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법령집인 대전회통에는 궁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궁녀란 궁중여관의 별칭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을 말한다.’
즉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라는 뜻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궁에서 일하는 환관과 궁녀의 수를 각각 335명, 684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종 실록에는 대전과 중궁전, 대비 전에서 일하는 궁녀의 수가 각 백 명 세자궁 육십 명, 세자 빈궁 40명, 세손궁과 세손 빈궁 각 50명과 3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궁녀의 숫자는 시기마다 달랐겠지만, 조선 시대 궁녀의 수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보다 규모가 작았던 백제의 삼천 궁녀는 전설에 가까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평생을 왕의 잠재적 여자로 살아야 했으며, 죽거나 혹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궁을 나올 수 있었던 한 많은 전문직 궁녀. 시대의 비운에 울었지만 궁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다양한 인생사가 그들에게도 펼쳐졌었다. 이제 베일에 가려져있던 궁녀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시대 궁녀는 십 년에 한 번씩 뽑는다고 하지만 왕과 왕비 또는 세자궁 등의 각 처소에서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충원하였다. 주로 공노비 중에서 선출되었으나, 생활이 곤궁해진 양인 중에서 궁녀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상궁 친척이나 인맥에 의해 열 살 전후의 소녀들이 일차적으로 선발되었다.
“엄마! 나는 궁에 가서 살기 싫어요!”
“이것아! 답답한 소리 좀 하지 말거라. 궁에 가면 이제 굶을 일도 없고 비단옷도 입을 수 있어. 집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고, 상궁나리께서 시키는 대로 잘 보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남은 우리도 다 살아! 이 어미는 그저 너만 믿는다. 우리 아가! 미안하다!”
조선에서 가장 엄격하고 비밀스러운 곳인 궁에서 일해야 할 인력을 나이만 보고 데려가진 않았다. 이 소녀들은 첫째 부인의 딸이어야 했으며, 집안에 역적은 물론이고 중죄인이 없어야 했고, 조상이나 근친 중에 역질을 앓은 사람이 있었어도 서류전형에서 탈락이었다.
궁에 들어왔다고 모두 궁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턴 과정인 생각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테스트인 앵무새 피 처녀 감별법을 통과해야 했다.
궁녀는 잠재적으로 왕의 승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열 살 전후의 나이라도 처녀만이 궁녀로 입궁이 가능했는데, 도대체 이를 어떻게 알아냈다 말인가?
먼저 아이가 자신의 한쪽 팔을 걷어붙인다. 그러면 의녀가 앵무새의 피를 아이의 팔에 떨어트린다. 앵무새의 피가 흘러내리지 않으면 통과이고, 흘러내리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나 비과학적인 이 앵무새 피 테스트는 혹시 심리테스트가 아니었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궁에 들어온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지만 직감적으로 테스트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은 가중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이 들통 날 것이 두려운 아이들은 팔을 심하게 떨었기 때문에 피가 떨어진 것이 아닐까? 어쩌면 맨 정신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궁 생활의 적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담력 테스트가 아니었을까?
이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을 생각시라고 부르는데, 선배 궁녀들에게서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본격적인 궁 생활이 시작된다. 중국의 궁녀들이 글도 몰랐던 것과 달리 조선의 궁녀들은 한글은 물론이고 한문과 삼강행실도까지 익힌 전문직이었다.
“애야! 넌 집에 가고 싶지 않니?”
“너 한가한가 보구나! 난 배울 게 너무 많아서 엄마 생각도 안 난다.”
다음은 평생을 보내게 될 부서 배치의 시간이다. 도열해 있는 생각시들 앞에 각 부서의 나인과 상궁들이 직접 나온다.
“어디 손을 좀 보자꾸나. 너는 손이 거친 것이 빨래를 잘하겠구나. 세수간으로 가거라.”
“너는 손이 작아도 야무져 보이니 바느질을 잘하겠구나. 침방으로 가거라.”
마지막으로 상궁들의 여왕 제조상궁이 지밀나인으로 키울 생각시를 데려갔다. 왕과 왕비의 최측근을 지키는 부서인 지밀은 핵심 부서였다. 그래서 다른 생각시보다 더 어리고 똑똑한 아이들을 뽑아 완전무결한 궁녀로 만들기 위한 혹독한 교육절차에 돌입한다.
조선 왕실의 성인들은 한데 모여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독립세대로 살았다. 그래서 왕이 머무는 대전, 중전이 머무는 중궁전, 대비와 세자가 머무는 대비전과 동궁전 별로 궁녀들을 따로 뽑아 관리하였다.
총책임자인 제조상궁을 위시하여 왕의 어명을 받드는 대령상궁, 한문 교서를 한글로 바꾸는 등의 업무를 하는 시녀상궁, 양육을 담당하는 보모상궁 아래로 업무가 세분화되어 궁녀들이 궁 구석구석의 일을 나누어 맡아 처리했다.
보모상궁은 어린 왕자나 공주를 양육하는 일을 하였는데, 고된 일이지만 인생 역전의 가능성이 지밀상궁보다 높았다. 모시고 있는 왕자가 왕이 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집안 모두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부를 얻을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키운 궁녀에게 성인이 된 왕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이모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엄 상궁! 그간 고생했네. 내 이제 왕이 되었으니 자네 고생도 끝이네.”
이 외에도 옷과 이불을 제작하는 침방, 세탁을 담당하던 세수간, 매끼 수라와 잔치 음식을 준비하던 장금이가 일하던 소주방, 하루 종일 식혜 등의 음료와 간식을 만들던 생과방 등이 있었다.
궁녀들은 궁 안에서 들은 것은 들은 곳에 두고, 본 것은 본 곳에 두고 와야 했다. 궁녀의 첫 번째 덕목이자 규율인 말조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왕실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지엄한 존재로 남아야 했다. 로열패밀리들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궁녀들이 그 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해 말을 옮기고 다니다 보면 왕실의 존엄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시를 대상으로 한 독특한 신고식도 말조심에 관한 것이었다. 어두운 밤, 궁의 은밀한 곳에 영문도 모른 채 생각시들이 모였다.
“혹시 무슨 일인지 들었니?”
“몰라! 우리 나인 언니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언질도 안 주는 것이 너무 무서워!”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내시들이 나타나 생각시들의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며 ‘지부리 글려’라고 고압적으로 외쳤다. 이는 궁에 막 들어온 이들에게 붙은 잡귀를 몰아내는 주술적 의미를 겸한 것이었는데, 어린 소녀들에게 말에 대한 공포심과 경각심을 동시에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생각시는 십 년이 지나면 계례식을 올렸다. 이는 성인식과 혼례식을 겸한 것이지만 신랑과 하객은 물론이고 가족도 참석하지 않는 슬픈 결혼식이었다. 대신 이들을 직접 가르친 상궁이 옷도 손수 해 입히고, 비녀를 꽂아주며 친정어머니의 역할을 하였다.
“그간 내 밑에서 일 배우느라 고생 많았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궁에서 죽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 혹독하게 가르쳤다. 이제 오늘부터 너는 생각시가 아니라 나인이다. 진짜 궁녀가 된 것이야. 이리 와 보거라. 한 번 안아보자. 참으로 어여쁘구나.”
“상궁님 덕분에 제가 나인이 되었사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안이 되면 다른 부서의 나인과 한 방을 쓰게 되는데 두 사람은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을 한 방에서 보내게 된다.
“엄 나인! 너랑 한 방을 쓰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야! 잘 지내보자꾸나.”
“엄 나인? 내가 나인이 되다니. 꿈만 같지 머야! 천 나인! 반가워! 나인이란 소리는 지겹지도 않고 이리 정겨운 줄 미처 몰랐네.”
상궁이 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십오 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들은 나인이 된 날의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것이다.
궁녀들의 근무시간은 부서나 처소마다 달랐는데, 여가시간이 의외로 많아 바느질과 글씨연습을 하기도 했다. 궁녀들의 서체가 따로 있었는데 이는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창나이 소녀들에게 궁 안에서의 생활은 감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밀나인들은 다른 나인들에 비해 오 년 정도 빨리 상궁이 되기도 했지만 업무 강도도 높았다. 왕이나 왕비의 침전을 삼교대로 지켰으며, 숙직을 할 경우 하루의 휴식이 주어졌다. 지밀상궁이나 나인들의 숙직명부조차 극비로 다루었다고 하니, 업무 도중 스트레스 또한 상당했을 것이다.
“천 나인! 나는 지밀 애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더라. 몸이 편하면 뭐 하니. 마음이 편해야지. 허구한 날 바짝 긴장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5년 빨리 출세하려다가 십 년 먼저 죽는 수가 있어. 난 잠이나 자련다.”
“엄 나인!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자네는 어차피 지밀에 뽑히지도 못하지 않았나. 뭐야? 벌써 그새 잠든 것이야?”
실록에는 궁녀들에게 매달 지급된 월급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인의 경우 첫 월급으로 쌀 4말, 북어 13마리, 콩 한말 등을 받았으며, 상궁의 경우 나인보다 3-4배 더 많았다. 현대의 화폐가치로 정확한 환산은 어려우나 공노비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공노비는 물론이고 양인들마저도 딸을 궁녀로 보내기를 원했다. 인조부터 무려 세 명의 왕을 모시며 이재에도 밝았던 상궁 박 씨는 개인 저택과 논밭은 물론이며 노비까지 부렸다고 한다.
궁녀들은 집안에 긴급한 일이 생기거나 녹봉을 받으면 드물게 외출이 허락되었는데, 먼저 직속 상궁에게 허락을 받고, 다음에는 담당 환관에게 또 허락을 받아야 하는 까다롭고 치사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엄 나인! 정녕 아니 나갈 것이야? 우리가 언제 또 궁 밖 바람을 쐴 수 있을지 몰라.”
“난 그냥 잠이나 자련다. 우리 상궁 성깔 알자나. 무슨 연유를 그리 꼬치꼬치 물어보는지. 또 조심해야 할 것은 또 왜 그리 많고. 그 잔소리 듣고 있다 보면 반나절이야. 거기다 조 환관 그 인간의 능글맞은 눈빛까지. 어휴. 내 그냥 안 나가고 말지. 네가 나가는 길에 우리 집에도 들러서 안부나 좀 전해주렴.”
우리의 엄 나인처럼 외출은 물론이고 상궁으로의 승진도 관심이 없는 궁녀도 있지만, 야망으로 가득 찬 나인들도 있었다. 그 들은 정1품 제조상궁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왕의 옆을 지키는 환관에게도 줄을 대었다. 당상관 이상의 관리보다 녹봉도 많고 수발을 드는 하녀와 옷을 만드는 나인까지 두었던 제조상궁은 궁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자리였다. 그래서 나인들뿐만 아니라 관리들까지 제조상궁이나 영향력 있는 환관과 가깝게 지내려 했다. 심지어 그들과 의형제나 의남매를 맺기도 했다고 하니 상상만으로 재미있다.
“아이고! 우리 동생! 어찌 이리 얼굴 보기 힘든가! 내 그동안 너무 적적했네. 혹여 필요한 것은 없는가?”
“좌상대감 덕분에 별일은 없사오나. 다만…….”
“대감은 무슨 대감. 그냥 편하게 오라비라고 부르라니까. 다만? 다만 무엇이 필요한가? 어서 말해보게.”
"우선 이 손을 좀 치우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
"이런! 미안하네 그려. 이게 버릇이 돼 나서."
청와대 내에는 일곱 명의 위패를 모신 칠궁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있다. 이곳에는 왕비가 되지 못하여 종묘로 가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된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사도세자의 생모와 장희빈 등이 있는데, 순조의 생모를 제외한 여섯 명이 궁녀출신이다. 특히 영조의 어머니는 상궁도 나인도 아닌 물을 기르던 궁녀 중에서도 최 하위직인 무수리였다.
무수리에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아들이 왕까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왕과의 동침 즉 승은이다. 승은을 입고 정 4품에 해당되는 특별상궁이 되면 그간 해 왔던 모든 일에서 면제될 뿐만 아니라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현실에서 구현된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로또보다 낮은 확률로 그 수가 워낙 적기에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나머지 대다수 궁녀들은 삶의 터전이 그저 궁인 생활인으로서 고된 하루를 이어가야 했다.
종족번식의 목적 외에도 사랑을 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며 이는 타고난 인간의 본능이다. 평소 코빼기도 볼 수 없는 왕을 제외한 이성과 교제할 수도 없고, 숨 막히는 법도로 가득한 궁에서 동성애가 피어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궁녀 간의 동성애를 비롯한 궁내에서의 금지된 사랑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연산군 10년,
선왕조의 교붕(동성애)의 풍속을 개혁하고자 했는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범하는 자가 많다.
정조실록
궁인과 환시가 이런 죄를 저질러도 한결같이 덮어두었기에 대궐에서 해산하기도 하고, 장번 중관이 방자하게 침실의 가까운 곳에서 교간하기도 한다.
명나라 말기에는 동성애를 어쩔 수 없는 일로 판단하여, 처벌하지 않거나 못 본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궁녀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감찰 상궁이 있었으나, 수백 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어찌 일일이 다 억누를 수 있었겠나. 그럼에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궁녀들의 쌓인 한을 풀어줄 대책이 필요했다.
출궁! 조선시대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면 왕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만, 궁녀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숙종과 영조 대에 출궁 시킨 기록이 있다. 또한 궁 안에서 궁녀가 벼락을 맞고 죽었을 때도 40명을 출궁 시켰고, 우물에 몸을 던지는 궁녀가 나왔을 때도 수십 명을 출궁 시켰다. 그러나 궁 밖으로 나가서도 궁녀들은 경국대전에 명시된 법에 따라 다른 남자와 혼인도 할 수 없었다.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
영조 대에 편찬된 법령집인 속대전에도 궁녀들의 사생활을 엄격히 막는 법령이 있다.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궁 안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출궁 후에는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어야 했다. 궁녀는 환관처럼 거세도 당하지 못한 채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며 오직 왕실을 위해 살아야만 했다.
왕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궁 안에서 죽을 수 없었다. 이는 조선왕실의 법도였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들어 쓸모가 다해진, 죽음을 앞둔 궁녀들은 강제로 출궁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왕래하는 문이 아닌 환자나 급사한 사람이 나가는 문인 요금문을 통해서,
비로써 궁을 떠나는 나이 든 상궁들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궁녀들이 짬을 내어 나온다.
"어머니! 이리 가시면 억울해서 어쩝니까! 앞으로 어찌 살아간단 말입니까!"
"아이고! 불쌍한 우리 상궁 어른! 시집도 한 번 못 가고 궁에서 죽어라 고생만 하다 이리 쫓겨나네. 불쌍해서 어쩌누."
나인과 젊은 상궁들은 명백한 자신의 미래를 보며 눈물을 흘렸으며, 출궁 당하는 늙은 상궁은 흐릿해진 자신의 과거인 나인과 생각시를 보며 또한 눈물 흘렸을 것이다.
"아가! 이리 와 보거라. 너는 조금 덤벙되는 것이 흠이지만, 네 나이 때는 누구나 그런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옳지! 너도 있었지. 너는 어린데도 맡기는 일을 야무지게 하는 것을 보니 좋은 상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딴마음 먹지 말고 그저 팔자려니 하고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후손도 없고 부모님도 이미 다 돌아가신 나이 든 궁녀들은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시주를 하며 사그라져 가는 자신의 육신을 부처님께 의탁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도 명망 높은 스님과 같은 장례절차를 따랐다면 여느 스님 못지않은 사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녀들은 삼년상을 치르고 궁을 떠나야 했다. 재위기간이 무려 46년에 달했던 숙종의 삼년상이 끝나자 궁을 떠난 많은 궁녀들이 한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오늘날 은평구 인근의 궁말이라 불리던 곳은 숙종 이후 오랫동안 궁을 떠나는 궁녀들의 안식처가 되어 조선 말기까지 20~30 가구가 유지되었다.
이제 이 글의 주인공 엄 상궁과도 헤어질 시간이다.
“여보게 엄 상궁! 어디 지낼 거처는 마련했나?”
“나는 궁에서 가까운 봉은사에 가볼까 하네. 자네는 궁말로 들어간다지?”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세. 궁에서 새는 바가지 절에서는 안 새겠나.”
“예끼! 이 사람! 자네 말은 고맙네만. 내가 보기랑 달리 불교에 관심이 많았네. 그리고 사십 년 넘게 함께 살았는데 자네는 내가 지겹지도 않나? 내 종종 들릴 것이니 그때 못 본 척이나 하지 말게. 참! 그동안 쑥스러워 말은 못 했는데 늘 덤벙되고 잠 많은 나를 챙겨줘서 참으로 고마웠네. 다음 생애에도 내 동무가 되어주게.”
절절함의 측면에서 두보나 이태백의 시에 뒤지지 않는 궁녀의 시가 있어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앞 못에 들어있는 물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넣었느냐!
북쪽 바다나 맑은 연못 어디 두고 이 연못에 들어 있느냐
한 번 들어가 못 나오는 심정은 너와 내가 다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