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완 Apr 15. 2024

200년 외교난제 종계변무

 역관 홍순언에 관한 기록은 선조실록, 성호사설, 서포만필, 대동기문, 연려실기술등 수많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한 획을 제대로 그은 인물이다. 조선시대 외국과의 외교관계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에 홍순언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홍순언은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의기가 있었다. 일찍이 명나라 연경에 갔다 통주에 이르러, 밤에 기생집에 놀러 가서.........’

 "조선 땅을 떠난 지 벌써 몇 달이구나. 오늘은 술 한잔 거하게 해야겠구나. 그동안 통주 물은 어떻게 변했나? “

 과연 이 지나치게 호방한 중인신분의 역관이 200년 넘게 해결하지 못한 조선의 외교 난제인 종계변무를 해결하고, 임진왜란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명나라 대군을 어떻게 움직이게 했을까?

 조선에서 사신단이 온다고 하면 청나라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술집에서도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특히 인삼을 판 목돈을 허리에 차고 있는 역관은 큰 손님이었다. 역관들은 대신들과 달리 초행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골술집도 있었다.

 “아이고! 홍 역관 나리! 이게 얼마만이요. 잘 지내셨소? 어서 저 방으로 드시오. 역시 우리 홍 나리는 운이 좋으시다니까!”

 “또 얼마나 바가지를 씌우려고, 초장부터 호들갑인가! 내 오늘은 그저 조용히 혼자 술만 마시고 갈 것이니 그리 알게.”

 “지금껏 나리가 보지 못한 명나라 최고의 미인을 오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술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홍순언의 눈길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나, 홍순언은 관심 없는 척하며 술상을 먼저 받았다. 잠시 후, 홍순언이 눈여겨보았던 그 여인이 홍순언의 자리로 왔다.

 ‘과연! 절세미인이로구나! 한데 어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구나.’

홍순언은 여인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어딘가 안쓰러운 느낌을 받았다.

 “여기 한 잔 받으시고, 자네가 가슴에 품고 있는 사연을 마음 편히 말해보시게.”

 “나리. 어찌 아셨습니까? 저는 본디 절강 사람인데, 벼슬을 받은 부모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두 분 다 억울한 일에 휘말려 며칠 전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다른 일가친척은 없소? 그리고 귀한 집 여식인데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오?”

 “저는 친척하나 없는 외동딸입니다. 돈을 벌어 부모님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곳에서 오늘부터 일을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홍순언은 이 대목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호방한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낭자! 여기 내가 가진 돈 전부요. 이 돈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가고도 남을 돈이니,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시오.”

홍순언은 가지고 있던 돈 삼백금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삼백금이라면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억대의 돈이었다. 이것은 호방함인가? 무모함인가?

 “나리! 염치없지만, 이 은혜는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다만 나리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옵소서.”

 “사대부도 아닌 중인 역관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겠소. 난 그냥 홍가요. 홍가. 부디 그 돈으로 행복하게 잘 사시오. 난 이만 가오.”

 홍순언 자신조차 훗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녀와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태조 3년이 되는 1394년, 조선의 관리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 정덕본’에서 심각한 기록의 오류를 발견한다. 당시 그의 심정이 태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떨리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죽기를 무릎 쓰고 알리었다.”

 관리가 발견하여 태조 이성계에게 고한 것은 명나라에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자춘이었으나, 대명회전에서는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태조 이성계는 대로하였다.

 “무엇이라! 내가 이자임의 아들이라니! 어서 당장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이자임은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새 왕조에게 치욕적인 일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단을 파견하여 기록의 수정을 주청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데?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오? 아버지 이름이 틀릴 수도 있지.”

 “뭐라 하셨소! 조선 왕실의 가계도를 잘못 기록하고 어찌 이리 뻔뻔할 수 있단 말이오.”

 “어허!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요. 이것을 수정하려면 우리 명나라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야 하나. 그러나 우리 황제께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니 좀 기다려보시오.”

 그렇게 종계변무가 해결되지 않은 채 이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역관 홍순언의 목을 겨냥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584년, 홍순언은 수석 역관이 되어 북경 사행길에 오른다. 이번 사신단의 목적은 단 하나 종계변무를 해결하는 것이다. 당시의 엄중한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시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리라.’

십 년 전인 1574년에도 명나라가 대명회전을 새로 편찬한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히 사신을 파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십 년의 시간이 지나 이미 편찬된 기록을 수정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홍순언으로서는 억울하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아! 조정에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구나. 잘난 사대부도 하지 못한 일을 중인인 내가 어찌 한 단 말인가! 미치고 환장하겠구나.”

 조선을 떠나 몇 달 후, 홍순언은 마침내 북경의 동악묘에 당도하였다. 이곳은 원 나라 때 세워진 도교사원이지만, 조선의 사신들이 반드시 들러 제례를 올리는 곳이었다. 홍순언은 사력을 다해 제를 올렸고, 불안한 마음에 술집도 들리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하늘이시여! 제발! 종계변무인지 나발인지 좀 해결되게 도와주십시오.’

 다음 날, 홍순언은 명나라 예부의 최고 직위인 예부시랑의 호출을 받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예부시랑은 오늘날 외무차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며, 조선의 사신단은 일반적으로 예부의 산하 관청인 주객청리사의 말단 관리인 통사판관이 맞이하였다. 그런데 예부시랑이 중인인 역관을 찾는다고 하니 홍순언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신단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홍순언은 영문도 모른 채 예부시랑이 머무는 방으로 안내되었고,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홍 대인, 이쪽으로 편히 앉으시오. 이번에도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수석 통역관의 목이 달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그 문제는 마침 예부의 소관이니 내가 잘 해결해 주겠소. 그러니 대인은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아니!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나리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홍대인이 내 부인을 구해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은인이구려. 대인은 십 년 전 통주의 술집에서 만났던 불쌍한 여인을 기억하오? “

 그랬다. 홍순언이 준 돈으로 부모의 장례를 잘 치른 그 여인이 명나라 예부시랑의 부인이 된 것이다. 명나라 예부시랑인 석랑의 부인은 홍순언의 호의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은 것이다. 

 드디어 대명회전 만력본에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정정 기록되며 조선 건국 이래 최고의 외교 난제 종계변무가 역관 홍순언에 의해 해결되었다.

광국지경록의 기록에 따르면 선조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 “

선조는 종계변무를 해결한 사신단 중 19명을 칭송하였는데, 홍순언은 정철, 유승룡 보다 높은 순서인 두 번째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중인이 오를 수 없는 지위인 우림위장 (종 2품)에 봉해졌다. 관직을 하사한 것만 해도 사대부의 반발이 대단하였는데, 선조는 한 술 더 떠 홍순언에게 당릉군이라는 군호까지 하사하며 신하로써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하사했다. 선조의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 말은 과장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홍순언은 관직뿐만 아니라 노비와 땅까지 하사 받았다. 선조가 홍순언에게 준 땅은 오늘날 을지로 1가 사거리 인근으로, 당대 사람들은 이곳을 보은단동, 보은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유인 즉 예부시랑의 부인이 홍순언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열개의 선물함을 보냈다. 안에는 직접 짠 비단이 들어있었는데, 비단마다 ‘보은’이라는 두 글자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이에 감격한 홍순언은 왕에게 하사 받은 땅에 집을 짓고, 자신의 집 담벼락에 ‘보은’ 이 새겨진 비단을 걸어 놓았던 것이다.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역사에 재등장한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이다. 조선은 전쟁 초반부터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몽진했고, 이는 왜란 전부터 요동지방에 돌던 소문을 입증해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발발 전 세작을 동원하여 조선과 왜가 함께 명나라를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 작전은 완벽히 성공했다. 홍순언이 왜란 전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의 사신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홍대인! 소문이 사실이오? 조선과 왜가 손을 잡고 우리 명을 친다는 것이!”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소문의 실체를 모른 채, 서신으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소문은 이미 명 조정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명나라의 답신은 완고했다.

 “우리 황제폐하께서는 귀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요동지방에서는 이미 귀국과 왜가 손을 잡아 우리 명나라를 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귀국의 왕이 의주로 이리 빨리 몽진을 한 것을 보니 더욱 의심스럽다.”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의 파병을 찬성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병부상서 석성이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예부시랑의 자리에서 조선의 종계변무를 해결해 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홍순언에게 서둘러 사신을 보내라는 서찰을 보냈고,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 홍순언을 포함한 사신단을 긴급히 명나라로 보냈던 것이다. 명나라는 고심 끝에 조선에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홍순언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통역을 맡으며 전선에서 맹활약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에 역관 홍순언의 파란만장했던 로드무비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홍순언이 사망한 이듬해인 1599년 홍순언의 보은을 잊지 않고 조선을 여러 차례 도운 석상은 조선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군사적 피해의 책임을 지고 투옥되어 옥사하고 만다. 그는 옥중에서 남은 가족에게 놀라운 유언을 남긴다.

 “아들아. 어머니를 모시고 조선으로 가거라.”

 석 씨 집안과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다시 이어졌고, 이들은 선조가 하사한 해주 땅에 안착하며 해주 석 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전 19화 조선 최고 부자의 직업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