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신분과 직업별로 나뉘어 살았다. 청계천의 북쪽에는 고위관료들이 주로 살았는데 북촌이라고 불렸고, 남촌에는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 청계천 주변인 중촌에는 의원을 비롯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 중 최고의 부를 이룬 직업군은 단연 역관이었다. 역관 중에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 당대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떨친 이도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일면식도 없던 허생원에게 선뜻 거금을 빌려주는 변부자는 당시 한양 최고의 부자였던 변승응과 그의 아들 변승업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정재륜이 효종, 현종, 숙종, 경종 4대에 걸쳐 궁중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엮은 ‘공사견문록’ 이란 책에는 당대 최고의 부자에 이르렀다는 역관 김근배, 고가부 등의 실명이 등장한다. 이 외에도 역관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숙종 때 한 부자 역관의 아내가 죽었다.
“아이고. 부인! 평생 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하다 이리 가는 구려. 내 저승 가는 길이라도 호화스럽게 보내주겠소.”
부자 역관은 부인의 관에 옻칠을 할 것을 명령했다.
“아니. 나리! 그것은 사대부도 하지 못하는 일이고, 오직 궁에서만 허락된 것인데 어찌.”
그랬다. 관에 옻칠을 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오직 왕가에만 허락된 일이었던 것이다. 장례가 끝나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사대부들이 들고일어나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상전하! 나라의 법도를 어긴 저자를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하옵니다.”
이러다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다 산 사람의 장례를 치르게 될 판이었다. 이때 역관 부자는 긴급 조치를 내렸고, 사대부들은 과연 그의 말대로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나리! 큰일이옵니다. 지금 사대부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래? 고매한 양반들께서 내 돈이 필요하셨나 보구나. 옛다! 여기 십만 냥이다. 그 자들의 집에 찾아가서 직접 전하거라. 당장 내일부터 상소는 물론이고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역관은 어떻게 해서 막대한 부를 이루었던 것일까?
부는 물론이고 조선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역관 홍순언이 있다. 한 편의 로드무비 같은 그의 인생을 통해 역관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홍순언은 역관이 되기 위해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아버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옵니까? 중국말은 너무나 어렵사옵니다.”
“어허.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겠느냐? 지금 서둘러 배워두지 않으면 사역원에 입교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역관이 되려면 역과를 통과해야 하는데, 역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인 사역원에 입학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역관은 되기가 어렵지만 되기만 하면 막대한 부가 따랐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였다. 사역원에 입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역관의 추천을 받는 것이었다. 15명의 입교 심사위원 중 13명의 찬성표를 받아야 하는데, 친가는 물론이고 처가의 관직 상황까지 면밀히 살피었다. 이 추천도 3회에 한하여 받을 수 있었다.
자! 어렵게 사역원에 입교를 하였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역과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소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홍순언을 비롯한 역관 후보생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역시 외국어 공부였다.
“아! 지친다. 지쳐. 내 청춘이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외국어 과목은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 위구르어 등이 있었다. 외국어 회화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우리의 외국어 주입식 조기 교육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어 교재는 노걸대, 일본어 교재는 일본에 십 년간 머물다 온 역관이 편찬한 첩해신어가 있었는데, 사역원의 외국어 교재는 모두 실용 회화 위주였다. 숨 막히는 학사일정을 견디고 역과에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외교 지침서라 할 수 있는 통문관지에는 역관의 활약상이 따로 나올 정도이다. 장희빈의 오촌당숙인 역관 장현은 역과에 수석 합격하여 소현세자와 심양에서 6년간 머물렀다. 또한 무려 40년 동안 30차례나 청나라를 오간 대표적인 외교통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또한 역관이었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 부자의 실제 모델인 변승업의 집안은 280여 년간 106명이 역과에 합격하였다.
“이 할아비 말을 잘 듣거라. 역관만 되면 양반처럼 아니 변변찮은 사대부보다 훨씬 명예롭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그러나 외국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외국어 시험을 또 통과해야 했으니, 역관들은 평생 외국어 공부로 고통받았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관의 첫 번째 주요 업무는 외교 업무이다.
이제 조선의 외교와 역관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자. 역과에 합격한 우리의 주인공 홍순언은 처음으로 떠나는 사행길에 몹시 들떠 있다.
“아버님! 잠이 오질 않습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길을 떠납니다.”
조선의 외교는 중국에 대한 사대, 일본과는 교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행도폭은 인조의 왕권을 허락받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단 행렬을 그린 그림이고, 조선통신사 행렬도는 조선이 왜와 교린을 위해 떠나는 사신단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단의 규모는 정사, 부사, 역관이 30~40명이었고, 마부와 짐꾼까지 합치면 2백 명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0명 내외의 역관이 사신단을 이끄는 실질적인 업무를 처리했다. 고매하신 관리 나리들은 외국어도 할 줄 몰랐고, 정파의 이익에 따라 사신단에 계속해서 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출발하여 의주와 심양, 북경에 이르는 2천 리가 넘는 길은 5개월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조정에서는 사신단에게 쌀과 포, 종이 등을 경비로 지급하였다. 개인에게 지급되는 돈은 일절 없었다. 대신 조정에서는 역관에게 사무역권을 주었다. 역관들은 바로 여기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부를 이루게 해 준 메인 아이템은 일본과 중국에서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추앙받던 우리의 인삼이었다.
“어이! 홍순언. 인삼은 잘 챙겼나? 초행길이니 너무 욕심부리지 마시게.”
"욕심은 고사하고, 노걸대에 배운 내용대로 흥정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역원의 중국어교재인 노걸대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을 비롯하여 음식을 주문하거나 여관을 잡는 방법 등의 실용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나저나, 명나라는 물론이고 왜인들도 환장한다는 인삼은 왜 한 사람당 딱 팔포 밖에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까?"
"어허! 이 사람 입 조심하게. 조정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는 일이네. 그나저나 엄살을 부리더니 아주 한몫 단단히 잡을 작정이구만."
조선 조정에서는 인삼의 외국 반출 수량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인삼 10근을 묶어 한 포로 만들었고, 한 사람당 8포의 인삼만 허용하였다. 그래서 역관들의 인삼무역을 팔포무역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인삼 80근이면 은 2천 냥, 쌀은 2천 석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역관들은 외교관으로의 역할은 물론이고, 무역상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역관들은 중국에 사신단으로 방문하여 인삼을 판돈으로 비단, 문방사우, 가죽 등을 수입해 와 조선의 상인들에게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넘겼다. 그러나 역관들이 더 큰 부를 남긴 것은 중계무역이었다.
허생전에 나온 변부자는 홍순언보다 후대의 역관으로 청나라가 들어서며 왜 와의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이루게 되었는데, 청과 왜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변부자는 홍순언과 달리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하였다. 변부자의 아버지 또한 역관이었기에 국제정세의 흐름을 빨리 알아차렸다.
"아들아! 앞으로 왜의 말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내 이번에 청나라를 다녀오고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아챘다."
17세기 후반, 청나라는 일본과의 교역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을 통해서만 청과의 교역이 가능해졌다. 조선의 역관들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은이나 물건을 곱절 이상의 차익을 남기고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넘겼던 것이다. 중국의 비단도 인기였지만 역시 최고의 인기품목은 인삼이었다.
"변 역관. 궁금해서 여쭙는 것인데, 인삼은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가격이 이리 폭등하였습니까?"
"어허. 우리 조선 조정에서 인삼의 판매 수량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을 모르시오? 인삼은 늘 귀하고 비싼 것이며, 그쪽 말고도 찾는 왜인들은 많으니 불만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만 하시오."
"아니. 그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오. 내 그냥 순수한 호기심 차원에서 여쭤 본 것이오. 여기 한 잔 받으시고 다음에도 잘 부탁하오."
일본 내에서 인삼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당시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달러도 금도 아닌 은이었다. 일본은 오직 인삼 거래를 위해 인삼대왕고은이라는 인삼전용 은 화폐까지 발행하였다. 일본에서 인삼이 만병통치약의 명성을 넘어 신앙처럼 받들어지자 초량 왜관에는 돈이 넘쳐났다. 팔포무역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숙종 때 초량 왜관 출입구에 세워진 '약조 제찰비' 의 경고문을 통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장이 서는 날에 방에 몰래 들어가서 물건을 사고파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임금의 왕명도 돈 앞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 내에서 조선의 인삼의 인기가 식지 않는 이상 밀무역은 더 성행하게 되었다.
"형님! 참으로 답답하옵니다. 우리가 어렵게 왜의 말을 배워서 인삼을 잘 팔아 조정의 살림에 크나큰 보탬이 되는데 어찌하여 이를 막는단 말입니까? 이게 우리만 잘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먼저 입 조심부터 하고, 돈 자랑은 더더욱 하지 마시게. 그리고 이 돈부터 아전들에게 은밀히 전하게."
역관들은 일본과의 밀무역을 위해서 왜관문을 지키는 병사는 물론이고 아전들과 관리까지 매수하여 인삼카르텔을 형성하였다. 대마도에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에휴! 옷이 이게 참. 배 멀미 해가며 뼈 빠지게 들락거려 봐야 이거 원 남는 것도 없고, 옷 하나 살 돈도 없으니. 아이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인삼의 밀무역은 일본에서 더욱 큰 문제였다. 조선의 인삼을 사기 위해 반출되는 은의 양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쇼군! 인삼을 사려다 우리가 보유한 은이 다 바닥날 지경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방법은 하나다. 조선의 생근을 가져와서 우리도 인삼을 자체 생산해야 한다."
"하오나. 조선 조정에서 생근을 워낙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서...."
"내 묘책이 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일본의 쇼군이 조선의 생근을 훔쳐오기 위해 내린 비책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은 인삼 밀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이룬 조선의 역관을 일본 현지에서 체포하였다. 그리고 실행한 첫 번째 묘책은 협박이었다.
"네 이놈. 조선 조정에서 인삼 밀무역은 엄벌로 처하고 있거늘. 네 놈을 조선 조정에 넘겨 극형을 받도록 하겠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분명히 인삼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내 목숨을 걸고 이리 가져왔는데,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
"네 놈이 목숨도 구하고, 인삼을 판 돈 보다 더 큰돈을 벌 기회기 있는데 따르겠느냐?"
"목숨도 구하고 돈도 된다면야..... 일단 들어나 봅시다"
일본이 조선에서 인삼을 수입해 간 실태를 기록한 문서인 <인삼시종 각서>에는 조선의 생근이 유출되는 경로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생근을 채취한 곳의 흙으로 덮고, 건조를 막기 위해 대마도의 이끼로 이를 덮었다.’
조선의 생근은 이렇게 유출되었으나, 일본이 인삼 재배와 대량생산에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역관이 부를 이루는 과정을 설명하다 보니 어두운 면도 부각되었는데, 다음 글에는 사대부도 이루지 못한 외교적 성과를 이룩한 역관 홍순언의 흥미진진한 로드무비를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