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 영남 지방에서 일어난 한 묘지 소송은, 투장에서 시작하여 파묘와 방화, 의문사, 살인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점은 당시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여성들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사건의 파장이 조선 사회 전반에 미친 파장이 워낙 커 훗날 한글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으로도 재탄생되었다. 지금부터 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보자.
경상도의 한 고을에 박수하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은 당쟁에 휘말려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박수하 역시 마찬가지 처지였다. 박수하의 슬하에는 두 딸이 있었는데 자매의 이름은 언니 문랑 과 동생 효랑 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대구 지방에서 현감노릇을 하고 있던 박경여가 자신의 조부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명당자리는 아직도 찾지 못했느냐? 내 출세가 더딘 것은 할아버지 묫자리 탓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리! 분부하신 대로 제가 기가 막힌 명당을 찾았사옵니다. 허나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좀 멀고, 더 심각한 일은 이미 묘를 누가 쓰고 있사옵니다.”
지관이 찾아낸 명당은 선비 박수하 집안의 선산이었다. 현직 관리로 있던 현감 박경여는 고심 끝에 박수하 집안의 묏자리에 자신의 조부 묘를 투장하기로 결심한다.
“은밀히 진행하되 혹여나 들키더라도 나는 현직이고 그 자는 벼슬도 없는 선비일 뿐이니. 어찌어찌 밀어붙이면 될 것이다.”
얼마 후, 박수하의 하인들이 문중의 묘를 관리하다 낯선 묘를 발견하고, 박수하에게 알린다. 이에 박수하는 60년 넘게 자신이 점유하고 있던 선산에 누군가 투장을 했다며 관아에 즉시 고발한다.
“이런 무식한데 괘심 하기까지 한 작자를 보았나! 관아에 알렸으니 금세 해결 될 것이다.”
그러나 박수하의 기대와 다르게 송사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급기야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리기에 이른다. 왕은 절차에 따라 경상감사에게 사건을 소상히 조사하게 하고, 경상감사는 조사관을 파견한다.
그럼에도 1년이 넘도록 사건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송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방 몇 미터 안에는 묘를 짓지 못한다’로 명시된 것이 아니라 좌청룡 우백호 내에는 묘를 쓸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좌청룡 우백호는 주관적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양측의 주장이 맞서는 경우가 잦았다.
세월만 무심하게 흐르는 동안 투장을 한 박경여는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산송이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해지자 투장한 자신의 할아버지 묘를 단장하고 묘비까지 세우게 한다. 이에 분개한 박수하는 박경여 집안의 노비를 잡아다 매질을 한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리 소인은 저희 현감나리께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요.”
박수하 입장에서는 애꿎은 박경여의 노비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폭풍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 현감 박경여가 자신의 노비를 매질한 박수하를 관할 관아에 고발한 것이다.
“현감 나리 보시오. 묘지 송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서 내 후손 된 도리로 조부의 산소에 비하나 세웠는데, 저 자가 글쎄 우리 종을 자기 맘대로 끌고 가 볼기를 때리니 내 억울해서 살 수가 없소이다. 같은 현감끼리 잘 봐달라는 말은 안 하겠으나 철저히 조사해 주기를 바라오.”
관할 관아에서는 송사가 접수되었으니 박수하를 소환하고 조사를 시작한다.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다고 착각했던 그는 너무나도 억울하여 특권층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까지 하고 만다.
“현감 나리! 지금의 이 송사가 공정하게 다루어지고 있소이까? 우리의 선산에 투장을 한 것도 모자라 나를 고발한 박수하는 경상감사와 친인척 관계가 아닙니까!!”
관할 지역의 성주목사는 경상감사에게 박수하의 발언을 슬쩍 흘린다.
“나리 아주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박수하 이 자가 쉽게 물러날 거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감사나리까지 들먹이고 난리입니다. 아무래도 제 선에서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이런 건방진 자를 봤나!”
경상감사는 성주로 직접 내려와 직접 박수하를 취조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만 박수하가 사망에 이르고 만다.
“무엇이라? 박수하가 죽었다고?”
“네! 유생이라 그런지 몸이 허약한가 봅니다. 그저 탁하고 쳤을 뿐이 온데, 이 자가 그저 맥없이........”
박수하 집안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러나 문중의 남자들은 상대가 권력자임을 알았기에 선뜻 행동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장녀 박문랑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묘지 송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박경여가 우리 가문의 선산에 투장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그 자의 목을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비롯한 모두가 장녀 박문랑을 말리고 나섰다.
“애야 안 될 말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그 먼 길을 네가 혼자 가서 어찌 그 자를 죽인단 말이냐.”
“그럼 그냥 앉아서 참고 있으란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 자를 찾으러 가지 않고 박경여가 제 발로 저를 찾아오게 만들겠습니다.”
다음 날 밤, 박문랑은 하녀 몇 명을 데리고, 박경여의 조부 무덤을 찾는다. 그리고 손과 괭이를 동원해 파묘를 시작했다. 문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 경여 조부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 불을 질러 버린다.
“이 집안 족속들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내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소식은 당연히 박경여의 귀에 들어갔고, 며칠 후, 박경여가 보낸 무장한 노비들이 파묘된 묘 앞에 당도했다.
“아이고! 이……. 이를 어쩌면 좋냐. 아주 난리가 났네. 이 계집은 탄 시신은 도대체 어디다 둔 것이냐?”
그 순간 박문랑이 손에는 칼을 들고 말을 탄 채 무장한 남자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문랑도 알았을 것이다. 이 묘지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자신의 죽음뿐이라는 것을.
박문랑의 죽음을 조사하던 관아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한다. 문랑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산송 문제는 해결도 되지 않고 언니의 죽음을 자결이라고 결론 내리자 이번에는 동생 효랑이 나선다.
“제가 아버님과 언니의 원수를 갚겠사옵니다.”
“안 된다. 너까지 죽게 둘 순 없다. 상대는 현직 현감과 감사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는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또한 저는 묘책이 있습니다.”
박효랑이 선택한 방법은 보복살인도, 관할 관아와 경상감영을 상대로 송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임금을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길을 떠났다. 남장을 한 박효랑은 먼 길을 걸어 마침내 한양에 당도했고, 저작거리에서 왕의 행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숙종이 나타나자 갓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주상전하 세 가지 청이 있나이다. 저의 아비와 언니를 죽인 박경여를 법에 따라 처벌하시고, 편파적으로 한쪽의 주장만 들은 관리들을 처벌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일이냐? 아녀자가 머리까지 풀어헤치고? 소상히 말해 보거라.”
박효랑의 묘책은 성공했다. 송사를 다시 살피라는 왕명이 내려졌으니 공정하고 엄중한 수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 찜찜한 구석이 있었던 효랑은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한양에서 머물며, 궁으로 출근하는 관리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런 박효랑의 용기 있는 행동은 장안의 화제가 되며 왕조차도 가지고 싶어 하는 민심을 얻게 된다.
“아휴. 저 어린것이 얼마나 당찬지 몰러. 임금님 앞에서도 말도 잘하고.”
“얼마나 원통했으면 그랬겠어! 제발 효랑이의 원통함을 누가 좀 풀어졌으면 좋겠어.”
박효랑의 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을 타고 번졌으며,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민심이 요동치자 이에 힘을 얻은 각처의 유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숙종 38년, 먼저 안동 지역의 유림 379명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효녀 박효랑의 등장은 허구한 날 당하기만 하는 백성들과 정계진출의 길이 막힌 유생들의 한을 풀어 주는 기폭제였다.
왕의 엄명으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결과는 절반의 승리였다. 산송에서는 비록 현직 현감인 박경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곤장형까지 내려지게 되었다. 문랑과 효랑 자매는 이례적으로 집안의 족보에도 이름이 올랐고, 훗날 영조의 명으로 효녀 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