에서 분리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럼에도 원정대는 시신을 산 아래까지 옮기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산은 끝내 무택을 내어주지 않았다. 충분히 마음을 다했으니 그만 내려가라는 무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 지쳤지만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무거운 결단을 내려할 순간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햇볕도 잘 들고 산 아래가 잘 보이는 곳이 있다.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무택이를 데려가자.”

 그렇게 그 산에 시간을 초월한 작은 돌무덤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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