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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14. 2023

남의 사랑 이야기

짧았던 연애를 끝내고 깨달은 것들

https://youtu.be/gjvvbuUZ0cw


당신께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슬픔이 아니지

바람에 흔들리는 맨드라미를

말없이 바라본다


당신 곁에서 울 수 있다면

그건 슬픔이 아니지

파도 소리 반복되는 저 파도 소리는

내 마음 늙어가는 소리


슬픔은 언제나

낯설다

당신 탓이 아니다

내 탓도 아니다



9월의 노래 / 다니카와 슌타로




  스무 살의 여름이었고 서울로 올라와서 살겠다고 막 결심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의 만남은 전혀 예상에 없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땐 지금보다 보는 눈이 훨씬 좁았다. 담배 안 피지? 조금은 확신하는 투로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창문을 닫으려는 그 사람을 보고 나는 아 내가 그간 몰랐던 세계가, 여태껏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세계가 있구나.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게 물었던 사람이 뭘 먹기 전에는 꼭 어떤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성호를 긋는데, 그 찰나의 경건함이 너무도 고요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모든 감정이었다. 이제 와 이야길 하는 것도 조금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 그 무조건적이었던 헌신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해본다. 고작 여섯 주 동안의 일이었을 뿐인데, 그 짧았던 날들이 나를 육 년 정도는 더 자라게 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별하던 날 밤에는 도저히 혼자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친구한테 전화를 했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과외를 하고 공부를 했는데, 처음엔 울지도 않았으면서 막상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가만히 잘 있는 것 같더니 뜬금없이 오래도 훌쩍이는 나를 보면서 친구는 꼬박 두 해를 점쳤다. 과연 친구의 말대로 나는 아직 그 사람을 잊지 못했다. 그런데 애초에 잊을 수 있는 것이 맞기는 한가. 그때의 감정이 지금에 와서까지 같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때 나 스스로보다 소중히 했던 사람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했던 사람이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지금껏 내가 사랑해왔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 각각이 쌓아올린 몫이 꼭 이만큼씩은 있는데, 이미 내 자신이 되어버린 조각들을 어떻게 전부 떼어내 지워버릴까.


https://youtu.be/gPNu9OIj4Zo


  그러나 사랑이 너무 아픈 일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의 눈밭 위에서 손을 탁탁 턴다. 다시 눈이 나려 쌓여 하얗게 덮이기를 기다리면서, 마음속에 남아 있던 낙엽들을 떨어뜨린다. 메시지는 굳이 남기지 않는다.


  절대적인 횟수가 많았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짧았던 연애를 반복해서 끝낸 후 생각해보건대, 나에게 진정 필요한 사람은 단순히 ‘애인’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동반자’에 가까운 듯 싶다. 어쩌면 조금은 가족 같은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며 자주 느꼈던 감정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오늘도 수고했다, 고생했다 하며 나를 반겨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런 이 앞에서 한껏 솔직해지고 싶었다. 굳이 숨기거나 감추는 것 없어도 내가 쌓아온 모양과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도 상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지.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너를 기다려 왔어. 무슨 유명하다는 미국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이지만, 나는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뱉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길 꿈꾼다.




  그 사람은 아마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스스로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여섯 주, 짧았던 꿈 같은 것에 불과했을 나 정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아프지 말라고, 행복하라고,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도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직접 전할 용기는 없으니 이렇게만 남겨둔다. 사실 이제 더는 나와 관계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행복이 꼭 내 옆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래도 상관 없다. 이미 시간은 흐를대로 흘렀고, 놓치기 싫어 꽉 움켜쥐었던 손아귀 힘도 풀려버렸으니까.


  당신이 오래 살아서, 내가 사랑했던 당신의 시선과 통찰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곳에 있든 또 어떻게 지내든 변하지 않을 마음이다.




  이제 나는 기쁨을 연습하고 싶다. 더 이상 사랑이 슬픈 일이 아니었으면 한다.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기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여서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순간들을 함께 누리고, 채워나가고 싶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일어나는 것이고, 나를 바꾸어 훌쩍 자라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다시 또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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