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서당, 빨래터 등을 그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는 조선 민중의 삶을 담아낸 예술가이자 정조의 어명을 받아 청나라와 일본을 다녀온 세작이기도 했다. 다방면에 관심도 많았고 분야마다 학식도 깊었던 영민한 군주 정조와 단원 김홍도가 함께 이루어낸 역사적 성과를 살펴보자.
201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홍제전서는 정조의 글을 엮은 문집이다. 이곳에 정조의 단원 김홍도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김홍도는 그림솜씨가 뛰어나 그 이름을 안진 오래다. 30년쯤 내 초상화를 그린 이후 무릇 그림에 관한 모든 것은 김홍도를 시켜 주관하게 하였다.’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세밀화나 산수화에도 능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풍속화는 그의 취향보다 정조의 어명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단원의 그림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마치 족자에서 튀어나올 듯하며, 호랑이의 털은 너무나도 정교해 그의 뛰어난 회화적 기술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30여 명 정도의 화원으로 꾸려진 도화서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왕의 어진을 필두로 왕실의 각종 행사를 묘사하는 기록화를 비롯하여 왕가의 의복이나 가마 등의 문양, 필요한 경우 궁궐 벽의 벽화까지, 궁 안의 그림이 필요한 모든 곳을 붓으로 채웠다.
김홍도는 20대 초반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등용되었고, 영조의 어진을 그리는 어용화사로 뽑히며 승승장구하다 정조와의 오랜 인연을 시작한다.
정조는 1776년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과 길고도 지난한 패권다툼을 은밀하게 시작했다. 그 중심에 규장각이 있었다.
“김홍도는 내일부터는 도화서가 아닌 자비대령화원으로 짐의 곁에 더 가까이 머물도록 하라.”
정조는 도화서화원이 아닌 규장각 소속의 소수 화원을 따로 두었는데, 이들에게 시험문제도 직접 내며 특별관리 하였다. 출제 빈도가 높았던 과제이자 어명은 바로 백성들의 실제 모습을 담은 풍속화였다.
“과장시키지도 미화시키지도 말고 백성들의 진짜 사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 오도록 하라. 벼는 어찌 수확하는지, 시장의 모습은 어떠한지, 꽃놀이는 가는 풍경은 어떤지, 장터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과 광대놀이도 궁금하다. 백성들의 생활을 소상히 알고 그 들을 위한 정치를 하리라! 뭐 하느냐! 어서 서둘러 나가지 않고.”
단원은 정조의 어명 외에도 사가에서 주문받은 그림도 그려야 했기에 조금 피곤했을 수도 있으나, 오늘날까지 300점 가까운 그림이 전해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림이라는 것이 좀 쉬어가면서 영감을 받아 그려야 하는 것인데, 주상께서 저리 닦달하시니 바쁘다 바빠.”
영조실록에는 당시 그림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터럭하나라도 다르게 그린다면 이는 화원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불효 탓이다.’
사진이 없는 시대에서 그림은 사실성에 중점을 두어야 했다. 특히 존엄한 어진이나 근엄한 왕실 관련 그림은 얼마나 더 실물과 비슷하게 그리느냐고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백성을 그리는 일은 달랐다.
“주상전하께서 백성들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이리 그리는 것이 맞을 듯하군.”
백성들뿐만 아니라 정조 또한 단원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옳거니! 씨름을 구경하는 자들은 저리 둥글게 둘러앉아 보는구나. 그 사이에 먹을 것도 팔고, 그런데 팔을 뒤로 기대고 구경하는 자의 손은 왜 저러냐? 이는 잘못 그린 것이 아니더냐?”
“주상전하 실은.........”
정조는 김홍도에게 풍속화를 그리는 일 외에도 일본의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맡겼는데, 한국 역대 서화가에 관한 기록인 근역서화징에서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응환은 무신년 (1788)에 금강산을 그려왔고, 이듬해 일본에 몰래 가서 지도를 그리려 했으나, 부산에 이르러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김홍도가 홀로 대마도로 가서 지도를 그려 바쳤다.’
일본의 에도시대인 1786년,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1대 쇼군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경비를 핑계로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거절하였다.
“왜는 언제든지 우리를 다시 침략할 수 있는 족속이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동태를 소상히 살펴야 할 것이다.”
조선의 화원들은 강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백성들의 삶만 그린 것이 아니라 왕의 눈이 되어 외국의 동태도 보고하는 세작의 역할도 하였다.
김홍도는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 출장길에도 올라야 했다.
“이번에는 청나라다. 짐을 풀 새가 없구나.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고 돈도 벌고, 사대부도 평생 못 가는 청과 왜를 가보니 나는 복된 자로다.”
김홍도는 이번에는 청나라에 몰래 잠입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사신단에 포함되었다. 이는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성록은 영조 36년부터 약 150년간 조선 왕들의 언동을 날마다 기록한 책으로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김홍도와 이명기를 동지사행에 데려가야 하는데 마땅한 직책이 없습니다. 이에 김홍도를 군관자격으로 이명기를 추가정원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하니 윤허하셨다. <일성록 정조 13년, 1789년>
조선은 일 년에 네 차례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동지사행은 그중 하나로 동짓날 출발하여 두 달 정도 중국에 머물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사신단은 대부분 관리나 역관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인인 화원을 파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 듣자 하니 청나라는 서양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간 보지 못한 그림도 있다고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세히 보고 익히고 그려 오도록 하라.”
청나라의 서양문물은 주로 천주교를 통해서 수입되었는데, 물건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나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그림도 함께 스며들었다. 청나라에 도착한 김홍도는 서양미술 기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배워와 자신의 그림에도 적용하였다.
‘도화서에서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원근법)을 본뜬 것을 책거리 그림이라고 하였다. 김홍도가 특히 이 기법에 능했다.’ <일몽고>
일몽고는 영. 정조 때의 180여 명에 이르는 저명인사에 관한 글을 묶은 책이다.
“옳거니!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구나! 화원을 사신단으로 보낸 보람이 있구나. 참으로 고생하였다. 이제는 불화를 그릴 준비를 하도록 하라.”
“네? 불화라면 탱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어느 절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절이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용주사이다. 용주사의 일주문은 다른 절과 달리 삼문의 형태이고, 건물의 기둥도 궁궐에서나 사용하던 장대한 기둥으로 세워졌다. 대웅전에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가 넘는 통 비단에 기존의 불화와 완전히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손이나 얼굴모습이 기존의 불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법이었다.
“아바마마. 뒤주 안에서 얼마나 갑갑하셨습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두 분을 건드리지 못하게 제가 지키겠나이다.”
정조는 자신의 눈과 발이 되어준 김홍도에게 벼슬을 내렸다. 충북 괴산의 작은 산골마을 현감자리였지만 이는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정 6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김홍도는 발령 당시부터 대신들의 반발에 시달렸고, 임기를 마칠 쯤에는 큰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정조는 김홍도를 벌하지 않고, 한양으로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마지막 꿈을 완성시키기 위한 임무를 맡긴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림 솜씨가 녹슬지는 않았겠지? 이번에는 백성들의 사는 모습이 아니라 화성행차의 모습을 자네가 총괄하여 그려주게나.”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조는 본인의 즉위 20주년과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인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화성행차는 단순히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다. 정조는 화성이 자신의 이상향이 되기를 꿈꾸었다.
정조의 어명에 의해 의궤청이 세워지고,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기록화의 일대 획을 긋는 그림들이 김홍도의 지휘 하에 그려졌다. 화성원행 반차도에는 정조의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당대의 복식과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 잘 담겨 있다. 화성일대 풍경을 담은 화성성역의궤도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있다.
정조가 꿈꾸던 화성이 완전체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 년이 지난 1800년 6월, 본격적인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려던 정조는 많은 의문과 풀리지 않는 의혹을 남긴 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단원의 인생 또한 정조의 죽음과 궤를 같이하였다. 정조 사후 그는 세상을 담은 기록화도 백성의 표정을 잡아낸 풍속화도 아닌 세상너머의 그림을 그리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1998년 일본에서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도시대 화가이자,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에 의해 램브란트, 벨라스케스와 함께 세계 3대 인물화가라도 불리기도 한다.
샤라쿠는 에도시대인 1794년 단 십 개월 동안만 활동하며 백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일본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당대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통해 그의 그림이 고흐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기묘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그저 서민의 그림으로 저평가되던 그의 작품을 비롯한 풍속화인 우키요에가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만국 박람회에 도착했고, 도자기가 아닌 구겨진 포장지를 본 고흐의 친구 브라크몽에 의해 그의 그림이 유럽에 알려졌다.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이야기를 하다 에도시대 풍속화의 대가 샤라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또 하나의 샤라쿠>의 저자가 일본의 샤라쿠와 조선의 김홍도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김홍도의 일생을 참고하며 <또 하나의 샤라쿠>에서 펼치는 저자의 흥미로운 주장을 살펴보자.
18세기 일본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가부키 공연의 인기가 높았다. 가부키는 일본의 3대 전통극으로 화려한 옷과 독특한 분장을 한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서민들의 뮤지컬이었다. 2005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당시 배우들의 인기는 오늘날의 무비스타처럼 대단했다.
역사적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샤라쿠는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특히 샤라쿠가 그린 가부키 배우 오타니 오이지의 그림은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화이다. 그러나 샤라쿠의 그림은 평단은 물론이고 대중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했었다.
“아니! 이게 나란 말이오? 다른 이들은 있는 단점도 가려서 아름답게 그리는데,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렇게 비열하게 그린 것이오?”
“역정을 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이것은 당신의 초상화가 아닌 가부키에서 맡은 역할을 그린 것이오. 거기서 당신은 친구를 배신하는 비열한 역할을 맡았으니 내가 이리 그린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그리고 손은 왜 이 모양인 것이오? 이것은 사람의 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소?”
샤라쿠는 당대의 일본 화가들이 가부키 배우들을 그저 아름답게 그리는 것에서 탈피해 배역의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그렸다.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그는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예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샤라쿠>의 저자는 샤라쿠가 활동한 유일한 시기인 1794년에 주목한다.
샤라쿠가 일본 역사에서 일 년 만에 사라진 이유는 그가 조선의 단원 김홍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김홍도의 그림은 300점이 넘으며 말년에도 그림을 그린 김홍도가 1794년에만 조선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이때 정조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다녀갔다는 것이다. 1794년은 김홍도가 괴산의 산골마을인 연풍현감으로 재직하던 시기와 겹친다.
“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자네를 한적한 연풍현감으로 보내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다. 워낙 산골마을이니 적당한 시기를 틈타 왜에 가서 그들의 동태를 소상히 살피고 오너라. 모두의 눈을 피해야 하니 경비는 현지에서 그림을 그려 조달하도록 하라.”
정조가 김홍도를 대마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 파견하였다는 기록은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역사에 기록된 정조와 김홍도의 관계로 보아 소설가로서 상상해 볼 만 추론이다.
저자는 두 번째로 김홍도와 샤라쿠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류를 지적하였다.
왕의 어진은 화원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다. 김홍도는 어진을 세 차례나 그렸지만 주로 몸통이나 곤룡포를 맡았고, 손발을 그리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김홍도가 사람의 손발을 그리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작품 씨름에서 팔을 뒤로 뻗고 구경하는 사람의 손은 좌우가 바뀌었다. 또한 그가 남긴 유일한 불화의 인물은 발가락이 6개이다. 샤라쿠의 작품 중에도 발가락이 6개이거나 손가락 모양이 기괴한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랴쿠의 그림에는 도슈사의 사랴쿠라 (동주재 사락)라는 본인의 이름이 찍힌 낙관이 있는데, 한자어 동주재는 동쪽의 집이다. 조선의 기준으로 동쪽은 일본을 지칭하며, 한자어 사는 홍도의 다른 이름인 사능이고. 락은 현풍현감으로 근무하던 곳의 풍락헌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조선의 동쪽에서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니 참으로 즐겁구나!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라는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나 뛰어난 천재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따른다. 이런 추론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려면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므로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 않을까? 이미 일어났고 결과를 바꿀 수도 없는 과거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