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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Jun 13. 2024

신라는 그를 궁복으로, 세상은 바다의 왕이라 불렀다.

 신라는 그를 궁복이라 불렀지만, 세상은 그를 바다의 왕이라 불렀다. 궁복은 활을 잘 쏜다는 평범한 의미를 담은 장보고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신라시대 골품제 아래에서 평민들은 성도 가질 수 없었다. 장보고는 훗날 신라 밖 당나라에서 스스로 쟁취한 이름이다. 장보고는 신라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동아시아에서 추앙을 받던 세계인이었다. 장보고에 관한 한중일 삼국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자. 우리의 기록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오히려 더 부실하다.


 을지문덕이 지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용이 있음에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사라져서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_삼국사기-

 신당서에는 장보고를 일컬어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그의 저서인 '번천문집'에 장보고와 정년 편을 따로 기록했는데, 장보고는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을 가진 인물이라 묘사하며, 동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중국 산둥성의 적산법화원에는 장보고의 대형 동상과 장보고 전기관이 마련되어 있다.

 일본에서 장보고의 위상은 더 높다. 일본 천태종의 3대 수좌인 승려 엔닌은 당나라에서 십 년간 유학하는 동안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가장 안전하게 건너는 방법은 장보고 선단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었다. 엔닌 스님은 말로만 장보고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저서인 입당구법순례행기는 동양의 3대 여행기로 꼽히는데, 장보고와 그의 선단에 관한 기록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그는 여기에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을 남겼다.

 "대사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높으신 이름을 오래전에 들었기에 흠앙하는 마음 더욱 깊어만 갑니다. 언제 뵈올지 기약할 수 없으나 다만 대사에 대한 생각만이 날로 깊어집니다."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연력사는 일본의 국보 사찰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력사의 별원인 적산서원에는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장보고는 어떻게 9세기 동북아 삼국 모두에서 추앙받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을까? 

 궁복은 완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혈기왕성한 궁복의 유일한 낙은 같은 동네에 사는 정년과 노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능하였고, 바다 소년이라 수영에도 능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정년은 숨을 쉬지 않고 50 리를 수영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잠영능력이 뛰어났다는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바다를 보고 자라 꿈이 넘치는 두 청년에게 완도는 너무나 좁았다. 두 사람은 다른 시대의 청춘들과 비슷한 꿈을 꾸었다. 고향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의 서라벌은 그들의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 신라의 골품제는 성골, 진골 두 개의 골과 6두품부터 최하위 계층인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성골만이 오직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성골이 소멸되며 태종무열왕을 시작으로 진골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진골 아래 계급 중 6,5,4 두품은 관료가 될 수 있었지만, 아래 하위계층은 출세가 불가능한 구조적 장벽이 있었다.  

 "정년아! 당나라로 가자."

 궁복과 정년은 왜 당나라행을 선택했던 것일까? 

당나라는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능력만 있다면 민족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세습된 신분과 상관없이 타고난 재능과 본인의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당나라의 빈공과는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제도이고 최치원은 이를 통해 당나라에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신라인이다. 삼국을 통일했지만 정작 신라인을 품지 못한 그들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는 소년 궁복과 정년을 당나라로 실어 보냈다.

 둘은 서주에서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용병에게도 후한 대접을 한다는 무령군에 입대한다. 서주 일대를 다스리던 절도사 휘하의 부대 무령군에 입대한 궁복은 그렇게 군인이 되었고, 스스로에게 장보고라는 이름을 주며 해신이 되기 위한 첫걸음을 육지에서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무령군 내에서도 낭중지추 그 자체였다. 신분제의 벽이 사라지자 둘은 중원을 마음껏 누비며 공적을 쌓아나갔다. 무령군에서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가던 그 들에게 위기이자 큰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오십 년 넘게 당나라의 골머리를 앓게 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멸망한 고구려 유민출신으로 당나라 안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던 이정기, 이사도 등의 평로치청군이었다. 당나라에 세금도 내지 않으며 산둥반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들을 진압하기 위해 무령군이 투입되었고, 장보고와 정년은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당나라 군사 천명을 지휘할 수 있는 무령군 군중소장에 임명된다. 두 소년의 꿈이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던 장보고는 인생의 항로를 튼다. 오직 비범한 자만이 안전한 길을 가다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장보고는 젊음과 타고난 무예능력을 활용했지만, 머리 또한 비상한 인물이었다. 신라인으로써 군에서 출세의 한계를 예측한 그는 오히려 신라인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기로 결심한다. 

 당나라는 다양한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수도 장안은 20세기 뉴욕 버금가는 메가시티였다. 통일신라도 당연히 당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고, 코리아타운 격인 신라방이 당나라 해안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은 무역, 상업, 조선업, 상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두 나라 말과 문화에 능통하고 당나라에서 입지도 탄탄한 장보고는 두 나라의 교역을 위해 그야말로 준비된 인재였다.  

 장보고는 뛰어난 사업수단과 친화력을 이용하여 당나라에서 사업가로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큰 도약을 위해 적산법화원이라는 산둥반도 최초의 절을 창건한다. 적산법화원은 불교국가인 신라백성들을 위한 종교 시설이자 해상무역을 위한 거대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된다. 

 신라에서 승려를 직접 모셔와 모국어로 법회를 여니, 당나라에 머무는 수많은 신라인이 사랑방 드나들듯 절에 모이게 되었다. 또한 무역상을 위해 숙소와 식사도 제공하니 바다에 떠다니던 정보가 함께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적산법화원에는 각국의 무역상뿐만 아니라 관리들까지 출입을 하며 거대한 인적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장보고는 적산법화원을 통해 명성과 빅 데이터를 양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없고, 바다는 인생을 닮았다. 승승장구하던 장보고에게도 큰 고민이 있었으니 장보고가 넘어야 할 파도는 바로 바다의 해적이었다. 해적들은 장보고에게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혔고, 신라인들을 납치하여 당나라 노예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중년이 된 장보고는 십수 년 만에 신라로의 귀국을 결심한다. 그의 귀국 목적은 신라 42대 흥덕왕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골품제 안의 신라인 궁복이었다면, 신라왕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완도 소년이 아닌 당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신라왕은 신라인 궁복이 아닌 당나라 사업가 장보고의 알현을 허락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삼국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를 두루 다녀보니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부디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적도들이 사람들을 당나라로 잡아갈 수 없게 하십시오."

 흥덕왕의 대답은 파격적이었다.

 "과인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명하고, 군사 일만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제수하노라."

 당시 신라의 해군은 신출귀몰한 해적을 소탕할 여력이 없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자국출신의 전직 당나라 군인이자 성공한 사업가인 장보고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당시 신라에는 없던 관직인 대사로 임명하며 장보고와 윈윈을 도모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장보고는 신라 백성의 안전과 장보고 선단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먼저 해적 소탕작전을 시작했고, 결과는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노예로 파는 사람이 없어졌다."

 해적이 사라지자 장보고의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급부상했다. 청해진은 신라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청해진에서 꼬박꼬박 들어오는 세금으로 재정이 넉넉해졌고, 장보고가 수입해 오는 사치품에 신라 귀족들은 열광했다.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물총새의 털인 비취모로 화려하게 옷을 장식하였고, 거북이 등껍질로 장식한 화문 빗으로 머리를 빗고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신라 귀족들이 열광한 화문 빗을 화려하게 장식한 거북이 등껍질은 아랍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장보고와 동시대를 산 아랍인 이븐 쿠르다지바의 저서에는 신라가 언급된 정도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와 교역품목까지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아랍에서 출발하여 인도양을 건너 인도네시아 팔렘방, 당나라 양주와 일본의 하카타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카타항은 후쿠오카의 무역항으로 고대는 물론 현대에도 일본의 주요 무역항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장보고가 무역을 위해 하카타에 직접 왔었고, 일본을 떠날 때는 당시 이곳에 팔 년째 살고 있던 신라인을 자신의 통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일본은 장보고의 한자어를 보배 보, 높을 고 자로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속 일본후기 841년의 기록을 살펴보자.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 말안장 등을 가져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은 민간에 맡겨 교역할 수 있게 하라.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값을 어기고 다투어 가산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라.’

 일본은 장보고 선단이 입항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보고 선단의 물건을 사기 위해 과소비하는 것을 경계하고 명할 정도이니 장보고의 일본 내 영향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837년 5월, 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던 장보고에게 한 남자가 길을 막고 장보고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사! 내 아버지가 살해되었소. 내 목숨도 경각에 이르러 이렇게 대사를 찾아오게 되었소.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내치지 마시오.”

 그는 서라벌의 귀족 김우징이었다. 김우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신라 42대 흥덕왕 대에 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시중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서라벌의 실력자였으나, 왕위계승 싸움에서 밀려 궁지로 몰리게 된 것이다. 

 사건은 42대 흥덕왕이 후손 없이 사망하며 시작되었다. 차기 왕위는 김우징의 아버지가 유력했으나 흥덕왕의 조카가 김우징의 아버지를 살해하며 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신라는 왕 또는 왕위계승 예정자가 암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후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신라는 멸망하게 되니 물리적인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는 것은 망국의 징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청해진에 숨겨주며 서라벌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사태를 관망한다. 얼마 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이가 44대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다시 질문한다.

 “대사!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무너져 가는 신라를 바로 세워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군사가 없소. 대사는 군사와 부, 인품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다만 한 가지가 없소. 내가 왕이 되면 대사의 마지막 한 부분을 채워 주리다. 나를 도와주시겠소?”

 장보고의 대답은 삼국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

장보고는 자신의 최측근 정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청해진 최정예부대 5천 명을 준비시켰다.

 "정년아! 우리의 오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형님! 내 금방 돌아올 것이니 산해진미로 가득한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려주시오" 

 장보고는 늘 안정된 항구를 벗어나 거친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까지는 모든 항해가 성공적이었으나, 이번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모험이었다. 

 정년이 이끄는 오천의 청해진 군을 맞이한 것은 수만의 신라군이었다. 수 적으로 절대 열세였으나, 해적과의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사기가 높았던 청해진군이 승리하였다. 아무리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신라군대의 사기와 기세가 떨어졌다고 하나 청해진 군의 승리는 모두의 예상을 깬 것이었다. 청해진 군대의 승리로 김우징은 신라 45대 신무왕으로 즉위를 하게 된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명예직이지만 군 최고 사령관에 준하는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내렸다. 이는 2천 가구에 딸린 사람들의 노동력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에게 식읍 5백 호가 내려졌다고 하니 왕이 장보고에게 가진 진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왕으로부터 받은 후한 상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신라 귀족들의 반발과 장보고에 대한 시기와 경계는 극에 달하게 된다. 장보고는 서라벌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청해진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서라벌을 떠나기 전날 왕을 찾은 장보고는 둘 사이의 약속을 환기시킨다.

 “신이 서라벌에 머무는 것은 왕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청해진에서 제가 하던 일을 하며 돕겠습니다. 다만 제 여식을 잊지 마십시오.”

 “내 대사와 한 약속을 어찌 잊겠소. 조만간 대사의 딸과 나의 아들의 혼인을 올리도록 하겠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군사를 청하며, 거사가 성공한다면 자신의 아들과 장보고의 딸의 결혼을 약조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 6개월 만에 사망하고 만다. 뒤를 이어 문성왕으로 등극한 그의 아들은 충격적인 발표로 신라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바로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와 청해진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왕의 결정에 신라 귀족사회가 들고일어났다.

 “궁복은 바다의 섬사람이거늘, 그 딸을 어찌 왕실에 짝지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바다의 왕, 해신이라 불렀지만 신라의 골품제만은 그를 궁복이라 불렀다. 문성왕은 결국 신하들의 반대로 결정을 철회한다. 이 결정으로 서라벌과 청해진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이미 한 차례 새로운 왕을 세운 적이 있는 장보고는 신라 왕실에게 눈에 가시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김우징(신무왕)의 부하장수였던 염장이 신라의 귀족세력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장보고, 아니 궁복과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이 맨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다만 신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청해진을 저에게 주십시오.”

신라의 귀족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세금을 바치는 청해진의 천한 거위 궁복은 필요했지만,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장보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좋다! 네 놈이 궁복의 목을 가져온다면 청해진은 너의 것이다.”

 해상 왕 장보고는 손님으로 맞이한 염장에 의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청해진은 신의를 잃은 염장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장보고가 사망하자 청해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장보고 사후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폐쇄되었다. 청해진 폐쇄 후 신라의 명도 채 백 년을 채우지 못했다. 신라의 골품제가 가른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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