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한 마을에 사는 고려인 할머니가 보낸 탄원서가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우리 할아버지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봉환해 주십시오.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이곳 카자흐스탄에서 죽어서,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탄원서의 주인공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일명 ‘장군의 귀환’으로 명명된 그의 유해 송환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그가 왜 카자흐스탄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기는 동네사람들의 젖을 얻어먹고 자랐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소년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아가야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끼니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지칠 법도 하지만 생에 대한 인간의 집념은 생각보다 질기다. 어떤 고생과 고통도 견딜 수 있었지만 허기는 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밥을 준다는 방을 보고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나이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은 큰 키 덕분이었다.
상습적인 구타의 이유는 치졸했지만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군 생활 내내 홍범도를 가장 괴롭힌 것은 살기 위해 난을 일으킨 백성들을 진압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왜 순박한 그들이 곡괭이와 낫을 들어 올렸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악질 간부를 두들겨 패고 탈영했다.
세상을 떠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탈영병이 자리를 잡는 일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믿을 것은 타고난 힘이고, 내세울 것은 젊음뿐이었던 그는 제지소에서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제지소의 사장은 그의 처지를 눈치채고 월급을 체납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제지소 사장은 그가 탈영병인 것은 알았으나 탈영의 이유를 몰랐다. 범도는 악덕사장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의 끝에 금강산의 신계사가 있었다. 지담대사는 청년 범도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혈기 넘치는 장정을 붙잡고 그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만한 이야기들을 날마다 들려주었다. 청년 범도는 특히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일 년 후, 절에서 만난 여인과 마음이 통한 그는 아내의 고향인 함경도로 향했다. 어차피 범도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도 만나야 할 친척도 없는 처지였다.
홍범도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으나 자신이 이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농사만으로는 돈이 부족했다. 군대에서 배운 총솜씨로 포수일도 함께 했다. 범도는 유능한 포수였다. 일대에 그의 총솜씨를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 덕에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홍범도의 짧은 행복은 1907년 정미의병의 발발과 함께 끝났다. 일본이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것에 저항하여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은 포수들의 총기마저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홍범도는 총을 내어주는 대신 호랑이를 잡던 총으로 일본군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뜻이 통하는 인근의 포수들을 모아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홍범도는 일제의 공관이나 금광, 매국노 부자들을 공격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홍범도의 공격에 일본은 속수무책이었다. 60여 차례의 출동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다. 산에서 범을 잡으러 다니던 명사수를 산세도 어두운 일본군이 잡는다는 것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범도를 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은 쉽지만 효과적이며 비인도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산 아래 머물고 있던 홍범도의 아내를 연행해 왔다. 그리고 홍범도의 근거지를 비롯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갖은 고문을 행한다.
“네 이년! 네 남편이 있는 곳을 끝내 불지 않으면, 네 년이 보는 앞에서 네 아들을 죽여 버리겠다.”
홍범도의 부인은 일본군의 고문에 끝내 사망하고 만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홍범도의 아들을 앞세워 산으로 향한다. 아들의 손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비롯해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초가 담긴 편지가 적혀 있었다. 한 손에 편지를 들고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바라보는 홍범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빵”
산 위의 홍범도는 산 아래에 있는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만약 홍범도가 백기투항하고 일본군에게 자수한다면, 일본군은 나머지 의병들의 가족에게도 같은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홍범도는 리더로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아들아 미안하다.”
반전이 있었다. 명사수 홍범도가 쏜 총알은 아들의 귀를 스치고, 이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독립군이 된다. 일본의 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조선에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진 홍범도는 1908년 아들을 데리고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떠난다.
일본의 강경한 진압작전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 간도 등에 정착했다. 낮에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고된 이중생활을 해야 했다. 입을 거 먹을 거 아껴서 돈이 생길 때마다 무기를 구매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무기에 문제가 많았다. 매장에 진열되어 있던 총과 총알을 맞게 사 오는 게 아라 암시장에서 그날 나온 총과 총알을 사다 보니 서로 호환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19년, 심신이 지친 홍범도와 의병을 일으켜 세우는 소식이 고향땅에서 들려왔다. 백성들이 총칼도 없이 맨손으로 일으킨 삼일운동이 강토를 뒤흔들었다. 독립은 결코 무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의 힘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했다.
“참 답답하네! 그 시장에서 백날 만세 부르면 뭐 하냐! 독립이 그런 거 때문에 되겠냐!”
당시 일본은 이렇게 말하며 들불처럼 타오른 삼일운동의 기세를 어떻게 던 꺾어 보려 했고, 이는 뒷방에 숨어서 수많은 유관순을 바라보기만 하던 비겁한 이들의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삼일운동에 힘을 얻은 홍범도는 간도에서 군사 활동을 재개하며, 대한독립군 대장이 된다. 대한독립군은 부족한 무기와 더 부족한 군사로 인해 전략상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호랑이를 잡던 홍범도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일본군은 국경 너머 중국 땅에 주둔하고 있는 홍범도 장군을 잡기 위해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일본의 정예부대 월강추격대에겐 한 가지 찜찜한 점이 있었다. 강을 넘는다는 것은 중국의 국경을 무단 침입한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대한독립군을 얕잡아 보고 섣부른 결정을 내린다.
‘중국 몰래 국경을 넘어 당일치기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궤멸시키고 돌아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이렇게 월강추격대 VS 대한독립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 장소는 바로 봉오동이다. 자신감을 넘어서 우월감에 사로잡힌 월강추격대는 강뿐만 아니라 언덕과 산을 넘어 총공세를 펼쳤다.
“저 조센징 놈들 도망치는 꼴 좀 봐라. 추격해서 섬멸하라!”
그러나 이는 홍범도 장군의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다. 봉오동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이다. 죽기 위해 불길로 달려드는 모기떼 같은 일본군이 이 삿갓의 뒤집어진 꼭짓점 부분에 다다랐을 때, 홍범도 장군의 한 마디가 떨어졌다.
“전군!! 사격하라!!!
대한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혼비백산이 된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선택할 수 있는 작전은 단 하나!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월강추격대는 두 갈래로 나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 홍범도 장군도 의도치 않은 비와 안개가 봉오동 일대를 뒤덮었다. 안개는 대한독립군과 일본군의 시야를 공평하게 가렸다. 대한독립군이 추격을 잠시 멈추었다고 생각했을 때 안개 저편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군은 일제 사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안갯속 군대의 정체는 두 갈래로 도망치던 또 다른 일본군들이었다.
봉오동 전투의 의의는 최초의 한일 양국의 정규군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있다.
봉오동전투 4개월 뒤, 일본은 무려 2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전투가 아닌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홍범도 장군은 백두산으로 이동한다. 대한독립군이 백두산으로 전략적 이동 중 맞부딪힌 일본군을 물리치는 곳은 다름 아닌 청산리이다. 청산리에서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합동작전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한다. 청산리 대첩은 단 한 번의 전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에서 벌어진 총 10차례의 전투를 통칭해서 일컫는 것이며, 홍범도 장군의 지분도 상당하다.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
간도는 중국 땅이지만, 일본의 수탈로 수많은 우리 백성이 넘어가 인구의 70프로 이상을 차지하며 대형 한인 사회가 형성된 지역이었다. 또한 우리 의병들이 국내진공 작전을 펼친 베이스캠프이기도 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도 간도주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간도는 일본군에게 눈에 가시였다. 그러나 중국 영토였기에 함부로 출정을 감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간도를 비롯한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토벌을 중국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중국군은 우리 독립군이 떠난 진영만 파괴하는 선에서 그치고 협조를 하지 않았다.
“중국이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다 생각이 있다.”
일본은 간도에 거주하는 민간인 학살 작전을 수립한다.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한 그들에게도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이 없으면 만들어라!.”
일제의 돈에 매수된 중국 마적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 이때 수십 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가 사망한다. 일제는 조작된 ‘훈춘사건’을 통해 명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일본은 중국에게 자국민 사망에 대해 형식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중국 당국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간도로 일본군을 보냈다.
<간도참변의 피해>
사망자에 대한 의견이 통계마다 다르지만, 3700명의 우리 백성, 명백한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홍범도 장군의 둘째 아들도 이때 사망했다. 방화와 살인이 동반된 참혹한 전쟁범죄가 발생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탄식을 통해 현장의 모습이 생생히 전해진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사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2년 홍범도 장군은 뜻밖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치졸하고 야만적인 작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독립군보다 더 큰 화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때 마침 홍범도의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가 자신들의 혁명군에 협조하면 조선 독립투쟁에 군사력을 지원하겠다고 설득했고, 홍범도 장군은 어떤 금전적인 요구나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닌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이에 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배신과 독립군의 분열로 홍범도 장군은 농부가 되어 러시아에서 살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이 고려인 1세대가 된 연유이다.
홍범도장군의 고단한 삶에 또 다른 불행이 닥쳐왔다. 러시아는 곳곳에 흩어져있던 조선인을 강제로 모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때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숫자는 무려 17만 명에 달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차를 타고 40일 넘게 이동하던 중 무려 500명이 사망했다.
한때 독립군 장군이었던 홍범도가 도착한 카자흐스탄의 시골마을은 완전한 황무지 그 자체였다. 홍범도는 고려인들과 땅을 개간하고 농부로 살아갔으며, 말년에는 극장의 수위가 되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이따금 고국 하늘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려인들이 만든 극장의 사장 부부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홍범도 장군에게 내어준 의자였다.
1943년 75세의 나이로 타향도 아닌 타국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남긴 유언은 “해방이 되면 나를 꼭 조국에 데려가 주오.”였다.
<장군의 귀환>
홍범도 장군 사후 78년 만에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 양국 정상의 합의로 장군의 유해가 독립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련의 모든 절차는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던 탁현민에 의해 기획 연출되었다.
2021년 8월 14일, 장군의 유해봉환을 위해 대한민국 공군의 다목적수송기 KC-330 시그너스가 카자흐스탄으로 향했다. 장례절차에 따라 파묘식, 유해봉환식이 진행되었고, 장군의 이름이 명명된 거리,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고려극장 등을 동포들과 함께 돌았다. 현지에서 장군의 영정사진을 들고 상주 역할을 한 이는 영화배우 조진웅이었다.
조진웅은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 역할을 맡았고, 한 영화제에서 수상소감으로 당시 촬영 현장의 모습을 회고했다.
“김해숙 선배님이 컷 소리가 떨어지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연하는 우리도 힘든데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분들 넋이 억울하지 않게끔 지켜온 땅 잘 지키면 좋겠습니다.”
또한 배우 조진웅은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통해 역사를 배운 특이한 케이스이다.
다음 날인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영정사진을 안은 후손 조진웅이 탑승한 공군 수송기가 대한민국의 상공에 진입했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대한민국 전투기 6대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실린 수송기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대한민국 탑건의 묵직한 말이 이어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홍범도장군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과거를 묻어버릴 것인지 미래로 도약할 발판으로 삼을 것인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촛불이 된 분들 덕택에 애석하게도 (?) 독립운동을 할 기회는 놓쳤지만, 기억이라도 붙잡고 사는 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덧붙이는 음악>
필자의 허접한 글 보다 더 많은 울림을 주는 영상이니, 딱 5초만 시간을 들여서 보기를 강권하는 바이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명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탁현민의 저서 ‘미스터 프레지던트’에 따르면 당시 의전 비서관이던 그는 오희옥 애국지사님과 함께 광복절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는 국방부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여성지사가 애국가를 부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리허설 전 지사님께 몇 소절만 부탁드렸더니, 여사님은 안익태의 애국가 이전 독립운동을 하던 때의 애국가를 부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다들 이렇게 불렀어.”
https://www.youtube.com/watch?v=-cj8r3OK1Zs&t=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