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을 상실하였지만 자신들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내시 또는 환관이라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3세기경 은나라의 상형문자에서 처음 기록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 신라 흥덕왕에 처음 등장한다. 1908년,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편향된 시각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궁 안의 내전과 외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내시의 사생활에 대해 알아보자.
환관, 환자, 화자의 한자에는 성 상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내관, 내시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시대 내시는 조선시대 내시와는 달랐다. 과거에 급제한 남성 문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삼국사기 김부식의 아들과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대학자 안향도 내시였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정변을 야기한 고려 의종의 유모를 부인으로 맞은 환관 정함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무도한 의종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내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함의 집은 이백 칸이 넘었고, 마치 궁궐과 같이 화려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을 중용하여 고려의 사직이 오래가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경국대전에 내시의 역할을 철저히 제한시켰다. 내시와 환관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이다.
중국환관과 조선 내시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조선의 내시가 고환만 없는 것에 반해 중국의 환관은 고환은 물론 생식기도 없다. 우리나라는 사고를 당한 아이들이 내시가 되었지만, 중국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 포로에게 궁형을 내려 환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궁형은 일반 죄수에게도 내려졌는데, 사마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궁형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은 전쟁포로도 없었고, 궁형 또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내시후보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개에 물리거나 사고를 당한 아이들과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아이들이 내시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의 내시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입양을 통해 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각 고을의 아이들을 인맥으로 소개받거나 관청에서 추천을 하면 내시들이 아이들을 입양하여 호적에 올렸다. 내시들의 족보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아버지와 아들, 손자의 성씨가 서로 다른 이유이다.
고려사에는 이목을 끄는 기록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형이 동생을 또는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거세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고려시대 내시 정함을 빗대어 권력이 고자에서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로 내시의 권력이 막강한 시절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내시가 되려는 사람들이 자들이 있었고, 법이 존재하는 모든 시대에는 불법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정상적인 군주아래에서 내시는 권력을 누릴 수는 없었지만, 양반을 능가하는 월급을 받는 직업인 내시는 천민이나 양민들에게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고 수익에는 고 위험이 동반되는 것이며,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었다.
“자원아! 너 혹시 궁에서 살고 싶지 않느냐? 우리 집은 형제자매만 아홉이라 밥도 제대로 못 먹지만, 궁에 들어가면 배 불리 밥도 먹을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단다. 힘든 농사일도 안 해도 되고. 어떠냐?”
“참말 입니까요? 아버지 그럼 저는 그러면 궁에 가서 살겠습니다. 언제 갈 수 있습니까요?
“어허! 그놈 참! 성격도 급하긴. 내 그럼 인근에 사는 내시 나리께 말씀 해 놓을 터이니, 며칠만 기다려라. 대신 궁에 들어가려면 오늘 이 아비랑 어디 좀 다녀와야 한다. 어서 가자.”
“비가 이렇게 많이 오고 천둥 번개까지 치는데 지금이요? 천둥이 그치고 내일 가면 아니 되는 겁니까?”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 천둥이 치는 날에만 문을 여는 집이다. 어서 가자.”
조선시대 영등포 샛강 인근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번개와 천둥이 치는 날에만 손님을 받는 움막이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방법으로 자궁을 시행하였는데, 스스로 또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내시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천둥과 비 소리는 마취가 없던 시대의 비명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음도구였다.
또한 내시가 되기 위한 과정을 수련시켜 주는 민간 양성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쇄기 할머니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연을 안은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내시부에 모이면 다시 한번 엄중한 신체검사를 실시한다. 왕의 여자들을 지키고 감독하기 위함으로 생식 능력이 없어야 하지만 신체적으로 다른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면밀한 신체검사를 거친 후에는 혹독한 체력장을 통과해야 했다.
내시는 여차하면 왕을 업고 달려야 하므로 강한 체력이 필요하고, 물리적 폭력에도 왕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을 업고 달리는 시험과 물속에서 오래 참기, 거꾸로 매달려 버티기, 눈이나 코에 흙을 집어넣기 등의 인내력을 확인하는 시험을 거쳐야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90여 명의 어린이만이 인턴과정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 고생을 했는데도 아직도 내시가 아니라고요?”
“예끼. 이런 방자한 놈을 봤나! 내시되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어서 가서 마당이나 쓸지 않고 뭐 하느냐?”
인턴은 궁궐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며 무려 십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동안 궁 안에서 눈치와 몸으로 체득하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십 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서두에 언급한 대로 조선의 내시는 고환만 없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남성성을 되찾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자들을 걸러 내지 못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일기, 1504년>
지금 풍속이 거짓이 많아 고자들도 진짜가 아닐 수 있으니, 도승지는 의원 김홍수 고세보와 함께 협양문 밖에서 음신이 있는지 없는지 상고하여 아뢰라.
남성성을 되찾은 혹은 교묘히 감춘 내시들이 궁 안을 왕래하던 민가의 여인은 물론이고 궁녀들과도 스캔들을 일으켜 연산군이 내시들의 신체검사를 실시했다는 기록이다.
밀폐된 공간인 궁 안에 모인 청춘들 사이에서 사랑이 꽃피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였다. 그러나 궁 안에 사는 성인 남자는 오직 왕 하나여야 했던 것이 군주제이다.
내시가 되어서도 승진과 내시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수련의 과정은 삶처럼 계속되었다.
“처선아! 그간 고생 많았다. 하지만 내시가 되었다고 해서 결코 공부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마늘을 먹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내시들과 달리 학식이 높았다. 일 년에 서너 차례씩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 1권,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중 1권을 스스로 택하여 시험을 치렀다.
“아니! 또 시험이란 말입니까? 아주 지겨워 죽겠습니다. 처선 형님은 안 지겨우십니까?”
“지겨워도 어쩌겠나. 이게 다 임금님을 잘 보필하기 위한 수련의 과정인 것을. 조금 어렵지만 시험을 안 보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줄까?”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공부만 안 해도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시험을 면제받는 방법은 단 하나 더 이상 시험이 필요 없다는 실력을 입증하면 되었다. 자신이 아닌 시험관이 지정한 두 권 중에서 임의로 지정된 여섯 곳을 읽고 해석하면 평생 시험이 면제되었다.
"형님! 그냥 제가 정한 책으로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늘은 양기를 돋우는 최악의 음식으로 내시에게 엄격히 금기하였으니, 내시가 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경국대전에는 140여 명에 이르는 내시의 임무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먼저 왕의 수라상을 관리 감독하는 대내감선, 왕명을 전달하는 전명,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그리고 궁궐을 청소하는 소제로 나누었다. 이외에도 궁녀가 하기 어려운 잡다한 일과 책임소재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왕실의 제사와 재산관리, 건축공사 등의 일까지, 내시의 업무 폭은 세월이 지날수록 넓어졌다.
“마땅한 자가 없다면 김자원에게 맡기도록 하라. 능히 잘 해낼 것이다.”
내시 직 말단은 청소나 정원관리 등을 하는 종 9품에서 위로는 왕의 수라를 책임지는 종 2품 상선이 최고 품계였다. 모두가 관직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근무평점에 따라 승진을 하거나 출궁을 당하기도 했다.
품계로 따지면 왕의 수라상을 관리하는 상선이 최고위직이었으나,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색과 종 4품에 불과하지만 대전의 침실을 지키는 대전 환관의 영향력도 무시하기 힘들어 관리들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보시게, 오늘 주상전하 심기가 어떠신가? 내 오늘은 필히 주상께 올릴 주청이 있는데 말이야.”
“대감! 지난밤에 늦게 잠자리에 드셔서, 내일 찾아뵙는 것이 나을 것이옵니다.”
내시들은 결혼도 하고 입양을 통해 가족을 이루었으니 당연히 궁 밖에 집도 있었다. 21세기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순라길은 조선시대 내시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내시의 근무형태는 궁으로 출퇴근하는 출입번과 교대근무를 하는 장번으로 구분되었다. 장번은 왕과 세자궁에만 존재하던 근무형태였는데 근무 시간이 길지만 승진도 빨랐다. 그러나 교대근무를 하던 이들도 궁 인근에 집은 있었다.
“아이고! 나이가 드니 이제 몸이 힘들구나. 작년만 해도 사나흘 버티는 건 쉬웠는데 말이야. 자원아! 내 오늘은 집에 좀 다녀오겠다. 일 생기면 속히 사람 보내고. 수고하거라.”
“네! 염려 말고 푹 쉬고 오십시오.”
오늘날 세종로에 정부청사가 모여 있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유래된 것이다. 광화문 앞에 조선의 행정부인 6부가 있었고, 내시부는 오늘날 효자동 인근이라 신 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내시들의 월급은 얼마였을까?
말단 내시들은 쌀 9말을 받았고, 내시계의 영의정이라 할 수 있는 대전 상선은 쌀 한 석과 콩 한말을 받았다. 이는 정1품인 영의정의 녹봉보다 많았다. 또한 건강관리만 잘한다면 정년도 없었고, 은퇴를 한 환관에게는 집과 연금형태의 쌀까지 지급되니 내시는 가히 양민들에게 꿈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은 고대중국과 고려시대 환관의 횡포를 반면교사 삼아 그 들의 정치개입을 차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이 주의하고 예방한다고 다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서도 드물지만 내시가 왕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역사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현대정치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권력자의 측근이 미세한 균열을 뚫고 나왔고 그 틈이 거대한 싱크홀이 되어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다.
나쁜 내시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정왕후 수렴청정기간의 내시 박한종이 있다.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는 과정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었다. 중중의 세 번째 부인으로 궁에 입궁했으나, 앞선 두 중전이 각각 폐위와 출산 후 사망하였고, 당시로서는 노산인 서른다섯 나이에 아들을 출산하며 위태로운 정치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어린 아들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으니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의 장성한 아들이었다.
“아가! 빨리 자라서 보위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이 어미를 네가 꼭 지켜다오. 궁에는 엄격한 법도는 있지만, 정이란 것은 없는 곳이다. 이 어미는 숨이 막히는구나.”
그러나 남편인 중종 사망 당시, 그녀 아들의 나이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왕좌는 서른 살이 된 장경왕후의 아들에게 돌아갔고, 그가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다. 문정왕후와 그의 어린 아들은 궁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우리 아들 불쌍해서 어쩌누. 이 어미는 또 어쩐단 말이냐.”
궁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왕자의 운명은 물리적 죽음 혹은 정치적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종 말기부터 승전색을 지내던 환관 박한종이 문정왕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마! 저 박한종이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박한종? 승전색이 나에게 무슨 일로? 어서 들어오게."
왕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인 승전색은 왕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혹시 문정왕후에게서 강한 권력의 냄새를 감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새로 부임한 왕 인종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을 파악하고 양다리를 걸친 것일까? 실록에는 그의 처세술에 관한 기록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종의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곧바로 대비 전에 빌붙어…….>
박한종은 왕의 명령을 전하는 승전색이었기 때문에 늘 왕의 곁에 머물렀고, 왕의 건강상태라는 국가기밀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대비마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왔사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주위에 사람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남자가 아닌 내시는 대비의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까지 할 수 있었다.
“주상께서는 앞으로 며칠을 견디기가 어려울..........”
결과적으로 그의 처세술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섞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던 문정왕후는 기꺼이 박한종의 보험이 되어 주었다.
조선의 12대 왕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급작스레 승하하고, 문정왕후의 아들이 12세의 나이로 조선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이제 마음 푹 놓으시고 두 발 뻗고 주무시옵소서.”
“이게 다 자네 덕분이네. 내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자네나 나나 아직 다리를 뻗을 때는 아니네. 수렴청정을 통해 대신들을 휘어잡으려면 자네가 다시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주어야 하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한 몸 대비마마께 다 바치겠사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조선은 20세 이하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어머니인 대비가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신하들이 모든 남성이었기에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그 사이에 발을 내리고(수렴) 정사를 논하였는데 이를 수렴청정이라고 하였다. 수렴청정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총 7차례 시행되었으며, 왕이 스무 살이 되면 철렴환정이라고 해서 대비가 물러났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수렴청정기간이 지나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의 말을 전하고 발이 되어준 이는 이번에도 내시 박한종이었다.
정 4품의 상전 승전색은 정1품의 상선보다 직책은 낮았으나 왕의 최측근으로 때때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신하들은 왕에게 의견을 전하거나 결제를 요하는 건이 있을 때 승정원에 안건을 상정했고, 이 안건은 반드시 내시 승전색을 통해서 왕에게 전달되거나 신하들에게 하명되었다. 이러다 보니 박한종 같은 승전색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왕명을 왜곡하기고 했고, 왕에게 보고를 누락하기도 하여 관리들의 불만이 많았다.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내시에게는 과중한 권력이 주어졌다고 여겼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전원 남성으로 이루어진 신하들보다는 내시 박한종이 여러모로 편했다. 문정왕후는 불교부흥에 사활을 걸었다.
“이보게! 많은 절을 창건하고 방방곡곡의 절마다 시주도 많이 하고 싶지만, 유생과 선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나?”
“마마! 유생들의 상소와 대감들의 반대는 한쪽 귀로 듣고 흘리시면 되지만 결국은 돈이 문제지요.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에 나라 돈을 쓸 수 없으니. 하나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내수사의 내탕금이 있지 않사옵니까?”
내수사는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기관으로 종로구 내수동의 유래이기도 하다. 왕실의 혼례나 대왕대비 진상, 생일잔치 등의 왕실 행사는 국고가 아닌 내수사의 내탕금을 사용하였다.
“하나 내탕금이 돈이 솟아나는 곳간도 아니고. 내가 하려는 일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인데?”
“마마는 그런 하찮은 일에는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소인이 탈 안 나도록 잘 불려보겠나이다.”
명종 8년, 문정왕후 수렴청정 기간에 내시 박한종은 내수사의 수장인 내수자제조로 임명된다. 박한종은 다채롭고 악랄한 방법으로 내탕금을 불려 나갔다. 내수사는 비옥하거나 소출이 많이 나는 양민들의 땅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사대부의 재산도 강탈하였다. 땅 도둑질은 물론이고 노비도 빼앗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뇌물을 받으며 내수사에 돈을 비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내시 박한종은 부와 권세는 물론이고 천수를 누리다 문정왕후 사망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폭군 연산군의 시대에는 악행을 일삼은 내시 김자원과 내시의 표상이라 불릴만한 내시 김자원이 공존했다.
내시 김자원의 보직은 박한종과 같은 승전색이었다. 이성이 마비된 광기를 내뿜는 연산군에게는 직언을 하는 신하가 아닌 아첨을 하는 내시가 필요했다. 바른말하는 신하들을 내치는 것도 모자라 참수형에 처하자 궁궐에는 모리배 같은 신하들만 남았고, 그 위에 왕명을 핑계 삼아 군림하던 이가 김자원이었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은 연산군일기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
왕의 미치광이 같은 방탕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다. 선왕의 후궁들을 모아 술잔을 들게 하고, 밤낮으로 강제로 간음하였다. 범, 곰, 표범 등을 산채로 잡아 후원에 가두어 놓고, 쏘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채홍사가 전국을 뒤져 여자아이들을 잡아가니, 여식 가진 부모들의 탄식과 울음이 산아에 가득하였다.
연산은 인왕산에 백성들이 오르면 궐내 연회모습이 보인다 하여 출입을 금지시켰고, 팔도에서 잡아온 소녀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궁 인근에 살던 백성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왕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누군가 한글 벽서를 붙이자 왕은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다. 내시와 궁녀들 심지어 관리들에게도 목에 신언패를 걸게 했는데 그곳에는 왕의 진심이 적혀 있었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색 김자원은 왕의 곁에서 달콤한 말로 연산의 귀를 데워주었고, 왕명을 가장한 사사로운 말로 자신의 잇속을 챙겼다. 왕이 김자원의 비행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자, 신하들이 내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의 곁에서 왕명을 전달하던 내시는 스스로 왕이 된 듯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나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때 나선 이가 상선 내시 김처선이었다. 내시의 최고직이자 왕의 수라를 감독하는 상선내시는 독살로부터 왕을 지키는 최후의 병사이기도 했다.
“자원이! 네 이놈! 왕명을 받들어야 할 자가 주상의 눈을 흐리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들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어허! 이 형님이 진짜. 내가 아직도 코흘리개 내시로 보이시오? 나 승전색 김자원 이외다. 내 옛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이번만 봐주는데 차후에 또 이러시면 저도 못 참습니다.”
“뭣이라? 정녕 네 놈이 이러고도 내시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느냐?”
“처선 형님! 벌써 여든이 넘으셨습니다. 예! 이제 제발 그만 좀 집에 가셔서 손자 재롱이나 보고 좀 편하게 지내십시오.”
<1505년 4월 1일, 연산 11년>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7명의 왕을 보필한 내시 김처선은 자신의 마지막 왕 연산군을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입궁 전 아들과 부인에게 무거운 말을 꺼냈다.
“부인! 내가 오랫동안 품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니 말릴 생각은 말아주시오. 다만 나도 내시 이전에 한 집안의 어른으로써 깊은 고민을 했다는 것만 알아주면 고맙겠소. 나도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소. 작금의 주상에게 곧은 말을 하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오. 그러나 내시된 자로써 어찌 소임을 마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리오. 이대로 죽어서는 선왕들을 뵐 낯도 없을 뿐더러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니 어찌 아니 나서겠소. 그럼 난 이만 궁으로 가보겠소. 나오지들 마시게.”
김처선은 울며 매달리는 부인과 아들을 뿌리치고 마지막 출근길에 올랐다.
어찌 그 또한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궁으로 가는 길에도 생각은 수십 번 바뀌었으나, 입궁을 하자 결심이 단단해졌다. 왕은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고, 처선은 마지막 예를 다하기 위해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내시 김처선이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 우리 상선 내관께서 어쩐 일인가? 짐이 내리는 술 한 잔 받으러 온 것인가?”
“주상전하! 제가 모신 임금들 중 누구도 전하처럼 행동한 군주는 없었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정신 차리시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십시오.”
연산을 비롯한 주위의 모두가 늙은 내시의 말에 사지가 얼어붙었고, 사위는 새벽처럼 고요해졌다. 누구보다 놀란 이는 왕이었다.
“뭐....... 뭐……. 라 했나? 내가 지금 헛것을 들은 것이냐? 저 내시 놈이 노망이 난 것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 죽고 싶거든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전하! 조정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 늙은 내시가 죽음 따위가 두렵겠습니까! 다시 한번 주청 드리옵니다. 저를 죽이시고 옳은 정치를 하시겠다면 종묘사직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너는 말로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겠구나.”
연산군은 김처선을 향해 망설임 없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쓰러진 그를 칼로 베었고, 김처선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와 함께 말을 쏟아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함이 아니고 주상을 위한 것임을 어찌 모르신단 말이요. 이런 식으로 바른말하는 자를 모두 죽이다가는 보위를 더 이상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화살을 맞고 칼에 베여 한 줌의 시간도 남지 않은 그가 무엇이 두려웠으랴.
연산군은 이 날의 심경을 시로 남겼다.
이토록 백성들에게 잘해왔건만 내시가 임금을 모욕할 줄이야
부끄럽고 아픈 마음이 극에 달해서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
연산군의 분노는 시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처선 사후 왕이 취한 행동은 그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동정심마저 사라지게 한다. 재위 말년의 연산군은 명백한 광인이었다.
왕은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대신에게는 개명을 명했고, 왕실의 모든 문서에 ‘처’ 자의 사용을 금했다. 명령에 그친 것이 아니고 샅샅이 뒤져 조치를 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문서에 ‘처’ 자를 실수로 쓴 한 관리는 국문을 받았으며, 27세의 유생 권벌은 시험지에 ‘처’ 자 단 한 자를 썼다는 이유로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다. 가을을 알리는 절기인 처서를 조서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으며, 연회 때마다 자신이 즐겨 추던 처용무를 풍두무로 부르게 하였다. 김처선의 일가족을 죽였음은 물론이요. 그의 고향인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지명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연산군은 김처선을 지워내면 지워낼수록 자신의 오명이 짙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다.
김처선의 저주였을까?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까? 김처선이 죽은 이듬해인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공포정치의 완성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어렵다. 어떤 광인도 할 수 없기에 공포정치의 종착역은 늘 자신의 파멸로 끝이 나는 것이다.
중종반정 당일 김자원은 처형당했고, 연산군은 강화도에서 유배 도중 사망하였다. 훗날 김처선은 신원이 복구되는 것을 넘어 충신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악을 벗 삼아 살아도 천수를 누릴 수 있고, 법의 심판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판관은 인간보다 집요하고 냉혹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