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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by 안녕

영상을 찍고 있다.



5개 반.

20개의 팀이 국어 시간마다

자신들이 짠 이야기로

촬영을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2년 전과 다르게

아이들의 영상 스케일은 커졌고

나의 체력은 더 비루해졌다.



교실, 도서관, 강당, 특별실.

모둠마다 촬영 장소는

제각각인데

한 번씩 들러서 잘하는지

봐야겠기에

매일 매시간, 걷고, 또 걷는다.



운동장 한 번.

특별실 한 번.

그리고 교실 한 번.



"얘들아. 쌤 애들 보고 올게."



한 마디 남기고 그렇게 뚜벅뚜벅

멈추지 않고 걷고 걷다 보면



조용한 학교 어딘가에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2023년의 녀석들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때도 겨울이었고,

베일듯한 바람이 불었고,

바닥에는 제 몫을 다한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녀석들이

걱정돼서, 꼭 모둠 리더에게

한 번씩은 전화를 해서



"아이들 잘 이끌고 조심히 촬영해!"



라는 당부를 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앉고야 마는데

하나도 힘이 들지 않고

오히려 두근거린다.



어제는 도대체 하루에 얼마나 건너 싶어

휴대폰을 살펴보니

무려 13,000보.



작디작은 학교에서 13,000보의 걸음을

걷기 위해 부단히 쏘다닌 내가

눈앞에 선해지자

피식, 웃음이 났다.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인정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부득불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걸으며

아이들의 뒤를 쫓다 보면

문득문득

멈칫,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았던 녀석이

제 나름대로 써온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설명하고

구도를 잡고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동안

내가 봐 온 것은,

어쩌면 저 아이의 반의 반도

아닐 수 있겠다 싶어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린다.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평가에 들어가지 않다 보니

흐지부지 되는 아이들도,

그냥 대충, 시간만 맞춰

촬영하는 아이들도

더러 보인다.



그럼에도 밉지 않은 것은,

속상하지 않은 것은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까짓 거

"왜 해요?" 하며

내려놓아도 되는 것을

녀석들은 시나리오를 다시

고치고 뒤집어엎으면서도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선생님들께 찾아가

일일이 장소를 섭외해 주고

"아이들이 소란스럽지 않도록

지도하겠습니다!"며

전체 메시지를 보내고 만다.



영상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겪지 못했을 일이다.

힘들어도 굳이 하는 이유다.



모든 것이 다 끝나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하루로,

깊은 추억을 새기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12월 중순의

그 어느 날.

두툼해진 패딩 주머니에

두 손 데우며

우리들의 영상을 보며,

서로의 웃긴 모습에

뒤로 넘어갈 듯

웃을 모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이

요새 내 수업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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