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일간 이슬아 수필집>
사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몇 번쯤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책이었다. 퇴사를 하기 몇 달 전, 동료의 책상에 이 책이 꽂혀있는 걸 보고 빌려달라 그래서 잠깐 읽었다. 그리고 서너 편 읽다가 덮었다. 한 달도 넘게 그 상태로 가지고만 있다가 끝내 마저 읽지 못하고 돌려줘야 했다.
그때는 단순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녀의 글을 읽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 며칠 만에 500 페이지가 넘는 이 두툼한 책을 후루룩 읽고 나서 뒤늦게 알았다. 그때의 나는 열등감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는 걸.
매일 '언제 퇴사하면 좋을까, 언제 이직하면 좋을까만 궁리하던 나, 영혼은 저 멀리 탈출한 껍데기를 짊어지고 출퇴근하는 일만으로도 지쳐서 집에 돌아오던 나, 배달음식이나 시켜 먹고 방도 어지른 채 누워있던 나,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 이력서도 일기도 쓰지 않던 나.
스스로를 봐주기 어려웠던 그때 만약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더라면 분명 열등감이 폭발했을 거다.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뚜렷한 색을 솔직하게 뿜어내면서 과감하고 성실하게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알차게 하루하루를 살아간 그녀의 기록을 보면 아마 내 마음은 부러움과 질투를 넘어 미움으로 가득 차서 견딜 수 없었을 거다.
무기력하고 목적 없는 일상을 보내는 내가 너무 미워서 자기 비하를 퍼붓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또 침울해하는 짓을 반복했을 거다. 나의 유리 개복치 멘탈을 잘 알고 있는 무의식의 나는 아마 단 세 편 만에 그 미래를 그려보고선 내가 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이유가 있다. 어느 정도 마음의 균형도 찾아가고 있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도 거의 사라졌는데도,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몇 번쯤 질투심이 일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샘 많은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쓴 글은 내게 결핍된 것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때마다 내 안에서 비뚤어진 부러움과 꼬인 존경심이 꼬물꼬물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가 아직도 성숙이라는 자세와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인격 수양이 얼마나 더 필요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증거였겠지.
시기는 시기대로 하는 와중에, 책을 덮기 전까지 몇 번이나 그녀가 대단하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에도 원고를 쓸 정도로 독자들과의 약속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쓰기 두려웠던 이야기를 건드려 보는 용기가, 쓰는 동안 더 어려웠음에도 종종 스스로에게 어려운 과제를 주고 싶다고 말하는 의지가, 잘 못해내더라도 조금만 상심하고 다시 해볼 체력이 받쳐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강하고 어른스러운 태도가 대단했다.
비록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몇 번이나 샘을 내며 그녀의 글을 읽었지만, 확실한 건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 여러모로 내게 좋은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
질투심이 가라앉으면 2018년 이후의 그녀가 쓴 글들도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히 책 표지 사진과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단정하게 해주는 <깨끗한 존경>은 이전부터 궁금했었다. 미슬님이 써나갈 글들도 역시 궁금하고 그녀가 아직 망원동에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동네를 휘적휘적 걷다가 그녀와 복희씨를 우연히 마주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